182화
시간이 지나자 어둠의 결계가 사라졌다. 안으로 들어가니 각성을 마친 루시퍼가 등을 벽에 기대고 앉아 있었다.
나는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뱉으며 녀석에게 물었다.
“끝났나?”
“…… 아직.”
“그래?”
마치 알에서 금방 나온 병아리처럼 지친 기색을 내보인다. 각성을 마쳤을 뿐, 아직 안정화가 되지 않아 보이는 모습.
그래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저 상태의 녀석이 나보다 강하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무엇을 할 생각이지?”
“…… 멸망.”
변하지 않았다.
“이유는?”
“없다.”
그때와 같다.
“멈출 생각은?”
“없다.”
“그래, 어차피 네 마음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어.”
“……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지? 내가 각성 중인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저 메카니아에서 기다리는 게 더 나았을 텐데.”
그때와 같은 대사.
나는 저 말을 듣고 힌트라 생각하여 메카니아에서 대기했었다.
“……”
“각성을 막으러 왔나?”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막지 못할 것이란 건 알고 있었어.”
“그럼 왜 온 것이지?”
“그냥. 잠깐 이야기 좀 하러 온 거야.”
나는 살기를 천천히 낮추며 녀석의 앞에 앉았다. 놈이 나를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아니 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이 루트는 이미 경험해보았으니까.
루시퍼가 몸의 관절을 하나씩 꺾어서 풀더니 내게 물었다.
“무슨 이야기?”
“멸망 이후의 이야기.”
“……”
“네가 말하는 멸망은 무엇을 위해 진행되는 거지?”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다.”
“아니, 알고 있기에 물어본 거야. 너와의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명분을 확실하게 하려고.”
내 질문이 녀석에게 궁금증을 일으켰다. 대체 내가 무엇을 알길래 이런 질문을 한단 말인가? 싶은 표정으로 얕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대답해줄 말은 없다.”
“그래? 그럼 내가 너와 싸울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라는 거지?”
“이유가 몇 가지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너와 나는 어차피 싸우게 될 것이고. 둘 중 하나는 사라진다.”
“둘 다 사라진다면?”
“……”
내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됐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나도 더 이상 묻지 않도록 하지.”
“……”
“그럼…. 나는 격전지에서 기다리도록 하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최선을 다해 덤벼라.”
[시스템 메시지]
[열네 번째 라운드에서의 격전지를 선택해주시기 바랍니다.]
[1. 폐허가 된 마을. ]
[2. 정복자의 무덤.]
[3. 엘프 헬름.]
[4. 메카니아.]
[5. 지옥.]
[6. 천상.]
이번 라운드의 승패를 가로지를 선택지. 저번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제일 방어가 강한 메카니아를 선택했었는데.
이번에는 다르다.
[‘김천재’ 플레이어님이 첫 번째 선택지 ‘1. 폐허가 된 마을.’을 격전지로 선택하셨습니다.]
[스토리의 흐름이 변경됩니다.]
루시퍼가 입꼬리를 올렸다.
“너야말로.”
“후회하지 않도록.”
“후회는 없다.”
대화를 마친 나는 녀석에게 피우던 담배를 던진 후 자리를 떠났다.
어차피 내 역할은 녀석과의 대화로 시간을 끄는 것뿐, 이 이상 내가 머물 필요는 없었다.
이 짧은 대화로 녀석의 명령을 늦출 수 있었으니까.
내가 동굴 밖으로 나가자 루시퍼의 명을 받는 놈이 허겁지겁 안으로 달려갔다.
죽일까? 싶어 낫을 휘둘러봤으나 시스템이 만든 방어막에 맞혀 공격할 수 없었다.
캉!
‘역시….’
목적은 달성했다.
이로써 메카니아로 공격 오는 악마 부대의 텀이 생겼다.
* * * * *
메카니아로 돌아오니 악마를 처리한 모두가 잠시 쉬고 있었다.
멤버가 바뀐 첫 전투의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너무나도 압도적인 싸움이었고, 피해자는 단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우리뿐만 아니라 메카니아 전역을 통틀어서 말이다.
그 정도로 강력했다.
앞서 내가 만든 초월자 그룹보다 더.
‘……’
뭐…. 그때와 다른 점이라고는 신급 무기의 사용 여부와 고티와 조영기가 빠지고, 유소라와 조복춘이 추가되었다는 점.
낮잠을 자고 있던 지군이 상체를 일으켜 세우더니 내게 물었다.
“잘 끝내고 왔어?”
“…… 그래.”
“그래? 그럼 형도 한숨 자도록 해. 어차피 다음 전투까지 시간이 많이 남잖아.”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안 졸려. 나는 괜찮으니 너나 푹 쉬도록 해.”
“오케이, 그럼 이동할 때 깨워줘.”
텀이 생긴 덕분에 전투와 전투 사이에 쉴 시간이 생겼다.
선택지를 결정했으니 이제부터는 메카니아에 주요 병력이 올 이유가 없고.
그렇다면 루시퍼의 주요 부대에게 이곳이 당할 일도 없다.
나는 곧장 컨트롤 타워로 이동해 강대원을 찾았다.
“이만 자리를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저희가 없는 동안에는 여기 있는 분들이 잘해주셔야 해요.”
강대원이 딱딱한 얼굴로 내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쇼.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실수 없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강대원은 원래 이런 캐릭터가 아니다.
우리가 그를 구해준 시기가 저번 게임보다 조금 빨랐는데, 그 시기부터 지금까지 달라진 흐름이 또 다른 강대원을 만든 것 같다.
정말 길지 않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나는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든든하네요.”
“천재 씨가 천재 씨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발목 잡지 않아야지요.”
내가 내 길을 간다.
NPC의 대사 치고는 꽤나 마음이 깊은 이야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그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해가 지면, 다시 보도록 합시다.”
“…… 알겠습니다. 해가 지면 다시 보도록.”
이 대화가 우리의 마지막 인사다.
루시퍼 사냥이 끝나면 이제 마지막이니까.
나는 담담하게 인사를 마친 후 자리를 떠났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그룹원들이 나를 맞이했다.
“다들 준비됐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의 볼일을 끝낸 나는 폐허가 된 마을로 가는 게이트에 몸을 담았다.
* * * * *
결전의 날이라서 그런가? 이상하게 하늘이 더욱 붉어 보였다. 끝나지 않는 황혼이 폐허가 된 마을을 덮고 있다.
루시퍼 녀석이 언제 도착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녀석을 맞을 준비를 끝냈다.
김준철의 기갑 부대가 마을로 통하는 모든 입구를 지키고 있고,
플레이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자신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위치를 맡았다.
리 커우러나와 그의 부하들이 무전기를 가지고 ‘폐허가 된 마을’ 전역으로 퍼져 통신 반 역할을 했다.
삐빅.
-전방 6km 부근 악마들의 움직임이 포착됩니다.
드디어 시작인가.
드루이드 김리아와 마이클이 마을의 서쪽으로 이동하고, 조영기, 김연희가 동쪽으로 이동했다.
이 게임에 참가한 플레이어들이 전부 그들의 뒤를 따랐으며, 북쪽은 단 다섯 명.
새로운 초월자 그룹만이 남아 지키기로 했다.
“김준철 소령님, 그럼 남쪽을 잘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준철이 대검을 꺼내 보이더니 좋은 미소로 내게 말했다.
“맡겨주십시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채널 5번으로 무전 주시고요.”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 좋네요.”
그가 나를 향해 가볍게 경례를 하더니 남쪽으로 떠났다.
“와아-! 미쳤네, 미쳤어. 저번 게임보다 악마들이 훨씬 많은데?”
지군이 건물 위에서 망원경을 들고 멀리를 보았다. 나는 담뱃불을 붙이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
“어, 근데 담배 좀 작작 피워라. 그러다 암 걸려서 뒤진다.”
“……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보급 부대는?”
내 질문에 지군이 미소를 지었다.
“준비 완료.”
“이량훈 창고에서 얻은 아이템들은 전부 보급했고?”
“어, 덕분에 다들 능력치가 올라가서 제법 강해졌어.”
이 이상의 준비는 할 수 없다.
참전한 주요 멤버의 스킬과 아이템이 완벽하다.
그 전보다 플레이어의 수가 좀 적은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어차피 한 번에 살려낼 수 있는 리바이브 수는 제한되어 있으니깐 괜찮다.
준비를 마친 나는 성당 앞으로 이동해 소환수들을 불러 모았다.
“…… 스켈레톤, 너희들은 북쪽 입구를 지키도록 한다.”
키에에엑!
각성 합성을 통해 수를 줄여 놓으니, 보기가 훨씬 좋다.
이어 리바이브로 살려낸 소환수, 본 드래곤을 제외한 박규환, 가웨인, 아레스, 불카누스를 일렬로 세워 놓았다.
‘좋다.’
불카누스를 빼면 더 좋겠지만, 그래도 신화 등급이면 조합할 때 특수한 능력치를 가져올 수 있겠지.
나는 그들의 머리를 한 번씩 만져 주었다. 검은 오라가 머리 위에서 원형을 그리며 빙글빙글 돈다.
네 명의 머리를 전부 만지자 새로운 홀로그램 창이 나왔다.
[시스템 메시지]
[‘리바이브’로 살려낸 소환수의 조합을 진행하시겠습니까?]
[YES/NO]
“…… 예.”
[조합식을 선택하여 주십시오.]
[1. 방어형]
[2. 공격형]
[3. 치유형]
[4. 복합형]
무엇을 선택해도 큰 차이는 없다. 어차피 지금 상태로 조합하면 모든 능력치는 최상일 테니까.
“공격형.”
그래도 나는 ‘공격형’을 선택했다.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다. 남자는 인생의 큰 기로에 놓이면 신중하게 결정하고, 다짐이 서면 주저하지 말고 공격적으로 나가야 한다고.
[‘2. 공격형’ 소환수를 선택하셨습니다.]
[총 네 마리의 소환수를 조합하여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킵니다.]
박규환이 나를 향해 경례했다.
호랑이 모습의 가웨인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떨구었다.
아레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검지와 중지로 관자놀이를 스치듯 앞으로 튕겼다.
“……”
불카누스가 석연찮은 표정으로 내게 중지를 내밀었다.
‘끝까지 빌어먹을 새끼네.’
내 몸에서 흘러나온 검은 오라가 네 명의 몸을 휘감더니, 커다란 원형의 구가 되었다.
이어 오라가 휘몰아치며 빠르게 회전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결과를 기다렸다.
‘과연….’
이 네 명을 섞으면 무엇이 나올까? 나도 처음 해보는 조합이라 기대가 된다.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숨이 빨라질 정도였다.
결과에 따라 루시퍼와의 대결이 큰 차이를 보일 테니….
[새로운 소환수 ‘레카(환인)’를 영입합니다!]
‘…… 도깨비라고 해야 하나.’
굉장한 녀석이 나왔다.
검은 털이 온몸을 덮은 거구의 사내. 도깨비 가면과 뿔 달린 갑주가 엄청난 기운을 뿜어냈다.
그의 손에는 익숙한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외관을 보니 아레스의 창에 가웨인의 대검을 합쳐놓은 것 같다.
삼국지에서 보았던 관우의 청룡 언월도가 떠오른다.
가웨인의 의지를 많이 계승한 결과물인지 전체적인 모습에서 그 형태가 많이 드러났다.
“주군.”
“…… 그래.”
녀석이 가볍게 목례를 했다.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 눈앞에 있는 홀로그램 창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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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규 영입: 레카(환인)
레벨: 99
생명력: 9999/9999
마나: 999/999
체력: 999 공격: 999
방어: 999 속도: 999
▶은빛 칼날(패시브) (마나 소모: 0)
-공격을 적중시킨 상대방의 몸이 3초간 마비됩니다.
-명중률 100%, 치명타 100%.
▶분노의 포효 (마나 소모: 300)
-전방 500m 내에 있는 적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고 아군의 사기를 끌어 올립니다.
-무방비 상태: 5초(보스 제외.)
-대장의 패기: 아군의 능력치 200% 증가.
▶무한 전생 (마나 소모: 0)
-300초의 간격을 두고 무한
▶신속 (마나 소모: 100)
-신체를 순간적으로 강화하여 신체 한계 이상의 속도로 움직입니다.
-이동 속도, 공격 속도증가 (지속 시간: 6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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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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