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던전 확인을 마친 그룹원들이 한둘씩 마을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를 본 우리 모두가 실망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우리 중 누군가는 ‘스킬 봉인’ 주문서를 가져와야 했는데, 이번에 획득한 아이템이라고는 내가 구해온 ‘마법 강화’ 주문서가 끝이었다.
지군이 턱을 괴며 독백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말이야…. 분명 스킬 봉인 주문서는 던전에-”
내가 지군의 말을 끊으며 책상을 두드렸다.
쿵. 쿵. 쿵.
“다들 확실하게 둘러본 건 맞지?”
정우가 모두를 대신해 대답했다.
“당연하지! 내가 그 조그마한 던전을 몇 시간이나 돌아다녔는데!”
“…… 모두 확실하게 확인했고?”
리나가 먼저 대답했다.
“응.”
지군이 복창하듯 바로 말했다.
“나도!”
정우가 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열심히 하지 않고 있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모두의 목숨이 걸려 있는데 말이다.
‘흐음…. 그럼 그 주문서가 어디에 있는 거지.’
모두가 고민에 빠진 그때, 고티가 바닥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스킬 봉인’ 주문서를 찾고 있는 건가?”
내가 고개를 내밀어 그를 보았다.
“…… 어.”
“그 스킬은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 왜지?”
“벌써 구한 녀석이 있거든.”
“뭐…?! 누군데?”
고티가 입에서 연기를 뿜더니 허공에 손가락질했다.
[이 량 훈]
“…… 응? 이량훈?”
“그래, 이량훈.”
“…… 녀석은 벌써 죽었잖아?”
그것도 내 손에 말이다.
“그렇지, 하지만 녀석이 얻은 아이템들은 죽지 않았어.”
“……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모른다. 녀석의 명을 따르던 놈들이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하아…. 일이 생각보다 복잡해지네.”
상황을 지켜보던 리 커우러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대화에 끼어들었다.
“천재 행님, 그 이량훈이라는 녀석의 잔당은 저희가 전부 잡아놨습니다.”
“그래?”
“예, 말씀만 하시면 언제든지 고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 고문까지는 아니고, 그저 심문 정도로 봉인 주문서의 행방을 좀 찾아봐.”
“맡겨 주십쇼. 녀석들의 손가락을 부러뜨려서라도 찾아내겠습니다.”
“아니….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찾아내 봐.”
“넵!!”
리 커우러나가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녀석을 펍 밖으로 내보낸 뒤 다시 대화를 이었다.
“고티, 당신은 언제부터 우리와 함께 움직일 생각이지?”
“…… 아직. 때가 되면 다시 찾아오도록 하마.”
내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알았어, 하지만 너무 늦지는 말아줘. 곧 전투를 시작할 거니까.”
“그래, 그럼 이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고티가 사라졌다. 앞서 만난 일본 플레이어의 속임수와 전혀 다른 레벨,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 * * * *
리 커우러나가 이량훈의 잔당들을 심문하는 동안, 나는 조영기와 함께 엘프들이 대기하고 있는 장소를 찾았다.
이 게임 내에서 드워프 협곡과 제일 비슷하며, 엘프 헬름처럼 숲이 우거져 있는 곳.
[망자의 숲]
폐허가 된 마을에서 정복자의 무덤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장소다.
대경성과도 멀지 않아 연락하기 좋고 안락한 장소.
다만 언데드 몬스터들이 꽤나 많이 출현하는 곳이어서 걱정했는데,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되어 있었다.
엘프들의 기운이 벌써 망자의 숲을 점령한 지 오래. 이름을 바꿔야 할 정도로 주위가 활기를 띠고 있었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가자 외부인을 감지한 엘프와 드워프 병사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나를 확인하더니 반갑게 맞아 주었다.
-허허, 김천재 군. 오랜만일세!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숲의 안쪽을 향해 걸었다.
그들의 안내를 따라 가 보니 엘프 여왕이 반짝이는 나뭇가지로 만든 나무집 안에 대기하고 있다.
“…… 실례하겠습니다.”
내가 나무집 안으로 들어가자 여왕이 한걸음에 달려 나와 반겨 주었다.
“잘 지내셨나요?”
“예, 여왕님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간단하게 인사를 마친 후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그럼 천사라는 자들은 이제 사라진 건가요?”
“아뇨, 아누라는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생겨날 겁니다.”
“그렇군요….”
“다만 그 신이라는 녀석이 어떤 반응을 할지는 모르겠어요. 악마들만 남게 되면 이 세계는, 아니 녀석들의 손이 닿는 모든 공간이 어둠에 물들 테니까요.”
엘프 여왕이 지팡이로 땅을 톡톡 치자 주변이 전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종으로 보이는 엘프가 커다란 보라색 구슬을 가져오더니 내게 보여주었다.
“김천재 님, 잠시 이걸 보시겠습니까?”
내가 고개를 돌려 보라색 구슬을 보았다. 그 안으로 어디인지 모르겠는 격전지가 보였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구슬이 나타내는 모습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가깝다는 것.
“제가 싸우고 있군요?”
“계속해서 확인해 보았지만 천재 씨는 저곳에서 죽습니다.”
“……”
“아무래도 이 싸움은 피하는 게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격전지를 유심히 둘러보았다. 로봇들이 날아다니는 것으로 보아 메카니아가 확실한데, 적의 생김새를 유심히 보니 사탄과 그의 부하들이다.
‘…… 큰일이네.’
이 구슬이 보여주는 예지 장면은 높은 확률로 미래를 맞춘다고 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이렇게 될 일은 없을 거예요.”
“…… 그렇습니까?”
“예, 절대로요.”
그렇다.
내가 사탄과 그 부하들에게 당하는 일은 결단코 일어나지 않는다. 힘의 격차가 좁혀질 수 없을 만큼 큰데다가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만큼 기적적인 능력이 있는 놈이 아니니까.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작전을 바꿀 수는 없다.
나 자신을 믿고 이대로 밀고 가야 할 뿐.
미래는 내가 직접 바꿔야 한다.
“허허허허, 김천재 왔는감!”
드워프의 왕이 뒤이어 나를 찾아왔다. 엘프 여왕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보라색 구슬을 치웠다.
나는 드워프의 왕과 악수를 하며 그동안의 안부를 전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자네 부탁인데 당연히 와야지.”
드워프의 왕은 묻지도 않은 병력의 상태와 그들의 수를 읊더니 언제든지 싸울 수 있다며 강한 자신감을 내보였다.
나는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내가 과거에 치렀던 게임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내 편이 훨씬 많아졌으니까.
‘……’
이번에는 확실하게 이길 수 있다.
그 빌어먹을 녀석한테.
* * * * *
조영기가 망자의 숲에 남아 우리들의 통신망이 되어주기로 했다.
같은 그룹원이었던 플레이어 간에는 귓속말이 가능하니, 신속한 연락과 정확한 작전 지시가 가능하게 되었다.
나는 폐허가 된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정우를 찾았다.
봉인 주문서를 찾는 동안 우리가 해야 할 마지막 일이 생각났다.
“…… 그래서, 이번 작전에 해외 플레이어들을 유입하자. 이 말이야?”
“그렇지.”
“우리 싸움에 녀석들이 힘을 보태어 줄까?”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녀석들도 어차피 나중에는 루시퍼와 싸우게 될 거야.”
“……”
“그때 우리가 도와준다는 조건을 걸면 참여하는 자들이 있을 거고.”
일곱 번째 라운드를 같이했던 자들이 있으니, 분명 글로벌 서버에는 도와줄 사람들이 있을 거다.
“허허….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네.”
내가 지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녀석을 데리고 가면 알아서 할 거야.”
빵을 먹던 지군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 나?”
“그래, 협상은 네가 직접 하도록 해. 지금 지옥은 글로벌 서버가 됐으니, 거기 있는 플레이어들을 찾아.”
“…… 거기 위험하잖아? 지금 사탄하고 강해진 부하들이 전부 지옥으로 향했다면서.”
“성전 근처는 악마들이 없을 거야. 배치해놓은 천사들이 워낙 많은데다가 신성 주문이 펼쳐져 있으니까.”
“하아…. 닝겐. 내게 너무 힘겨운 일을 주지 말라능.”
정우가 주먹을 꽉 쥐었다.
지군이 그 모습을 보더니 손가락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라면 가능하지. 맡겨 두라고.”
“…… 그럼 부탁한다. 조건은 방금 말한 대로 도움을 준 국가를 우리도 도와준다는 것.”
“그 조건 하나로 협상하라는 거지?”
“그렇지. 어차피 우리가 총대 메고 선봉장에 서는 거니까.”
“…… 오카이.”
이야기를 듣던 김연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나는?!”
“…… 너는 이곳을 지키고 있어. 마지막 싸움에서 네 스킬은 핵심 카드 중 하나니깐.”
“하…. 나도 엘프들 보러 가고 싶다.”
“곧 만나게 될 거야. 다들 피곤하니까 징징대지 말고.”
“아, 그래그래. 알았다고.”
“그나저나 소라 씨는 어디에 있지? 아침부터 보이지 않던데.”
유소라가 아침부터 보이지 않는다. 모두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녀의 행방을 아는 자는 없었다.
마을 전체를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설마….’
그 녀석과 접선한 건가?
유소라가 USB의 내용을 알게 되면 안 되는데 말이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
누군가의 무거운 발걸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피투성이의 리 커우러나가 지친 모습으로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방향을 보아 잡화점이다.
‘심문….’을 어떻게 했길래 온몸이 피에 젖을 수 있는 거지?
같은 편이라서 다행이지, 적으로 만났으면 참으로 끔찍한 놈인 것 같다.
나는 리 커우러나의 뒤를 따라 걸었다. 어차피 잡화점에 들러 담배도 좀 사려고 했는데 잘 되었다.
‘…… 뭐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리 커우러나를 따라가 보았는데, 잡화점이 아니라 그 근처에 있는 푸른 지붕의 여관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휴식을?
그것도 심문 도중에.
“…… 흐음.”
나는 그가 들어간 여관 앞에 서서 잠시 대기했다. 행동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벽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창가로 몰래 들여다보려고 해봤지만 전부 닫혀 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시스템 메시지가 반응하니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고.
‘……’
쾅!
갑자기 문이 강하게 열리며 누군가가 나왔다.
나는 급하게 골목길에 몸을 숨기며 그 앞을 보았다. 그 안에서 생각지 못한 인물이 조용하게 걸어 나왔다.
그것도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며 말이다.
‘…… 유소라?’
유소라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하는가 싶다. 리 커우러나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왔다.
‘한 낮에 여관에서….’
저 둘이 대체 무슨 일을 한 걸까? 삼 분이 채 안 되는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말이다.
여관에서 나온 리 커우러나가 코끝을 훔치며 유소라에게 말했다.
“모두 사실입니까?”
“…… 예.”
“그럼 저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내가 숨을 죽이고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흐름을 보아 유소라가 리 커우러나에게 무언가를 설명해준 것 같은데.
“…… 심문을 멈추고 천재 씨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하세요. ‘스킬 봉인’ 마법서는 이미 사라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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