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마왕의 알을 중심으로 악마들이 모여들었다.
하급 악마부터 중급 악마까지, 동굴 내에서 일하는 직책을 가진 놈들이 전부 있었다.
그들 중 체격이 좋은 중급 악마 한 명이 앞으로 나오더니, 마왕의 알을 들어 조심스럽게 동굴의 안쪽으로 이동했다.
벽면이 매끄럽고 반짝이는 곳에 도착한 악마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탄님.”
“……”
“드디어 나왔습니다. 저희의 새로운 왕이자, 지옥의 미래를 이끌어주실….”
공간 너머 다른 차원에 있던 사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 굉장하군.”
그가 알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오라를 보더니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음에도 그 오라가 대형 몬스터만큼 짙고 강렬했다.
하급 악마들은 손도 못 댈 정도로 강한 기운. 그나마 중형급 악마쯤 되면 다리가 후들거리는 정도로 끝날 만한 힘이다.
중형 악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사탄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지체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 그 알은 루시퍼 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동굴 깊숙한 곳에 숨겨놓도록 해라. 때가 되면 알아서 부화할 것이다.”
“동굴 깊숙한 곳에…. 정말 그냥 두면 되겠습니까? 둥지나 알을 품을 만한-”
“필요 없다. 저 알에 있는 자가 너희와 같은 존재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사탄의 명을 받은 악마가 고개를 낮게 숙여 목례를 하더니, 알을 들고 동굴의 제일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알 관리에 대해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또다시 물었다가는 왠지 자신에게 큰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직감으로 입을 다물었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
알을 들고 이동하는 동안 알에서 나온 어둠의 기운이 중급 악마의 몸에 조금씩 번지기 시작했다.
마치 천천히 자라난 넝쿨이 담장을 휘감는 것처럼 말이다.
중급 악마는 모르고 있었다.
동굴 제일 깊숙한 곳에 알을 가져다 두라고 한 이유를. 그리고 자신의 몸에 어떠한 변화가 생기고 있는지.
사탄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비열한 웃음을 낮게 뱉었다.
“크하하하….”
* * * * *
엘프 헬름과 드워프 협곡의 중간, 세계수가 있는 곳에 두 종족의 수장들이 모였다.
덥수룩한 수염을 꽈배기처럼 틀어놓은 드워프 왕이 말했다.
“오랜만이네.”
엘프의 여왕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오랜만이군요.”
“그동안 잘 있었나?”
“그럼요, 당신은 어떠셨나요?”
“나도 잘 지냈지.”
둘은 만남이 어색한 듯 먼 곳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땅을 보았다가를 반복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한참 동안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자 드워프의 왕이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김천재의 측근이 왔다 갔다지?”
“…… 예.”
“이유는 내가 들은 그 사실이 맞고?”
“당신이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도움이 필요하다고는 하더군요.”
드워프의 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우리 도움이 필요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글쎄요. 정확하게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그 세계의 신에게 대항하기 위해 힘을 빌려달라고 했어요.”
“신에게 대항한다라….”
드워프가 대답을 망설였다. 김천재가 말한 대상이 다른 세계의 신이라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을 알고 있다.
“여왕이여,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드워프의 고민과는 다르게 엘프 여왕은 바로 답을 내었다.
“저희는 이 대화가 끝나는 대로 김천재의 세계로 갈 생각입니다.”
“…… 이곳을 버리고?”
“버리는 것이 아니지요. 일이 끝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테니.”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나?”
엘프 여왕이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이길 테니까요.”
“우리가 신에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드워프들은 싸우기 전부터 질 생각을 하고 있나요?”
이 말은 과거 드워프의 왕이 엘프 여왕에게 비아냥대며 했던 이야기다.
용감한 드워프 전사들은 항상 패배를 생각하지 않고 움직인다는, 물러서지 않는 진정한 남자의 길.
그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드워프가 대답했다.
“아니, 우리는 무조건 이기지.”
“…… 그럼 가실 건가요?”
“당연하지! 우리도 대화가 끝나면 곧장 갈 생각이었어.”
“그럼 잘 되었네요. 때마침 김천재와 약속한 시각이 되었으니…. 게이트 너머로 이동하도록 하죠.”
엘프 여왕이 세계수 앞 게이트로 걸어갔다.
두 개의 영혼이 날아들어 그녀의 주위에서 춤을 추듯 통통거렸다.
귓불을 간지럽히기도 하고, 뺨 위로 스쳐지나가기도 하고.
그들에게 따스함을 느낀 엘프 여왕이 좋은 미소로 세계수에게 말했다.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을 잘 지켜주길 바란다.”
세계수가 대답이라도 하듯.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나뭇가지가 크게 흔들렸다.
* * * * *
‘폐허가 된 마을’로 돌아오자 수많은 사람이 우리를 반겼다.
-너네 어디 갔었냐! 우리 전부 뒤질 뻔했다고!
-그래 맞아. 무작정 마을을 맡기기만 하고 너희는 다른 곳으로 가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빌어먹을, 너 진짜 고인물은 맞냐?
아우성이다.
나는 리 커우러나를 그들 앞으로 불러 말했다.
“설명은 이자에게 듣도록 하고. 나는 고인물이 맞아. 불만 있으면 직접 덤벼도 좋고.”
내가 등 뒤로 오라를 보이자 다른 플레이어들이 뒤로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뭐….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어.
-마, 맞아. 우리를 이 게임 밖으로 보내준다는데 무슨 불만이 있겠어.
“…… 커우러나. 리나는?”
“동쪽 펍에서 마이클이라는 자와 함께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쪽 펍이라….”
나는 리 커우러나 일당과 함께 마을을 둘러보며 걸었다. 입구를 제외한 외관이 그대로인 것으로 보아 큰 타격은 받지 않았나 보다.
“줄 맞춰- 가!”
리 커우러나의 명령에 검은 두건을 쓴 플레이어들이 줄지어 걷기 시작했다.
마치 악당 무리가 마을을 약탈하러 온 것 같은 모습이다.
이미 그들을 알고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는데 말이다.
플레이어뿐만 아니라 NPC들도 우리를 보며 수군거렸다. 표정을 보아 좋지 않은 대화가 오가고 있음이 확실하다.
마을을 보호해주면서 이런 대우를 받는다니.
‘얼굴이 너무 험악해….’
나는 리 커우러나에게 일당들을 해산시키게 한 후 동쪽 펍을 방문했다.
문을 활짝 열자 그 안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리나와 마이클이 보였다.
“……”
김연희도.
“어이 김천재!”
흠뻑 취한 김연희가 나를 향해 달려와 매달렸다.
“놔.”
“아이 왜 이래? 일도 끝났는데 신나게 놀아보자고.”
“…… 너 많이 취했다.”
“뭐? 내가? 내가 취했다고? 무슨!! 나 한 잔밖에 안 했어.”
내가 손짓하자 리 커우러나가 김연희를 끌고 구석으로 데려갔다.
마이클이 맥주잔을 머리 위로 들더니 내게 소리쳤다.
“천재 킴!”
“마이클.”
“일은 잘 처리 했어요우?”
“예스, 그나저나 리나. 오랜만이야?”
리나가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내게 말했다.
“천재 씨도 오랜만이야.”
정우가 큼큼거리며 내 뒤를 따라왔다.
“오랜만입니다. 리나 씨.”
리나가 마정우를 보더니 눈웃음을 쳤다.
“어어, 멋진 전사님도 같이 계셨네요.”
“…… 멋지다고 해주시니 고맙네요.”
“뭘요.”
나는 정우의 등을 가볍게 툭 친 후 리나의 테이블에 합류했다.
* * * * *
리나가 맥주잔을 기울이며 내게 물었다.
“그래서, 나를 찾은 이유가 뭐지?”
“알고 있을 텐데.”
“…… 대강은.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몰라서 말이야.”
내가 담배 연기를 내뿜은 후 천천히 향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9랭크 이상의 마법사가 필요한데 당신이 그 적임자여서.”
“…… 내가?”
“그렇지. 당신 말고는 이 게임 내에 높은 랭크의 마법사가 없어.”
“……”
“모든 라운드를 통틀어서 우리가 선두인데, 마법사 자체를 몇 번 못 봤거든.”
리나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맥주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당신 그룹에 들어와라, 이 말이지?”
“그렇지.”
“그럼 내가 얻는 이득은 뭐지?”
“…… 이 게임에서 나가는 거.”
“게임에서 나간다라…. 그건 내가 당신 그룹에 합류하지 않아도 가능한 거잖아?”
그녀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누구든지 루시퍼의 끝을 본다면 이 게임은 종료되니까 말이다.
나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봐야 해.”
“…… 반대의 경우?”
“그래, 나는 이 마을에 루시퍼를 소환할 생각인데. 내가 지게 된다면 다들 어떻게 될까?”
“……”
“당신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 질문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같은 테이블이 아닌 이 펍 안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가 말이다.
NPC 주인장마저 침을 꼴깍 삼키며 내 이야기를 들었다.
“전부 죽을걸? 리나, 그렇게 되면 모두가 이 게임에서 나가지 못하게 될 거야.”
“다른 플레이어들이-”
“불가능해. 내가 라운드를 진행해 이미 루시퍼의 봉인이 해제된 상태라면.”
나는 다시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마셨다. 그리곤 천천히 뱉으며 리나의 표정을 관찰했다.
쓰읍, 푸후-.
그녀의 얼굴이 점점 구겨졌다가, 천천히 펴지며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당신 그룹에 합류할게.”
“좋은 생각이야. 어차피 이 게임에서 나간다는 목적은 같잖아?”
“뭐…. 그렇지?”
내가 리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맞잡더니 위아래로 흔들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이제 그룹 초대해줄래?”
“…… 기다려. 아직 네 대타로 있는 그룹원을 탈퇴시키지 못했어.”
“내 대타? 그건 누군데?”
“…… 차카니라고 들어봤나?”
리나가 눈을 부릅뜨며 입을 활짝 열었다.
“차, 차카니?! 대마법사 플레이어 차카니 말하는 거야?”
“그래, 본적은 없겠지만 그가 나와 함께 있어.”
“아니! 차카니가 함께 있는데 나를 대신 그룹에 넣겠다고? 이유가 대체 뭐야?”
질문이 길어졌다.
나는 간단하게 그동안의 일을 설명한 후 앞으로의 작전을 설명했다.
루시퍼가 부활할 때까지 기다린 후, 녀석을 폐허가 된 마을로 유인해서 처리할 계획.
모든 이야기를 들은 리나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 그리고 우리가 과거에 진행했던 열다섯 번째 라운드는 이곳에서 열네 번째 라운드야.”
“…… 그럼 그 후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건 아직 모르지.”
대충 예상이 되는 스토리가 있기는 하지만, 달라진 흐름을 함부로 예측하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이들은 내 말 한마디에 동요할 것이 뻔하니까.
중요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끝나자 정우가 맥주잔을 들었다.
“자 자, 그럼 건배 한 번 하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납시다.”
리 커우러나가 정우의 눈신호를 받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님들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간베이!”
리 커우러나의 부하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간베이!
우리도 기분 좋게 잔을 부딪쳤다.
캉!
“……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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