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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터벅. 터벅. 터벅.

우리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그 속의 존재가 모습을 보였다.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저 녀석이 나올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 사탄.”

사탄이 박쥐 같은 날개를 활짝 펼치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야, 김천재.”

‘…… 그렇구나.’

사자의 서에서 말한 위험한 존재라는 게 저 녀석이었나?

그러기에는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격차가 큰데….

스토리 설명은 모든 플레이어가 똑같이 받으니, 정해진 글이 보인 것이겠지.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응? 어떻게 라니. 나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뿐인데.”

“네가 있어야 할 자리?”

“그래, 내가 있어야 할 자리.”

이게 무슨 말인가.

지옥에 있어야 할 악마 녀석이 인간계로 넘어와 저런 말을 하다니.

내가 혀를 차며 녀석에게 물었다.

“누가 너를 살려주었지?”

“누구긴. 루시퍼 님이시지.”

내가 녀석에게 이 질문을 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때문이다.

저 정도의 힘을 가진 녀석을 살려내려면 많은 오라를 사용해야 한다.

근데, 현재 힘이 빠진 루시퍼가 굳이 사탄을 살려낼 이유가 있었을까?

앞으로 큰 전투가 펼쳐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뜬금없이 사탄을 위해?

‘허허….’

다른 대악마들을 살려내는 일은 전투가 끝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굉장히 비효율적인 일.

머리가 비상한 루시퍼 입장에서는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추가된 건가….

사탄이 고개를 천천히 내리며 쭈그려 앉더니 내게 말했다.

“김천재,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 뭐?”

“네가 이곳에 온 이유쯤은 이미 알고 있다. 너는 볼일을 보러 가도록 해라. 나는 내 갈 길을 가야겠다.”

“내가 왜 왔는지 알고 있다고?”

“그래, 한 번 맞춰볼까?”

정말 알고 있나? 확신에 찬 녀석의 표정을 보니 무언가를 알고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내가 석연찮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녀석에게 말했다.

“…… 말해봐.”

“벨제붑을 잡으러 왔지?”

‘…… 정말 알고 있구나.’

나는 대답하지 않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내 행동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을 것이다.

사탄이 검은 오라를 땅에 흘려보내더니, 갑자기 공간이 왜곡되며 몸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건 녀석이 앞서 보였던 타차원으로 이동하는 ‘거울’ 능력.

“김천재, 벨제붑은 이 동굴 안에 있다. 이제 녀석에게 볼일은 없어졌으니 네 맘대로 하도록 해.”

“……”

“그럼 굿바이!”

사탄이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나는 놈이 사라진 자리를 훑어보았다. 혹시라도 녀석을 추격할만한 단서가 있나 보았는데, 감쪽같다.

‘전보다 강해졌다는 건가….’

* * * * *

동굴 안쪽에 도착한 나는 쓰러져 있는 벨제붑을 발견했다. 바닥에는 녀석의 피가 흥건하고 생명력 게이지는 회색이 되기 일보 직전이다.

어떻게 된 일인가?

스토리의 흐름이 어디까지 바뀔 생각이란 말인가.

내가 다가가려 하자 인기척을 미리 느낀 벨제붑이 클클거리며 말했다.

“김천재.”

“……”

“하필 꼴이 우스울 때 만나게 되었군.”

일어날 힘도 없는지 놈이 벽에 몸을 기대어 나를 바라보았다.

단순하게 내 머릿속에 유추되는 상황은 그저 배신을 당한 것인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사탄에게 당한 건가?”

“하하…. 글쎄다.”

놈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누구한테 배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연기를 뿜는 솜씨로 보아 한두 번 펴본 게 아닌 것 같다.

일반 게임에 흡연하는 캐릭터가 들어가지는 않을 텐데, 운영진이 의도한 화면이 아닌가?

‘…… 아니지.’

지금 상황에서는 녀석이 무엇을 하더라도 전부 이해가 된다. 게임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게임이 되어버렸으니까.

“이해할 수가 없군. 이제 와서 루시퍼 쪽에서 너를 배신하다니.”

“……”

“왜 대답이 없지? 쫄았나?”

“배신은 없었다.”

‘아니라고?’

하긴…. 벨제붑이 루시퍼를 배신했을 수도 있겠구나. 그 대가로 이렇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매캐한 담배 향이 내 코끝을 찔렀다. 처음 맡아보는 종인데 무엇일까?

마치 마른 잡초를 태우면 날 것 같이 날카롭다.

나도 담배를 한 개비 꺼내어 물며 녀석에게 물었다.

“그러면?”

“…… 네게 설명할 이유는 없다.”

치직. 치지직.

쓰읍. 푸후-

“그래, 그렇지. 설명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너는 지금 내 손에 죽을 테니까.”

내가 다가가자 놈이 벽 쪽으로 더 바짝 붙었다. 마치 고양이 앞 겁을 먹은 생쥐처럼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이 녀석이 정말 벨제붑이란 말인가? 초라해 보일 정도로 나약하다.

“나를 죽인다고? 왜지?”

“왜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나.”

“…… 김천재, 나는 너란 놈을 이해할 수 없군.”

“…… 왜지?”

“너, 몇 시간 전에 라파엘과 우리엘을 죽였지?”

전부 알고 있었구나.

“……”

“루시퍼와 내가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하나? 너의 오만하고 교만한 계획을.”

“알든지 말든지. 어차피 넌 여기서 죽는다.”

“……”

나는 망설임 없이 녀석에게 다가가 낫을 들었다.

악마들끼리 어떠한 분쟁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전부 죽이면 되니까.

그리고 벨제붑과 루시퍼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스토리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 잠깐만?’

갑자기 한 가지 의문이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둘의 사이가 틀어졌다면 왜 벨제붑의 목숨을 살려주었을까?

이해할 수 없는 행보다.

“…… 벨제붑.”

“말해라.”

“사탄이 너를 왜 살려주었지? 그리고 그 녀석 혼자서는 네 상대가 되지 못할 텐데.”

“……”

내 질문에 녀석의 동공이 흔들렸다. 나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 주변을 살펴보았다.

유소라와 박규환이 내 양옆으로 붙어 사주 경계를 했다.

“…… 온다.”

콰르릉!

동굴이 무너지며 바위가 쏟아져 내렸다. 벨제붑의 몸이 수백 마리의 파리가 되어 흩어졌다.

함정이었나?

‘아닐 텐데.’

정황상 함정일 확률은 매우 낮다.

나는 스켈레톤 병사들로 입구를 막고 쏟아져 내리는 바위를 피했다.

“천재 씨 조심해요!”

유소라가 재빠르게 달려와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왜 아무것도 없는 곳에? 라고 생각하는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땅에 떨어졌다.

쿵!

‘뭐지?’

“천재 씨! 왜 안 피하세요?!”

“…… 예?”

“벨제붑이 덤비잖아요!”

나는 좌에서 우측으로 낫을 크게 한 바퀴 돌리며 전면을 확인했다.

벨제붑이 보이지 않는다.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백 마리의 파리로 변했던 놈이, 기척도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어떻게 된 걸까?

유소라가 또다시 소리쳤다.

“천재 씨 위!”

내가 그대로 위를 바라보며 낫을 휘둘렀다.

부웅-

아무것도 없다.

“이번에는 뒤요!”

부웅-

이번에도 없다.

벨제붑이 이렇게 빠른 놈이었나?

내가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적이었다니. 믿을 수가 없어 눈을 비벼 보았지만, 놈은 보이지 않았다.

유소라가 계속해서 소리쳤다.

“천재 씨! 위, 아니 아래! 아니 아니! 뒤!”

“……”

키기기긱!

무언가가 내 갑주를 긁고 지나갔다. 나는 그 방향을 향해 낫을 휘둘러보았다.

무언가 걸렸는데 내 손에 느낌이 나지 않았다.

“…… 역시.”

내 감각이 무뎌졌구나.

아까 녀석이 피우고 있던 담배 때문인가?

아마도 만드라고라의 잎으로 만든 담배였나 보다.

지금 보니 시각과 청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제어되지 않고 있다.

내가 피우던 담배 냄새조차 나지 않을 정도니, 상태는 심각한 수준.

“후우….”

보이지 않는 벨제붑이 나를 향해 말했다.

“포기하고 꺼져라.”

“……”

“지금 돌아간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돌아갈 리가 있나?

지레 겁을 먹고 숨어있는 적을 두고 말이다. 오히려 지금이 녀석을 처리할 확실한 기회다.

“박규환! 스켈레톤 병사와 함께 입구를 막도록 해.”

박규환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구로 향했다.

“알겠습니다.”

유소라가 중간에서 어물쩍거리며 내게 소리쳤다.

“천재 씨! 저는 어떻게 할까요?”

“…… 박규환과 함께 입구에서 대기하도록 하세요. 벨제붑이 덤벼온다면 그대로 싸우시고요.”

“알겠어요!”

물론 벨제붑이 유소라를 노릴 일은 없다. 이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움직일 녀석이 절대 아니다.

‘만드라고라의 잎이라….’

적은 생명력인데도 불구하고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빠르게 벽을 향해 달려가 등을 붙였다. 그리곤 전방을 경계했다. 이렇게 하면 어디서 공격이 오든지 상관없이 확인할 수 있다.

“……”

“김천재! 그 잘난 네 부하들이라도 전부 불러보지 그래?”

“……”

“왜? 다 같이 덤벼도 내게 못 이길 것 같나? 크하하하!”

“……”

허세 부리기는.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녀석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서 만드라고라의 효능이 떨어지든지, 놈이 참지 못하고 내게 덤비든지.

기다리기만 하면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일어나는 상황이 온다.

키기기긱!

내 갑주의 왼쪽 어깨 쪽에서 긁히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내가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아이언 메이든!”

[‘아이언 메이든’ 스킬을 시전합니다.]

은색의 가시들이 빠르게 생성되어 보이지 않는 벨제붑을 향해 날아갔다.

“잡았…. 다.”

녀석의 형체는 보이지 않지만.

내 가시들이 놈의 몸에 흩뿌려졌다. 허공에 가시들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나는 그대로 달려가 가시 뭉치를 향해 낫을 휘둘렀다.

부웅-

콰직!

손에 느낌은 없지만, 공격은 확실하게 성공했다. 날붙이가 단단한 벨제붑의 피부를 파고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녀석의 신음이 들려왔다.

-크흑.

파각! 소리와 함께 벨제붑이 날붙이를 몸에서 빼내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녀석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땅을 적셨다.

몸은 보이지 않아도 지면에 생긴 핏자국 덕분에 녀석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 한층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까 뭐라고 했었지? 내게 기회를 준다고?”

“…… 빌어먹을.”

녀석의 생명력 게이지는 분명 회색이 되기 직전, 한두 방만 정확하게 명중시켜도 끝낼 수 있는 정도다.

놈이 구석에서 걸음을 멈추는 순간.

“이제 꺼져라, 벨제붑.”

내가 낫을 크게 휘둘러 다시 한번 가시 뭉치를 찍어 내렸다.

콰직!

‘…… 끝인가?’

놈이 움직이지 않는다.

멀리서 싸움을 지켜보던 유소라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천재 씨! 벨제붑이 죽었어요!”

“…… 후우.”

[시스템 메시지]

[‘파리의 왕, 대 악마 벨제붑’이 사망했습니다.]

[지옥 왕 벨제붑 처치에 성공하신 ‘김천재’ 플레이어에게 ‘왕의 권능(패시브)’ 스킬을 부여하도록 합니다.]

[*왕의 권능: 모든 직업군의 아이템을 착용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땅에 떨어진 담배를 주워 한 모금 깊게 피웠다.

쓰읍, 푸후-.

감각이 조금은 돌아온 건가? 향이 어느 정도 나는 것 같다.

[‘지옥 왕도 내게는 하나의 먹잇감일 뿐!’ 칭호를 획득합니다.]

[소환 레벨이 +1 증가합니다!]

[소환 레벨 ‘15’ 달성]

[하수인의 공격력과 방어력, 체력이 소폭 증가합니다.]

[소환 레벨 MASTER 등급 도달했습니다.]

[*전설 등급 이상 하수인과 스켈레톤의 조합이 가능해집니다!]

“…… 완벽해.”

* * * * *

피유우우웅-

폭죽 한 발이 하늘 위로 날아갔다.

펑!

불꽃이 터지자 악마들이 괴성을 내며 ‘폐허가 된 마을’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엑!

리 커우러나와 그의 부하들이 김준철이 남겨놓은 부대와 함께 마을 입구를 봉쇄했다.

“이 시발 럼들!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어디선가 달려온 마이클이 유탄 발사기로 전방을 조준하더니.

“모두 비켜요우!”

쾅!

원형의 빛나는 구체를 발사했다.

퍼버벙! 소리와 함께 구체가 터지며 빛이 쏟아져 내렸다.

-키에엑!

“연희 킴! 빨리 메키니아로가서 지원군을-”

-아니!

마을 밖에서 뮤지컬 배우만큼 풍부한 성량의 여성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강력한 오라로 무장한 플레이어 수백 명이 밀집 대형으로 악마들을 쓸며 다가오고 있다.

그중 곰을 타고 있는 드루이드 여성 한 명이 해맑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다들 오랜만이야! 나야 나! 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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