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대경성 내에 있는 몬스터를 제압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의 수장인 어둠의 마녀 ‘리치’조차 내게 상대가 되지 못하여 지금 사로잡혔으니까.
“리치, 지금 말하면 곱게 죽을 수 있을 것이고, 아니면 내 손에 다시 태어나 네 동족을 공격하게 될 거야.”
“……”
“끝까지 말하지 않겠다는 거지?”
“……”
내가 리치의 양손을 잡아 뜯었다. 본 드래곤 덕분에 능력치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져 이제 부하급 녀석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대악마라 불렀던 놈들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
양팔이 뜯겨나간 리치가 신음을 잠깐 흘리더니 다시 입을 닫았다.
‘루시퍼의 현재 목적을 좀 알고 싶었는데….’
최종목적이 아닌 현재 목적.
계속해서 바뀌는 스토리 흐름 속에 녀석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파악하고 싶었다.
“그럼…. 이제 꺼져라.”
샥-
내가 낫을 가볍게 휘두르자, 리치의 목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졌다.
[시스템 메시지]
[루시퍼 추격, 제 1장 ‘리치의 침묵’ 편이 종료되었습니다.]
[모든 플레이어는 ‘루시퍼 추격’ 흐름의 제 2장의 장소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장소가 어디인지도 말해주지 않고 이동하란다. 이렇게 불친절한 시스템이 어디 있나?
하긴 본 게임에서도 대사로 장소를 유추하는 방법밖에 없었지.
리치의 목이 떨어지자 군인들이 승리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주위를 보니 벌써 마을 내에 있는 악마들을 제압했다.
피에 젖은 김준철이 나를 향해 달려오더니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여단장 김준철’의 질문에 답하시겠습니까?]
[YES/NO]
‘…… YES.’
답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기갑 부대는 대경성을 호위하도록 하고, 나머지 병력은 전부 마을 뒷산으로 모두 이동해주세요.”
“남산으로 말입니까?”
“예, 그곳으로 가면 몸이 검은 자들과 흰 자들이 싸우고 있을 텐데.”
“…… 예.”
“전부 죽이시면 됩니다.”
다른 그룹의 플레이어들이 내 대답을 들었다면 굉장히 의아해할 것이다.
악마뿐만 아니라 천사까지 전부 공격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니까.
물론 내 행동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
아니지, 지군의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전원 남산으로 이동하도록 한다!”
-예!!!
김준철의 외침에 군인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쿠구구구! 소리와 함께 기갑 부대가 대경성 근처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지군이 그들 틈에 섞여 들어와 내게 달려왔다.
“김천재! 리치는 잘 처리했어?”
“어어- 밖은?”
“전부 정리했어.”
“좋아…. 그럼 바로 이동하도록 하지.”
“김준철은?”
“먼저 떠났어. 천사와 악마 둘 다 처리하라고 했으니 알아서 싸울 거야.”
“…… 야레야레, 일이 잘 풀려가는군.”
* * * * *
<남산 산기슭>
입구부터 휘황찬란하게 전투 중인 천사와 악마들이 보였다.
대지를 뒤흔들 정도로 거대한 싸움이었다. 이곳저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폭발음이 들렸다.
악마의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나는 먼저 도착한 김준철의 부대에 합류하며 그들에게 명령했다.
“목표는 제가 직접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적의 수를 줄이도록 노력해주세요!”
김준철과 그의 부대가 큰 목소리로 응답했다.
-예!
대화를 마친 우리는 빠르게 남산 위쪽을 향해 달렸다. 체력 능력치가 높아진 덕분에 정상까지 전력 질주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버스를 타고 올라가던 거리인데, 직접 달려보니 이렇게 풍경이 좋구나.
가을 낙엽이 나풀나풀 흔들리며 떨어지는 곳에서 악마와 천사들이 싸우고 있다.
나는 낫을 크게 휘둘러 악마와 천사, 둘 다를 베어내며 진격했다.
“지군! 네 정보는 확실한 거지?”
“당연하지. 아니면 내 손을 잘라도 아무 말 하지 않을게.”
“……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고. 그냥 확인차 물어본 거야.”
“게임 내에서의 정보력은 내 자존심이야. 절대 틀릴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알았다. 알았으니까 조금만 더 속도를 높여봐.”
지군이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대답했다.
“아, 알았다고. 나는 몸무게가 많이 나가서 체력 능력치가 높아도 힘들단 말이야.”
“……”
마정우가 지군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더니 앞으로 치고 나갔다. 지군이 그를 잡기 위해 속도를 높여 달리기 시작했다.
“이 털보 새끼야!”
“억울하면 잡아보든가!”
둘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그들의 뒤를 따라 유소라와 조영기가 달렸다.
다다다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산의 꼭대기인 ‘남산 타워’에 도착했다. 게임이라서 그런지 기슭에서 정상까지의 길이를 반절 정도 줄여놓은 듯한 거리였다.
키에에에엑!
악마의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대부분이 천사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흑백 비율을 비교해보자면 흑색이 좀 더 많은 편, 그렇다고 천사 쪽이 밀리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평균 능력치가 높은 천사 부대가 악마들을 뭉개 누르고 있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의 전투.
나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며 대천사라 불리는 사인방을 찾기 시작했다.
“지군은 나를 따라오도록 하고. 정우 너는 소라 씨하고 차카니를 데려가도록 해.”
“…… 오케이.”
우리가 두 그룹으로 나뉘어 흩어졌다. 네 명의 대천사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타 천사에 비교하여 신체의 사이즈가 굉장히 큰 편에다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라의 레벨이 남다르다.
그 덕분에 지군과 나는 오 분도 안 되어 대천사를 찾았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녀석은 네 명 중 치유를 담당하는 라파엘.
내가 손가락을 튕기며 좋은 미소를 보였다.
“지군, 정말 다른 대천사는 이 근처에 없는 거지?”
“무조건이야. 전투가 벌어지면 네 명은 흩어져서 활동하거든. 절- 대로 가까이 붙어있지 않아.”
“…… 좋았어.”
나는 주위에 잇는 적군의 수를 세어 본 후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했다.
악마의 수가 대략 스물에서 서른 마리 정도.
천사의 수가 그보다 조금 적은 열다섯 정도였다.
비교적 하급 몬스터들이 배치되어 있어 상대하기도 수월한데다가, 그나마 강해 보이는 중형 몬스터들이 천사의 발을 묶어놓아 움직이기 아주 좋았다.
나는 살기를 풀고 최대한 오라를 잔잔하게 만들며 라파엘에게 다가갔다.
“라파엘!”
“오, 인간 김천재. 당신이 이곳에는 웬일이지?”
“웬일은. 내가 사는 세계의 일인데 당연히 와봤지.”
“…… 좋아, 이렇게 된 김에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나?”
“당신은? 어떻게?”
[‘치유의 대천사’ 라파엘 님이 김천재 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당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성스러운 결계막이 한 층 강화됩니다.]
라파엘이 푸른빛이 나오는 지팡이를 좌우로 흔들며 내게 말했다.
“악마들을 좀 상대해줘. 수가 너무 많아 우리끼리 상대하기가 힘들어.”
“…… 그래?”
“응.”
“미카엘과 우리엘은? 가브리엘도 같이 왔을 텐데.”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미카엘과 가브리엘은 루시퍼를 쫓는다며 저- 쪽 위에 게이트를 타고 다른 장소로 이동했어.”
“……”
“미카엘과 가브리엘이 루시퍼를 상대하는 동안 우리엘과 내가 이곳에 남아 잔당을 처치하는 중이야.”
지군의 말이 전부 맞았다.
그 오타쿠 돼지 녀석, 시스템이 의도하는 일은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찾는 놈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라파엘에게 정중히 물었다.
“라파엘.”
“말해.”
“…… 혹시 천사들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나?”
내 질문에 라파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고 있지만 그건 왜?”
“…… 그냥 알고 싶어서.”
질문의 의도를 알아챈 라파엘이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치유의 지팡이로 나를 가리켰다.
“설마…. 김천재, 당신도 악에 감염된 건가?”
“아니- 전혀. 내가 악마들에게 감염되었다면 지금 이곳에 오지도 못했을 거야.”
“……”
“방금 내 질문. 대답하기 어려운가?”
“……”
라파엘이 답하지 않았다.
그냥 말하기 어렵다고만 해도 될 텐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플레이어들이 알지 못하는 특유의 주파수로 누군가를 호출했나보다.
나는 그 틈을 타 망설이지 않고 놈을 향해 덤벼들었다.
“라파엘!”
라파엘이 몸을 틀어 내 낫을 피해 보려 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이 정도 거리에서 내 능력치로 휘두르는 무기를 피할 수 있는 자는 악마의 수장인 루시퍼와 성역의 수장인 메타트론뿐.
내 생각은 절대로 오만이 아니다.
앞선 게임에서 벌써 확인해 보았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날붙이가,
부웅-
라파엘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샥-.
무언가를 베는 듯한 느낌은 거의 없었다.
너무나 강해져 버린 내 근력 때문인지, 천사 특유의 발달하지 않은 신체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대악마뿐만 아니라, 대천사도 내 상대는 절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라파엘의 몸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치유 마법을 걸며 저항해보았지만 지군과 내 공격을 회복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격이었다.
라파엘의 생명력 게이지가 점차 줄어간다.
회복되는 속도보다 줄어드는 속도가 빨랐다.
계속해서 줄어들던 그녀의 생명력 게이지를 확인한 나는, 마지막 일격을 날려 그녀의 목을 떨어뜨렸다.
[‘죽음의 낫’ 발동]
샥-
[시스템 메시지]
[‘김천재’ 님이 최초로 천사 처치 임무에 성공합니다.]
[‘치유의 지팡이’ 획득에 성공합니다.]
[지팡이가 주인을 찾고 있습니다!]
* * * * *
치유의 지팡이.
성스러운 다섯 무기 중 하나이자 회복계열 플레이어의 잠재 능력을 이끌어 내준다는 전설의 아이템이다.
내가 힐러였으면 진즉에 쓰고 싶은 아이템이었겠지만, 아쉽게도 내 직업은 네크로맨서다.
지군이 라파엘의 지팡이를 주워들더니 내게 물었다.
“아까 그 유소라라는 여자, 치유 계열 직업 맞지?”
“…… 간호사니까 치유 계열이 맞긴 하지.”
“간호사? 그럼 치유 계열 맞으니까 이 지팡이 쓰면 되겠다.”
좋은 생각이다.
그녀의 치유 능력이 강해지면 같은 그룹원의 생존 확률이 높아지니까.
‘좋아….’
지군이 라파엘의 지팡이를 들더니 내게 물었다.
“우리엘도 여기 남았다고 했으니, 빨리 찾으러 가야겠어.”
“…… 그렇지. 이 근처는 정리하지 않아도 괜찮으려나?”
“어어-. 어차피 전부 죽일 건데 뭐 하러 정리해? 정리는 전부 놀고 난 후에 하는 거지.”
이 상황에서 논다는 표현을 하다니. 지군 녀석도 참 간덩이가 큰 굉장한 녀석이다.
* * * * *
게이트 건너편에 도착한 미카엘과 가브리엘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풍경이 보이는 곳이었다.
미카엘이 높이 날아오르더니 앞에 펼쳐진 거대한 도시 전역을 바라보았다.
기계들이 즐비한 회색 도시.
“…… 결국, 이곳으로 온 건가.”
“미카엘, 인간들이 하는 말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
“…… 무엇이지?”
가브리엘이 도도한 표정으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그때와 같은 일들이 다시 찾아오고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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