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루시퍼의 심장이 흔적도 없이 녹았다.
시스템 메시지도 확인했고.
이로써 다음 라운드에 대한 준비와 이번 라운드의 임무는 확실하게 끝낼 수 있게 되었다.
“…… 주군.”
먼 곳을 가만히 응시하던 가웨인이 낮게 속삭였다.
“왜?”
“놈이 오고 있습니다.”
“…… 아까 말한 녀석?”
“예. 이제 막 이곳에 발을 들였습니다.”
“외관은?”
가웨인이 눈에 집중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 그저 그림자처럼 보이는군요.”
“…… 그래?”
녀석이 플레이어라면 직업은 한정되어 있다. 은둔하는 기술을 가진 직업은 딱 하나. 암살자만 있으니까.
“어이, 정우야.”
“어? 왜?”
“손님이 오는 것 같은데 몸 좀 풀래?”
“손님?”
“어, 꽤 강한 놈이란다.”
정우의 눈빛이 반짝였다.
“좋지.”
악마를 상대로 싸우던 본 드래곤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추었다. 그것도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사방에서 검은 액체가 문어 다리처럼 뻗어 나와 본 드래곤의 몸을 감았다.
-키에에엑!
본 드래곤이 발버둥쳐보았지만, 떨쳐낼 수 없었다. 근력 수치가 수천에 달하는데 저렇게 간단히 제압한다고?
내가 아는 자 중 저런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 고티.”
칠흑의 암살자, 블러드 고티.
스르르륵-
내 앞까지 다가온 검은 액체가 지면을 통해 흘러나왔다.
“처음 보지만, 오랜만이야.”
액체가 스멀스멀 올라와 사람의 모습을 이 되었다. 천천히 만들어지기 시작한 인간의 모습은 매우 놀라웠다.
마치 전사라고 불러도 될 법한 외관.
얼굴에 그어진 커다란 X자 표시, 다듬어지지 않은 머리와 수염, 어둠에 숨으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새까만 갑주.
“반갑다, 김천재. 오는 길이 험하여, 자네 드래곤은 잠시 묶어 두었어.”
“당신이 고티인가?”
“…… 그래.”
“생각보다 나이가 많았네.”
“너는 생각보다 어렸구나.”
“그래?”
내가 피식 웃었다.
고티 또한 나를 만나 반가웠는지 웃음을 보였다.
“왜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거지? 우리 근처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 같던데.”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하도록 하지. 우선 루시퍼의 심장은 어떻게 했나?”
“루시퍼의 심장? 당연히 녹여버렸지.”
“…… 잘했군. 녀석의 흔적이 있는 장소를 잘도 찾았어.”
싸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던 정우가 기쁨에 소리쳤다. 그렇게 좋아하던 고티를 실제로 보게 되니,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가 없겠지.
“다, 당신이 고티야? 나랑 같이 사냥하던?”
“그래. 마정우, 생각보다 늙었구나.”
“응? 아! 아니야! 이건 이 게임 속에서 변화된 모습이야.”
“하핫! 나도 알아. 장난 한 번 해본 거야.”
“어…. 그래? 혹시 당신 모습도 게임 속에서 변화한 모습이야?”
고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내 본모습과 같아.”
“아…. 그럼 형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아저씨라고?”
“무슨. 그냥 고티, 이름으로 불러.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형이고 아저씨고….”
“그렇지? 여튼 만나서 반갑수다!”
정우가 고티를 끌어안았다.
저 둘은 굉장히 돈독한 관계다. 정우가 나와 함께 게임을 하기도 했지만, 고티와는 나를 만나기 전부터 같이 연락을 하던 사이라고 들었다.
나를 만나기 전, ‘멸망의 땅’ 말고도 다른 게임을 같이 즐겼다고 했으니 두 사람의 연은 깊겠지.
고티가 정우의 등을 툭툭 두드리더니 그를 밀쳐냈다.
“남자끼리 징그럽게 이게 뭐람.”
“하하…. 그나저나 고티 씨는 왜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거야? 저번에 이량훈이라는 새끼가 당신이랑 같이 움직인다고 하던데.”
“…… 허허.”
“뭐야, 맞아? 정말이었어?”
“맞아. 그 당시에는 이량훈 녀석과 같이 움직이고 있었지.”
정우가 실망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어…. 왜?”
“녀석에게서 얻을 정보가 있었거든.”
“녀석에게서?”
“그래, 우선 자리를 좀 이동했으면 하는데. 여긴 유황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대화하기 힘들군.”
둘의 대화를 듣던 내가 본 드래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고티, 드래곤을 풀어주겠어? 저 녀석을 타고 자리를 이동하도록 하지.”
“…… 알았네.”
고티가 땅에 손을 대자 본 드래곤을 묶어놓던 검은 액체들이 지면 위로 스며들었다.
본 드래곤이 크르렁 거리며 날개를 흔들더니 고티를 째려보았다.
나는 팔을 저어 녀석의 고개를 돌린 후 말을 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성전은 어때?”
“좋지, 다 같이 만났는데 회포를 풀어야지.”
“그렇다면…. 본 드래곤! 불타는 성전으로 이동하도록 한다!”
-쿠어어어!
* * * * *
불타는 성전으로 이동한 우리는 제일 끝 방으로 이동해 대화를 나누었다.
김연희가 동경의 눈빛으로 고티를 바라보았다. 이 게임의 암살자 플레이어라면 모두가 만나보길 꿈꾸는 존재.
“…… 미안한데 이 여자애 좀 옆으로 치워주겠나?”
내가 손가락으로 김연희의 머리를 밀었다.
“저리 좀 떨어져 있어.”
“…… 아 왜! 나도 고티 님이랑 대화해보고 싶다고!”
“이야기 다 끝나면 따로 말해.”
“어?! 따로 말할 수 있는 거야?”
“그래. 맞지, 고티?”
고티가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봤지? 그러니 조금 있다가 따로 말해.”
“…… 알았어.”
김연희가 시무룩한 얼굴로 물러났다. 그녀를 보낸 후, 나는 정우와 함께 셋이서 대화를 시작했다.
우선 처음 입을 연 것은 나였다.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나. 궁금한 게 너무 많네.”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물어보도록 해. 급할 것 없지.”
“흐음…. 아! 우선 왜 지금까지 우리랑 만나지 않고 있던 거지? 같이 움직였다면 라운드를 더 빨리 끝낼 수 있었을 텐데.”
“…… 그건 간단하다. 이번 게임에서의 내 목적이 너희 방향과 달랐어.”
“음?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은 이 게임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게임을 끝내는 방식에서의 차이였다.”
게임을 끝내는 부분에서의 차이.
이량훈과 같이 움직였으니 이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
“전부 죽이려고 했구나.”
“…… 처음에는 그랬지.”
“오케이, 거기까지는 이해가 되네. 당신이 암살자 클래스기도 하고.”
“이해해줘서 고맙군.”
“그럼 다음 질문. 이량훈과 함께 한 이유는 단순히 뜻이 맞아서였나?”
내 질문에 그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뜻이 맞는다기보다는 녀석이 이 게임에서 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어서였다.”
“……”
“너희가 다른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이량훈이 말한 작전이 유일하다고 생각했어.”
“아! 그럼 우리랑 최종 목적은 같았던 거네?”
“그렇지, 이런 곳에서 오래 있고 싶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테니까.”
이야기를 듣던 정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다를 반복하더니, 결국 한마디 툭 내뱉었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랑 같이 가는 건가?”
“……”
“고티, 우리랑 같이 하는 거야?”
이번에도 고티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미안하지만, 지금과 같이 따로 움직일 예정이다.”
“아니, 왜?!”
“너희와 같은 최종 목표를 향하려면, 나 또한 준비해야 할 일이 있거든.”
“준비해야 할 일?”
“그래, 과거 우리가 저질렀던 실수를 이번에는 반복하지 말아야 하잖아.”
대화가 멈추었다.
정적이 흘렀다.
그가 말한 우리들의 실수라면, 루시퍼의 봉인을 너무 일찍 깨워 다른 플레이어들을 전멸시켰던 사건이다.
유일한 실수라서 잊히지 않는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한 후 그에게 말했다.
“그런 일은 이제 없을 거야.”
“방심하지 말아.”
“당연하지.”
“…… 역시 자신감 하나는 여전하네.”
“그야, 물론이지. 자신감 넘치는 건 당신에게서 배웠으니까.”
“…… 푸하하!”
고티가 크게 웃어 보였다. 나는 그를 보며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었다.
“한 대 피울래?”
“아니, 나는 담배 못 피워.”
“생긴 거랑은 다르네.”
“험악하게 생겼다고 담배를 피울 거라 생각하는 건 상식의 오류야.”
“허허…. 그렇지….”
내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근데, 진짜 그 이유 하나로 이량훈과 같이 움직인 거야?”
“…… 아닌 것 같나?”
“당연히 아니지. 당신이 진짜 고티라면 아무리 못해도 이량훈이 특별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해.”
“……”
“예를 들어 녀석이 운영자와 연결되어 있다든가. 이 게임의 ‘여는 자’로서의 핵심 키를 가졌다든가.”
이야기를 듣던 고티가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김천재야, 랭킹 1위는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어.”
“…… 내 예시 중 답이 있나?”
“있지.”
“허허….”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고티는 누군가에게 섣불리 감정을 보인다거나 이유 없이 남과 팀을 이루는 자가 아니다.
철저히 이득만을 따라다니는 이기적인 존재.
“녀석의 형이 이 게임의 운영자였다더군.”
“…… 그건 어떻게 알았고?”
“던전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덤벼들길래 숨을 앗으려 했다.”
“죽기 싫으면 모두 불으라고 했고?”
고티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날붙이를 보였다.
“그 반대야, 고통스럽게 살고 싶지 않으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말하라고 했었어.”
“…… 당신, 생각보다 변태스럽네.”
“그럴 수도.”
“…… 아 정말, 너무 마음에 들어. 행동부터 성격까지 우리와 딱 맞아.”
“그러니까 오랫동안 같이 했지.”
예상외의 정보를 얻게 되었다.
이량훈이 운영자 중 한 명과 연관되어 있고, 몰래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받아 이 게임에서 나가는 방법을 들었다고.
그리고 그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었으며, 고티는 모든 정보를 빼앗은 후 녀석과 손절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야? 우리랑 같이 움직이나?”
“아니, 나는 너희가 마지막 라운드를 열 때까지 좀 더 자료를 수집할 생각이다.”
“…… 그렇구나.”
“그리고 너희와 아직 만나지 못한 왕궁 사냥꾼 지군을 기다릴 생각이야.”
“…… 지군!”
왕궁 사냥꾼 지군.
과거 오크 종족을 선택한 사냥의 고수.
전 세계의 모든 플레이어들이 지군의 사냥법과 공략법으로 게임을 진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굉장한 인물이다.
나 또한 지군이 닦아놓은 길로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다가, 앞서 상대한 보스 몬스터들의 공략법도 그가 만든 것들이었다.
일반인과는 다른 기발한 생각의 귀재.
“지군이 이 게임 안에 있어?”
“그래, 지금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 라운드에 그가 있다는 거야.”
“…… 이번 라운드에?!”
“그래.”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다.
우리가 최선두로 라운드를 뚫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먼저 도착한 자가 있다니.
‘허허….’
내가 눈을 돌려남은 시간을 보았다. 임무가 시작된 지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군을 찾아다닐 시간은 넉넉하다.
“…… 고티, 혹시 지군에 대한 정보 좀 내게 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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