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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샐래맨더.

세계 곳곳에 숨어 있는 정령 중 불의 원소를 맡은 녀석이다.

엘프들과 어울리는 녀석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의문이 들었지만 답은 금방 나왔다.

지금 이 계곡에 흐르는 용암에서 만들어진 정령인 것 같다.

하긴, 지옥도 네 가지의 원소가 모두 존재하기는 하니 못 만들어질 이유는 없겠지.

“자, 잠깐!”

“…… 말하라고.”

“잠시만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 말해.”

샐래맨더가 부서진 골렘 사이에서 몸을 비집고 나왔다.

눈치를 보니 도망갈 궁리를 하는 것 같은데, 낫을 천천히 흔들자 놈이 혀를 날름거렸다.

“당신들 혹시 인간인가요?”

“…… 그래.”

“어…. 오…. 와! 저는 당신들이 이곳에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게임에서 등장하는 요정들은 장난기가 너무 많아 플레이어를 골탕 먹이는 역할이다.

그런 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콧방귀도 안 나왔다.

“왜.”

“어…. 음…. 아! 이 위험한 곳에서 저를 구원해주길 기다리며….”

[불꽃의 정령 ‘샐래맨더’가 당신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냅니다.]

“위험한 곳? 네게는 불이 있는 장소면 모두 똑같지 않나.”

“아, 아닙니다! 아무리 정령이라도 지옥에 사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 이유는?”

“이유? 어…. 음…. 뭐가 냄새나서? 지옥 특유의 그 알싸한 냄새 때문에 살기가 너무 힘듭니다.”

변명이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는데, 거짓말을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샐래맨더의 머리통을 강하게 잡았다.

“너 지금 거짓말하는 중이지?”

“아악! 아아악! 소, 손 좀 놓고 말해요!”

“아니. 대답부터 해.”

“무, 무슨 대답을- 아악!”

“거짓말했어? 안 했어?”

샐래맨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했어요! 제발, 제발 머리 좀 놔주세요. 너무 아프다고요!”

“……”

이 녀석을 살려주면 득일까, 실일까? 쓸모가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정확하게 어느 용도로 사용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곳에 있다면 분명 의미가 있을 텐데 말이다.

내가 천천히 손에 힘을 빼며 샐래맨더에게 말했다.

“우선은 살려주도록 하지.”

“하아…. 하아….”

나를 노려보는 눈초리가 제법이다. 전투 능력이 있다면 데리고 다니며 쓸 법도 한데,

하급 정령을 데리고 다니기에는 내 레벨이 너무 높았다.

담뱃불 붙이는 용도 정도로 사용해볼까?

“너 나한테 구원해달라고 했지?”

“…… 예.”

“어떤 의미로 말한 거야?”

“음? 그냥….”

“어떤 존재에게서 구원해달라는 말이냐고.”

샐래맨더가 눈동자를 천천히 옆으로 굴리며 혀를 날름거렸다.

“악…. 마?”

“악마한테서 구원해달라고?”

“그, 그렇죠. 아무래도 악마들만 이곳에 없으면 다른 불꽃이 있는 장소로 이동해서.”

“이동해서?”

“어…. 음…. 그곳에서 다른 정령 친구들과 놀 수 있으니까?”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에는 다른 정령이 없어?”

“예! 제가 태어난 이후로 단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이 말만은 진실인 것 같다. 생각하지도 않고 그대로 답이 나왔다.

“…… 그렇단 말이지. 근데 너는 언제 태어났지?”

“언제? 그거야 뭐…. 언제라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네가 태어나고 몇 년 정도 지났어?”

“인간들의 년 수를 세는 방법은 전혀 모릅니다.”

“그럼 네가 태어났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뭐지?”

녀석이 또다시 눈동자를 옆으로 이동시켰다. 거짓말을 지어내는 중인 건가? 아니면 정말 생각을 하는 건가?

“멀지 않은 곳에서 성전이 지어지고 있었어요.”

“…… 성전?”

설마 라파엘이 갇혀있던 곳을 말하는 건가.

“예,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곳에 사는 듀라한이 성전 작업에 참여했다고 들었습니다.”

‘…… 듀라한.’

역시 놈이 여기 있었구나.

십 중 팔구는 잊혀진 계곡에 숨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그나저나 성전이 지어질 때면 샐래맨더의 나이가 꽤 되었는데, 아직도 하급 정령으로 남아있다는 건 하자가 있는 놈이라는 뜻.

“…… 너 생각보다 나이가 많구나.”

“그래요?”

“그래…. 잠깐만! 너 그럼 혹시 루시퍼라는 놈을 본 적이 있어?”

샐래맨더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 녀석, 지금 어디로 갔지?”

“…… 그건 나도 모르는데.”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야?”

“이틀 전쯤 인 것 같습니다. 아닌가? 사흘 전이었나?”

“어디서?”

“…… 저쪽이요.”

샐래맨더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계곡의 뒤편을 가리켰다. 하도 꼬불거리는 길이라 정확하게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샐래맨더를 어깨 위에 올려놓은 후 녀석에게 안내를 맡겼다.

“진짜 저기서 루시퍼를 봤다는 거지?”

“그럼요! 안개가 많이 낀 그 날, 갑자기 바람이 부웅- 하고 강하게 불어오더니 녀석이 사라졌었습니다.”

“바람이 부웅하고….”

“녀석이 떠난 자리에는 마치 불에 탄 것처럼 땅이 그을려 있더군요.”

“……”

순간이동 후 흔적을 남기는 방법, 현대로 넘어와 인간들을 공격했던 루시퍼가 항상 즐기던 행동이다.

흔적을 남겨야 다시 그 장소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내가 샐래맨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녀석은 내가 때리는 줄 알고 움찔하더니 이내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때리는 줄 알았습니다.”

“네 덕분에 며칠 걸릴 일을 순식간에 끝낼 수 있게 됐다. 고마워서 그런 거야.”

* * * * *

듀라한에게서 도망친 마정우 일행이 어느 동굴 안에 숨어 있다.

그들도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그래도 듀라한의 즉살기에 당하지 않으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싸움이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서 한 방에 생을 마감한다면 굉장히 허무할 것이다.

마정우가 주머니에서 땅콩 스낵을 꺼내어 크게 베어 물었다.

콰드득.

“빌어먹을 듀라한 녀석, 천재만 있었어도 쉽게 처리했을 텐데.”

마이클이 총기를 손질하며 대답했다.

“천재킴은 언제와요우?”

“금방 올 거야. 어차피 고룡만 찾으면 바로 온다고 했으니, 지금쯤 도착했거나 머지않은 미래에 도착하겠지.”

“…… 천재킴이 실패할 확률도 있습니까?”

“천재가? 허허…. 아니. 전혀!”

“전혀?”

“그래, 녀석은 이 게임 내에서 보통 플레이어가 아니야. 겨우 숨겨진 물건 하나 못 가져올 정도로 초보자가 아니라는 거지.”

“…… 오케이. 천재킴, 믿는다.”

마정우가 씁쓸한 미소로 동굴 밖을 향해 걸었다. 혹시라도 적에게 들킬까 싶어 최대한 발걸음 소리를 늦추어 움직였다.

동굴 입구에 가까워지자 알 수 없는 살기가 느껴졌다. 아직도 근처에 있는 듀라한이 적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저 새끼는 할 일도 없나, 왜 아직도….”

듀라한은 천사들과 싸움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전투욕망을 나타냈다.

마정우 일행을 추격하기도 벌써 세 시간 째.

기다리다 지친 김연희가 그에게 물었다.

“마정우, 그냥 나가서 싸우자.”

“…… 너, 나는 안 싸우고 싶어서 여기 있는 줄 아냐?”

“어차피 즉살기가 발동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할 수도 있고.”

“그러니깐 싸워보자는 거지.”

“…… 어이.”

“응?”

정우가 정색을 했다.

“혹시라도 발동되면 그냥 게임 오버가 아니야. 목숨이 날아가는 거라고.”

“……”

“너는 죽는 게 안 무섭나 봐?”

김연희는 솔직히 죽음이 무섭지 않았다. 사춘기 소녀라서 그런지 생각이 단순했다. 죽으면 어차피 천국으로 가게 될 테니, 그 후부터는 천사로서 산다는 계획이 있었다.

말다툼하던 둘은 결국 마이클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이럴 때는 항상 과반수로 결정해야 중립적이고 다른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마이클이 손질 마친 총기의 부품을 정갈히 순서대로 놓으며 대답했다.

“간단한 질문입니돠! 싸우고 싶은 사람은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 자리를 피하면 되잖아요우.”

명쾌한 정답이었다.

원하는 자만 그 일을 실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정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김연희에게 말했다.

“자- 그럼 정해졌으니 알아서 움직이도록 해. 나는 지금 싸우지 않을 거야.”

김연희가 이빨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건들거렸다.

“아 몰라. 그럼 나도 그냥 싸우지 않는다로 할게.”

“아까는 싸운다면서?”

“그건 그냥 해본 말-”

쿠궁!

동굴이 흔들렸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몰랐다. 이 계곡의 주인이라 불리는 ‘듀라한’과 김천재 일행이 마주쳤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 *

샐래맨더가 안내하는 곳이 좀 이상하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이 근처에 듀라한의 아지트가 있는데.

알 수 없는 생명체들의 해골 길을 걷던 샐래맨더가 비열한 얼굴로 소리쳤다.

“듀라한 님! 제가 인간들을 데려왔습니다! 듀라한 님! 듀라한 님!!”

“뭐라고?”

“하핫! 속았지 이 멍청한 놈들아! 나는 사실 듀라한 님과 계약한 불의 정령이다!”

그런 건가.

‘허허….’

배신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를 듀라한에게 직통으로 데려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놈의 아지트로.

“너 진짜 죽고 싶냐?”

“죽고 싶은 정령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

“……”

얄밉다.

정말 얄밉다.

지금 당장 죽이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참지 못한 나는 샐래맨더의 머리를 잡고 이리저리 휘둘러댔다.

쿵! 쿠궁!

양옆으로 신명나게 흔들어대자 놈이 숨을 거세게 몰아쉬며 다시 소리쳤다.

“듀, 듀라한 님, 제발, 제에발, 듀라한 님! 듀라한 님!!”

자리를 비운 상태였는지 샐래맨더의 몸이 두 쪽이 날 때까지 듀라한은 오지 않았다.

“듀라한이 왔어도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어.”

“크윽…. 망할 인간 녀석.”

“정령 주제에 악마처럼 말하는구나?”

“나는 지옥에서 태어난 정령, 굳이 따지자면 악마에 가깝지!”

“정령이 악마에 가깝다고? 종족 자체가 다른데 말이야.”

“그래….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으니까. 인간도 마찬가지 아닌가? 인종이 달라도 태어난 곳에 따라 적응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

자라온 환경에 따라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는 인간도 마찬가지니까.

‘…… 스토리 개발자 놈이 몬스터에게 이상한 대사를 넣어놨구나.’

나는 주먹에 힘을 주어 마무리할 준비를 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진짜 흔적이 어디 있는지 말해줘도 날 죽일 거야?”

“안 믿는다.”

“…… 흐미”

“흐미는 무슨. 뒤질 준비나 해.”

“…… 후우, 다시 태어난다면 친구들이 있는 엘프들의 숲에서 살고 싶네.”

“그게 마지막 말이야?”

“그래, 어차피 죽을 거. 딱히 할 말도 없어….”

샐래맨더가 갑자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듯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알고 있다.

녀석이 이런 식으로 플레이어의 감정을 이용한다는 것을.

“그럼 꺼져.”

내가 주먹을 크게 휘둘러 샐래맨더를 박살내려는 때,

부웅-

캉!

내 주먹을 납작한 검날이 막아냈다.

“거기까지.”

내가 고개를 들어 검의 주인을 보았다.

“…… 듀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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