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내가 중지를 들어 보였다.
“…… 이거야. 엿이나 까 잡수셔.”
티아마트의 콧구멍에서 바람이 세차게 흘러나왔다. 도발에 성공한 나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며 말을 이었다.
“너, 나 말고 다른 이들도 이곳으로 불렀지?”
“……”
“아마 너 대신에 움직일 수 있는 자를 찾고 있었을 거야.”
“……”
대답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내 말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너는 미래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힘은 가지고 있지만, 지나간 과거는 간섭하지 못하지.”
“……”
“그래서 과거에 잘못한 일을 이제야 만회하려는 거고.”
“……”
“나는 알고 있어. 되돌릴 수 없는 너의 과오중하나. 그건 바로…. 메타트론과 벨제붑을 만든 일이야.”
놈이 눈을 부릅떴다.
내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녀석 또한 놀랐을 것이다. 전지전능한 존재처럼 보여도 결국 티아마트도 하나의 생명체다.
우리와는 다른 이계의 존재지만.
“메타트론과 벨제붑이 서로 견제하며 멸망에 가까워질 때까지는 너도 미래의 흐름에 관여하지 않았을 거야. 아. 마. 도.”
“……”
“네가 인과율에 개입하게 된 건 루시퍼의 타락 이후지? 루시퍼가 타락하게 된 건 네가 아닌 다른 신, 아누라는 녀석의 의도였을 것이고.”
벽화에 그려져 있는 성스러운 힘을 가진 아누라는 존재와 어둠의 힘을 가진 티아마트.
둘의 대립과 그 사이에 ‘여는 자’가 중재를 하는 장면이 있었다.
“……”
계속해서 대답이 없다.
지금까지의 내 유추가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다.
“아누와 너, 둘이 이 세계에 대한 의견이 다를 때 신마 대전이 일어났고, 너는 그때 모든 존재가 멸망하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어.”
“……”
“그리고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 네가 나를 불렀다면 그 말인즉슨, 멸망을 실행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는 것! 내 말이 틀린가?”
나는 녀석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놈이 천천히 몸을 비틀며 얼굴을 내 앞으로 내렸다.
그리곤 내가 날아가지 않을 정도로 숨을 조절하며 조용히 대답했다.
“모두 맞았다. 드디어 이곳에 온 이유를 알게 되었구나.”
[시스템 메시지]
[‘티아마트’가 김천재 님의 추리력에 굉장히 놀라움을 표시합니다.]
[이유를 찾았으니 이제 이곳에서 나갈 수 있도록 게이트를 엽니다.]
위이이잉-
티아마트와 내 사이에 검은 게이트 하나가 열렸다. 건너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공간이었다.
“…… 내가 이래서 당신보고 엿 까 잡수라고 한 거야. 왜 내 미래를 당신 마음대로 정한 거지?”
“건방진 꼬마 놈.”
“건방진 건 피차 마찬가지지. 통성명도 하지 않았는데 내 미래를 건드렸으니깐.”
“시끄럽고 이제 네 자리로 돌아가도록 해라.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다.”
“…… 응? 뭐 당신의 말을 따르라고 하거나, 강제로 낙인을 박는다거나 그런 짓은 안 하는 건가?”
티아마트가 기다란 송곳니를 내어 보이며 내게 말했다.
“흐름은 정해졌다. 내가 더 이상 나설 필요는 없어.”
“…… 흐름이 정해졌다는 말은, 내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는 건가?”
“그건 너 자신이 선택하게 될 일. ‘여는 자’여. 이제부터는 네 선택에 절대로 의심을 가지지 말도록 해라.”
티아마트의 몸이 공중분해 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다시 반짝이는 별들이 사방에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검은 게이트 앞으로 걸어가 잠시 생각했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이제 이 지옥 같은 꿈에서 깰 수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좋은 미소를 지었다.
“…… 그래야지.”
검은 게이트 속으로 몸을 담그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자의 탑’ 정복에 성공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무형의 공간에서의 수련을 끝낸 김천재 님에게 ‘잃지 않는 기억’ 파편을 심어 줍니다.]
[모든 기억이 몸속 깊은 곳에 박혀 지워지지 않게 됩니다.]
‘……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어느 쪽인지 모르겠지만 검은 게이트 끝에 도착했을 때 나는 기쁜 표정이 절로 지어졌다.
“…… 후우!”
두 눈을 뜨니 내 앞에 일행들이 전부 있었다.
그들을 본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만 나이를 먹은 건가? 유소라와 김연희의 모습이 내가 무형의 공간에 가기 전과 똑같다.
정우와 마이클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는 그들을 보며 소리쳤다.
“다, 다들 나를 기다려 준 거야?!”
내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정적이 흘렀다.
나는 다시 한번 그들에게 물었다.
“다들…. 지금까지 나를 기다려 준 거야?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마이클이 머리 옆에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내게 말했다.
“천재 킴 드디어 머리가 돌아버린 거에요우?”
“…… 응?”
정우도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어깨를 흔들었다.
“김천재, 너 어디 아프냐.”
“…… 아니?”
“근데 웬 헛소리를 그렇게 하는 거냐.”
“뭐가?”
“아니, 눈 한 번 껌뻑이더니 갑자기 기다려줬다고 지랄 옘병을 하니까 그렇지. 기다리긴 기다렸어, 1초? 2초? 아니 10초?”
꿈속의 시간은 게임과 연동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정우와 어깨동무했다.
“가자.”
“…… 뭐?”
“여기서 나가자고. 볼일은 전부 끝났어.”
* * * * *
사자의 탑에서 나가는 동안 꿈속에서의 이야기를 모두에게 해주었다.
다들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 얼굴로 나를 보았었는데, 그 안에서 각성시킨 능력을 보여주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스켈레톤 소환.”
강철 스켈레톤 한 마리가 내 앞에 소환되었다. 내가 녀석의 머리를 잡고 다시 한번 주문을 외웠다.
“스켈레톤 소환.”
두 번의 주문을 외우자 스켈레톤 병사의 어깨와 팔꿈치에 뼈 가시가 돋아나고, 얼굴이 외계인처럼 길어졌다.
정우가 내 소환수를 보며 놀라워했다.
“이건 또 뭐냐.”
“티아마트와 싸우다가 각성해서 얻게 된 기술이야.”
“각성?”
“어. 나도 몰랐는데, 어느 정도 숙련도가 올라가면 시스템이 각성시켜주더라고.”
“…… 나는 왜 아직 각성을 못 하지?”
“숙련도가 부족한가 보지.”
내가 소환 한 스켈레톤 병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이 녀석 강해진 만큼 단점이 커.”
“단점?”
“어, 전체적인 능력치는 두 배 정도 늘어났는데. 차지하는 인구수는 세배야.”
“…… 뭐 나쁘게 보자면 나쁘고, 좋게 보자면 좋을 거고. 사용하기 나름이겠네.”
“그렇지.”
끼이이익.
쿵!
지상으로 통하는 마지막 계단의 문을 열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카엘과 우리엘이 보였다.
그들은 심기가 많이 불편했는지 표정을 구기고 있다.
미카엘이 나를 내려보며 물었다.
“탑의 끝은 보고 왔나?”
“어.”
“루시퍼의 행방은?”
“…… 알 수 없었어. 녀석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이던데?”
“그런가….”
“아니, 너희도 탑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었어? 왜 여기 있는 거지?”
“……”
우리엘이 앞으로 한 발자국 나오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출입이 허가되지 않았다며 탑 밖으로 워프 되었다.”
“어…. 그래?”
“김천재, 탑 안에는 무엇이 있었지?”
대천사들도 티아마트에 대해서 모르는 건가?
아니면 나를 한 번 떠보려고 물어본 것일까.
나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어차피 진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녀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티아마트라는 존재를 만나고 왔어.”
“…… 티아마트?!”
“그래. 마지막 층에 가니 녀석이 기다리고 있더라고.”
내 대답에 미카엘이 크게 분노했다. 날개를 활짝 펼치고 검을 들이밀 정도니 대노 수준이라 할 수 있겠다.
“김천재! 네가 그분을 만났다는 말인가?”
“…… 어.”
“거짓말일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또 그렇게 말하네. 내가 뭣 하러 너희들한테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
“……”
“이상한 짓거리 하지 말고.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지금 물어봐. 나중에는 말 안 해 줄 거야.”
내가 침착한 반응을 보이자 미카엘도 날개를 접었다.
“정말 티아마트 님을 만났나?”
“그렇다고.”
“……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지?”
“내가 왜 탑에 왔는지, 루시퍼의 행방은 어떻게 되는지. 두 가지가 끝이었어.”
“…… 루시퍼의 행방은 모른다고 했으니 답을 못 들었을 테고.”
“맞아.”
“탑에 왜 왔는지에 대한 질문은 루시퍼를 찾으러 왔다고 했겠지.”
“……”
“뻔하군. 그 외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나?”
자기 혼자 답을 내리고 말을 끝냈다. 뭐-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니 이쯤하고 넘어가야겠다.
“없었어.”
우리엘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인가?”
“어.”
“…… 알았다. 그럼 시간이 없으니 다시 루시퍼의 행방을 찾으러 가도록 하지.”
내가 손을 뻗어 녀석들의 앞길을 막았다.
“잠깐.”
“…… 왜 그러지?”
“지금부터 우리는 너희와 따로 움직이도록 하겠어.”
“뭐?”
“시간이 부족하다면서? 내가 알기로는 회랑에서의 재회의가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알고 있는데.”
“네가 어떻게 그 사실을….”
“그 안에 루시퍼의 흔적을 찾아야 하는 거잖아? 그럼 뭉쳐서 움직이는 것보다는 흩어져서 찾는 편이 훨씬 빠를 거야.”
“……”
미카엘과 우리엘이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자신들만의 언어로 대화했다.
우리는 그들을 기다리며 잠시 작전 회의를 했다.
“마정우, 김연희, 마이클. 이렇게 셋은 ‘잊혀진 계곡’으로 출발하도록 하고, 나랑 소라 씨는 ‘어둠의 분출구’로 가도록 한다.”
모두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잊혀진 계곡 조는 루시퍼의 심장을 찾는 걸 최우선으로 하고, 나랑 소라 씨는 최대한 빨리 숨겨진 고룡을 찾아 계곡에 합류할게.”
정우가 김연희를 흘겨보며 내게 말했다.
“김연희는 네가 데려가도 될 것 같은데. 잊혀진 계곡은 마이클이랑 나, 둘이면 충분해.”
“아니, 혹시 모르니 김연희도 데려가도록 해. 아머 브레이크와 웨폰 브레이크를 가지고 있잖아.”
“없어도 되는데.”
“있으면 좋지.”
“…… 알았다.”
마정우와 김연희.
둘의 상성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번에는 서로 필요한 역할이다.
잊혀진 계곡에는 목 없는 기사 ‘듀라한’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미카엘이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지. 라파엘이 이 성전에서 대기하고, 먼저 루시퍼의 흔적을 찾는 쪽이 그녀에게 보고하는 거야.”
“…… 좋지. 그럼 이제부터는 따로 움직이는 건가?”
미카엘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간 사이에 주름이 팍 들어간 것으로 보아 석연치 않은 게 분명했다.
“그래.”
“기간은 언제까지로 알고 있으면 되지?”
“기간은 앞으로 오 일 후. 그전까지 모든 일을 끝내야 한다.”
앞으로 5일.
“…… 5일. 그럼 그때 보도록 하지.”
[시스템 메시지]
[‘루시퍼의 흔적을 찾아라!’ 서브 이벤트 발동.]
[남은 시간: 119:59:58]
[제한 시간 내에 루시퍼의 흔적을 찾아 성전을 방문하시오! 라파엘이 당신의 정보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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