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내가 낫을 크게 휘두르며 나무 상자를 향해 달렸다. 앞을 가로막는 꽃들이 가볍게 잘려나갔다.
길을 만들자 정우가 크게 소리치며 내 뒤를 따랐다.
“모두 천재의 뒤를 따라 달리도록!”
다들 전장에 익숙해졌는지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김연희가 정우의 뒤로 바짝 붙으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여기서 빨리 벗어나야 해. 천재가 시간을 버는 동안 계단을 찾도록 해.”
“시간을 벌어?”
“그래. 천재가 지금 베고 있는 꽃들 전부 환각초 중 하나야.”
“환각…. 초!”
대부분의 환각초는 자신의 영역에 적이 들어왔음을 인지하는 순간 초미세의 강력한 꽃가루를 내뿜는다.
그 가루를 호흡기관을 통해 흡입하면 환각에 빠지게 되고, 환각에 빠진 생명체는 죽을 때까지 끝없는 꿈을 방황한다.
부웅-
샤라라락!
다시 한번 크게 휘두른 낫에 전방에 있는 카나비스 수십 송이가 꺾여 나갔다.
“빨리 문을 찾아!”
이 게임 속에만 있는 특수한 카나비스. 녀석들이 적과 아군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저 그들이 정한 지역에서 머무는 시간.
식물 외의 생명체가 오랫동안 영역에서 나가지 않으면 적으로 인지한다.
그러니 녀석들이 우리를 적으로 인지하기 전에 잘라내서 없애든가, 영역에서 나가든가.
둘 중 하나는 선택해야 한다.
부웅-
스르륵!
다들 사방으로 흩어져 다음 층으로 가는 문을 찾기 시작했다.
횃불 덕분에 방이 환하게 비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층으로 가는 계단은 보이지 않았다.
아까 같이 왔던 길로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하고.
“…… 우선 열어볼까.”
나는 꽃밭 중앙에 있는 나무 상자에 다가갔다. 물론 낫을 계속 휘둘러 꽃을 베면서 말이다.
부웅- 부웅-
상자 앞에 도착한 나는 망설임 없이 뚜껑을 열었다. 나무 상자의 경첩에서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나며 오래됨을 보였다.
“…… 이건 또 뭔데.”
상자 안을 보니 열쇠가 하나 들어 있다. 오래되고 녹슬어 보이는 황동색의 열쇠.
크기로 보아 회장실 문고리 정도 열 수 있을 것 같다.
‘열쇠라….’
[‘제 3의 눈’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당신을 쳐다봅니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이 층의 벽면을 전부 확인했다. 열쇠가 들어갈 만한 구멍은 존재하지 않았다.
벽이 아니면….
‘혹시 아까 보고 온 그림과 연관이 있나?’
내가 소리쳤다.
“…… 다들 꽃을 베어내도록 해! 다음 층으로 가는 문은 이 밑에 있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들 꽃을 뽑고 잘라내었다.
지금까지 쓸모없어 보이던 김연희가 드디어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암살자 특유의 몸놀림으로 꽃밭을 난도질했다.
이번 층도 1층에서 보았던 벽화와 연관이 있다면 분명 바닥에 열쇠 구멍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 보인 ‘여는 자’의 존재가 바닥의 구멍을 만지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으니까.
“이 정도 열쇠가 들어갈 만한 구멍을 찾은 사람은 나한테 말해줘.”
내가 황동색 열쇠를 들고 소리쳤다. 모두가 알았다고 낮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낫을 휘두르며 다음 층으로 갈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부웅- 부웅-
식물들을 전부 베어낸다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의 꽃을 베어냈다. 시간이 흐르자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것처럼 눈앞이 휘청거렸다.
상태 이상 내성이 강한 내가 이 정도니 다른 이들은 버티기 힘들 것이다.
꽃밭의 반을 베어낸 시점.
“…… 찾았다!”
예상외의 인물인 유소라가 열쇠의 구멍을 찾아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단숨에 달려가 구멍을 확인했다.
‘이건가.’
그리곤 열쇠를 꽂았다.
키이이익!
맞는다.
이 바닥의 열쇠가 확실했다.
“돌립니다.”
유소라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모두가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내가 열쇠를 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키익! 키익! 키익!
마지막 바퀴가 도는 순간 그 안에서 푸슈슈!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혹시나 우리를 공격하는 무언가가 나올까 걱정했는데, 그저 바람을 타고 먼지가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시스템 메시지]
[다음 층으로 가는 계단을 발견하셨습니다.]
“…… 다행이다.”
연기가 걷혔다.
캄캄한 지하로 펼쳐진 계단이 보였다.
역시 이 탑은 위가 아닌 아래로만 향하는 길이 맞았다.
[‘제 3의 눈’이 김천재 님의 눈썰미가 굉장하다며 손뼉을 칩니다.]
길이 열림과 동시에 두 번째 층에 있는 꽃들이 시들었다. 조금 전 뿜어져 나온 검은 연기가 제초제 같은 역할을 했나 보다.
“후우-.”
유소라가 손뼉을 짝! 하고 치며 내게 말했다.
“천재 씨! 구멍이 이곳에 있는지는 어떻게 아셨어요?”
“…… 아까 아래층에서 보았던 벽화에 그려져 있었어요.”
“벽화? 거기 있는 그림을 전부 외우셨어요?”
“예. 뭐….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 하나는 남들보다 좋더라고요.”
기억력이라….
생각해보니 이 게임의 끝을 쉽게 볼 수 있게 해준 능력도 바로 기억력이었다.
한 번 싸운 적의 약점이나 패턴을 잊지 않으니, 그들에게 같은 공격을 당할 일이 없었다.
“…… 우선 다음 층으로 갑시다.”
* * * * *
계단의 끝에 도착하자 눈이 부실만큼 반짝이는 방에 도착했다. 지면과 벽면 그리고 천장까지 전부 알루미늄 같은 재질로 되어 있는 곳이다.
내가 신경을 세우고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앞선 층과는 다르게 불길한 기운이 들었다.
반짝이는 방에 발을 들이는 순간,
푸슉!
“어어!”
내가 뒤로 점프를 뛰었다.
팟!
바닥에서 커다란 가시가 튀어나왔다. 눈앞을 스쳐 지나갈 만큼 가까웠다.
앞에서 튀어나와서 다행이지, 내가 밟고 있는 바닥에서 튀어나왔으면 하부를 찌르고 들어갈 뻔했다.
[시스템 메시지]
[‘사자의 탑’ 세 번째 층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나는 짜증을 내며 홀로그램 화면을 흩트렸다.
“뭐…. 야 이건.”
뒤에서 나를 보던 정우가 껄껄 웃었다.
“김천재, 똥침 제대로 당할 뻔했는데?”
“…… 똥침이 머리까지 뚫겠다야.”
계단 앞으로 후퇴하게 된 나는 바닥을 유심히 보았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가시가 튀어나올 수 있도록 X자로 바닥이 잘려져 있었다.
나는 바닥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곳도 분명 첫 번째 층에서 보았던 벽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기록되어 있는 최초의 ‘여는 자’로 보이는 자들이 그림에 등장한 횟수는 총 다섯 번.
사자의 탑 층수와 동일하다.
“…… 오케이.”
생각을 마친 내가 다시 알루미늄 방을 향해 걸었다. 아무런 대비 없이 출발하자 정우가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너 환각초에 취했냐?”
“…… 아니.”
“근데 왜 그냥 가?”
“…… 그냥 가면 돼.”
“뭐?”
“그냥 가면 된다고. 다들 제가 신호할 때까지는 움직이지 마세요.”
나는 정우의 손을 살며시 내려놓은 후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푸슉!
내 앞으로 가시 하나가 튀어나왔다.
‘…… 그렇지.’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가시 옆을 지나갔다.
푸슉! 푸슉!
또 다른 구멍에서 가시가 튀어나왔다. 나를 찌르지는 않았다. 그저 위협을 하려는 것처럼 보일 뿐.
반쯤 도착했을 때 나는 눈을 감고 앞을 향해 걸었다. 어차피 이 방에서 튀어나오는 가시들이 나를 공격하지 않으리란 건 알고 있으니까.
그저 감각을 곤두세워 가시들이 어디서 오는지 확인했다.
“…… 그렇구나.”
분명 느껴지지 않았던 가시들이 푸슉! 소리가 날 때만 순간적으로 오라의 형태를 띠었다.
눈으로 볼 때는 물체처럼 보이는데, 오라의 집합체였던 것이다.
방의 끝에 도착한 나는 팔을 붕붕 흔들어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다.
“다들 한 명씩 건너오도록 해!”
내 외침을 들은 정우가 머리 위로 동그라미 사인을 보냈다.
마이클부터 김연희, 유소라, 마정우. 한 명씩 알루미늄 방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첫걸음, 가시가 튀어나올 때는 다들 겁을 냈지만,
그 후에는 나처럼 평온한 상태로 방을 걸어왔다.
* * * * *
모두가 가시밭길의 반대편에 도착했다. 이 방의 시스템을 알지 못하는 모두가 내게 물었다.
“가시가 왜 우리를 공격하지 않은 거죠?”
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저도 모릅니다. 다만 아까 본 벽화에 모두가 대기하고 있고, 방안에서는 한 명씩 걷도록 그려져 있더라고요.”
“아….”
나는 리콜 능력을 사용해 스켈레톤 병사 세 마리를 불렀다.
그리곤 알루미늄 방안에 던져 보았다.
푸슉! 푸슈슈슉-
콰직!
사방에서 가시들이 쏟아져 나와 스켈레톤 병사를 난도질했다.
아래, 옆, 위에서 동시에 날아오니 막는 것 외에는 피할 수도 없는데다가 너무나도 많은 수였다.
게다가 강철로 만들어진 스켈레톤이 종이처럼 찌그러질 정도니, 위력은 상상도 못 할 정도.
마정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
“미쳤네. 저거 맞으면 한 방에 골로 갔겠는데?”
“안 맞았으니깐 뭐….”
[‘제 3의 눈’이 정말 벽화를 전부 외우고 있는 거냐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게임을 지켜보는 자’들이 흐뭇한 미소로 김천재 님을 지켜봅니다.]
[‘운영진4’가 저 지형은 자신이 만든 곳인데 너무 쉽게 완료하니 분통이 터진답니다!]
나는 살짝 미소를 지어 입꼬리를 올리며 부서진 스켈레톤의 뼈를 챙겼다.
“다음 층으로 가자.”
* * * * *
[시스템 메시지]
[‘사자의 탑’ 네 번째 층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순식간에 네 번째 층에 도달했다.
계단의 끝에 도착하자 어둠 속 어둠이라고 부를 만큼 굉장히 검은 공간에 도착했다.
전방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다. 지면을 향해 살짝 발을 딛으니 참방참방! 하는 소리와 함께 액체가 느껴졌다.
치직!
멀지 않은 곳에서 전기 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빠르게 발을 빼내어 털었다.
‘그렇지.’
김연희가 후레쉬로 비쳐 보았지만, 가시거리가 2m도 되지 않을 정도로 흐릿했다.
빛을 삼킬 정도로 강한 어둠이란 말인가?
“……”
물론 나는 이곳을 지나갈 답을 알고 있다. 답안지를 미리 보고 온 학생이 시험을 치는 것처럼 아주 쉽게 느껴졌다.
“정우야, 담배 하나만 줘봐.”
“담배? 갑자기?”
“어. 라이터도.”
“…… 여기.”
정우가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어 내게 넘겨주었다. 나는 입에 담배를 문 후 불을 붙였다.
치직- 치지직-.
쓰읍.
푸후-
하얀 연기가 강하게 뿜어져 나갔다. 나는 검은 공간 안으로 발을 내딛은 후 먼 곳을 향해 담배꽁초를 던졌다.
빙글빙글 돌며 날아간 담배꽁초가 바닥에 닿는 순간,
쉬이이이이익-
화르르!
방 전체에 화염이 일었다.
한순간에 어둠이 날아갔다.
순간적인 열풍에 몸이 뒤로 밀렸다. 막지 않으면 얼굴의 피부가 탈 정도로 강한 열기다.
내가 낫을 빠르게 돌려 바람을 만들었다.
“……”
지면에 가득 차 있던 기름이 증발하고, 화염이 사그라들며 열기가 그쳤다.
우리 눈앞으로 검은 기둥이 보였다. 이 방을 지키는 방어 장치 중 하나.
적이 오면 그들을 감지하고 바닥에 불을 붙이는 부싯돌 같은 역할의 장치.
나는 기둥을 향해 낫을 강하게 던졌다. 빠르게 회전하며 날아간 낫이 기둥에 부딪히며 굉음을 내었다.
콰광!
기둥이 반으로 부러지며 옆으로 쓰러졌다.
쿵!
“…… 됐다. 모두 다음 층으로 가자.”
[‘사자의 탑’의 주인이 김천재 일행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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