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성스러운 회랑에 도착하자 상처투성이의 미카엘이 우리를 반겼다.
그는 누구와 격렬한 전투를 치렀는지, 갑주가 이곳저곳 부서져 있었다.
“왔는가.”
[‘김천재’ 님의 그룹]
[앞으로 진행될 ‘멸망의 땅’ 열두 번째 라운드의 스토리 흐름을 선택해주세요.]
A. 미카엘과 손을 잡는다.
B. 메타트론의 의지를 잇는다.
처음 보는 선택지지만, 어느 정도 스토리의 흐름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A를 선택했다.
[선택지- A]
[미카엘과 손을 잡고 지옥으로 향합니다.]
‘지옥이라….’
콰르릉! 소리와 함께 천둥이 내리쳤다.
“김천재, 나와 함께 지옥으로 가주어야겠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미카엘의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지옥은 왜요?”
“루시퍼 녀석의 행방을 찾아야 한다.”
“루시퍼를…. 지옥에서?”
“그래. 녀석은 지금 인간계에 숨어있어. 우리의 목적은 루시퍼를 추적할 만한 단서를 찾는 것. 시간이 없으니 빨리 이동하도록 하지.”
잠시 고민하던 내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어차피 모르는 이야기를 길게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프다. 그가 말하는 대로 우선 움직인 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가는 수밖에.
“그럼 곧장 지옥으로 가도록 하게나. 게이트는 이미 열어놨네.”
회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붉은 게이트가 소용돌이쳤다. 기존에 있던 게이트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같은 붉은색이지만 좀 더 짙어졌다고 할까?
“그럼….”
떠나기 직전 김연희가 소리쳤다.
“미카엘! 조영기의 몸은 언제 돌려줄 거야?!”
“이번 전투가 끝나면 바로 돌려주도록 하지. 루시퍼가 사라지면 나도 인간계에 갈 일이 없어진다.”
“…… 오케이! 천사니까 거짓말은 하지 않겠지?”
“당연하지.”
김연희가 미카엘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더니 내 옆으로 바짝 붙었다.
“김천재, 들었지?”
“…… 그래. 그럼 가자.”
게이트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하얀 안개가 사방에 가득 찼다.
순간적으로 놀란 모두가 어어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당황스러워했다.
나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를 내었다.
“스토리 화면이에요. 모두 당황하지 말고 대기하세요!”
[열두 번째 라운드의 메인 NPC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미카엘’의 기억 속에 있는 파편을 발동시켜 스토리 영상을 재현합니다.]
본격적으로 이번 라운드에 대한 설명을 해주려는 건가?
이 게임의 고인물인 나 또한 처음 해보는 스토리니 이해가 된다.
이번 영상은 망설임 없이 바로 진행되었다.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익숙한 장소로 날아왔다.
천국의 회랑, 그 안에 있는 성스러운 존재들의 회의실이다.
가브리엘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 내가 보는 화면은 멀지 않은 과거, 며칠 이내에 있었던 일.
숙연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미카엘이 열을 내며 말하고 있다.
“고작 악마를 잡자고 인간들을 전부 멸살하자는 말씀입니까?!”
그의 질문에 메타트론이 대답했다.
“고작 악마라니. 루시퍼는 단신으로 우리 천상계를 뒤집을 수 있는 놈이야.”
“그렇다면 루시퍼를 잡아야지, 왜 인간들을 공격하자고 하시는 겁니까?”
“놈이 그들 사이에 숨어있다. 찾을 방법은 그뿐이야.”
쾅!
미카엘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인간은 저희를 도와 지옥이라는 격전지에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중 일부분이지.”
“그들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것 또한 자네의 생각일 뿐.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어.”
미카엘이 메타트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다른 천사들은 둘의 눈치만을 볼 뿐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틀린 말은 없다. 루시퍼를 처리해야지만 완전한 평화가 찾아오니까.
나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돼지를 보며 고기로 생각하듯, 메타트론도 인간을 보며 그저 가축 정도로만 생각할까?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냥 궁금했다.
“메타트론. 당신의 선택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아갈지, 그리고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고 있습니까?”
“생명의 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과는 루시퍼의 죽음이다.”
너무나도 단호한 대화였다.
서로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둘의 대화를 듣던 가브리엘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같은 대천사로서 의견이 갈리니 다수결로 하는 것이요.”
-맞소! 그렇게 합시다.
-가브리엘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다수결로 정합시다.
-인간의 존폐를 선택하는 중요한 결정이니, 시간도 넉넉히 잡도록 하지요.
천사들의 대부분이 가브리엘의 의견을 존중했다.
메타트론도 그녀가 만든 답을 존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럼 앞으로 열흘의 시간을 줄 테니. 그때까지 전원 선택을 마치도록 해라.”
대화가 끝남과 동시에 흰색 안개가 다시 눈앞을 가렸다.
‘그럼 앞으로 일주일 남은 건가?’
저 때 이후로 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말이다.
나는 지나간 영상을 다시 떠올리며 메타트론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는 인간의 희생보다는 루시퍼의 목숨을 앗아오는 쪽이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루시퍼를 죽이려는 이유가 결국 천국의 평화를 위한 것, 그 말인즉슨 천국에 평화가 확실시된다면 인간은 공격을 받지 않아도 된다.
“…… 그래서 미카엘이 지옥으로 가자는 건가.”
그의 뜻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촤르르륵!
갑자기 안개 커튼이 쳐지며 다음 장면을 보였다.
이번에는 메타트론이 없는 장소에서 만난 미카엘과 가브리엘, 그리고 우리엘과 라파엘이 있었다.
네 명의 대천사가 원형의 탁자 앞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제일 먼저 입을 뗀 것은 미카엘. 시선이 우리엘을 향하고 있다.
“인간이 없었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봉인되어 있었을 거야.”
“…… 라파엘, 가브리엘. 둘의 생각은 어떻지?”
라파엘이 먼저 대답했다.
“나는 인간들을 공격하지 않는 쪽으로 일을 진행하고 싶어.”
“…… 그래?”
“응. 인간이 하는 말 중에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라는 말이 있어. 루시퍼 하나 잡자고 인간을 멸살하는 건 좀 아니라고 봐.”
이야기를 듣던 가브리엘이 말을 이었다.
“저 또한 라파엘과 같은 생각입니다. 인간에게 도움을 받은 덕분에 지옥 정복 계획을 진행할 수 있었는데, 이제 와서 그들을 없앤다니요?”
미카엘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른 이들을 순서대로 보았다.
지금 이곳에 모인 세 명의 대천사가 전부 그와 같은 생각을 가졌다.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지. 다음 회의가 진행되기까지 시간이 넉넉하니, 우리가 먼저 지옥으로 가서 루시퍼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어떤가?”
제안을 들은 우리엘이 바로 반응했다.
“좋습니다. 짐작 가는 곳도 몇 군데 있는데다가, 놈을 처리하지 않으면 분해서 속이 끓어오릅니다.”
“녀석의 행방만 알게 된다면 메타트론도 인간 멸살 계획을 실행하지 못할 테지….”
“당연하지요. 녀석을 찾을 방법이 있는데 아무런 명분도 없이 괜한 생명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요. 이유 없는 살육은 악마와 다를 바 없는 것 아닙니까?”
“…… 그렇지.”
라파엘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브리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랜 시간 동안 봉인되어 있었으니,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고된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미카엘이 원형의 탁자 위에 지옥 지도를 올려놓았다. 그들은 지도를 보며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신과 직접 대화를 한다는 메타트론, 그의 눈에 들어가지 않도록 움직이는 것이 미카엘의 계획이었다.
“그럼, 인간들이 다시 회랑으로 돌아오는 때에 맞춰 움직이도록 하지.”
그렇구나.
지옥에서 루시퍼의 행방을 찾으려는 이유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인간의 존속을 위한 그들의 선택.
‘…… 그렇단 말이지.’
* * * * *
대화가 끝나자 멍해졌던 정신이 돌아오며 게이트 밖으로 몸이 튀어나왔다.
어두컴컴해야 하는 지옥이 찬란한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악마들은 온데간데없고 천사들이 게이트 주위에 돌아다녔다.
우리가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미카엘이 도착했다.
그가 나를 내려보며 물었다.
“이 근방은 이제 천사들의 영역이네.”
“…… 지옥 같지 않네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하지만 태초의 지옥은 네가 아는 모습과 달랐다.”
“태초의 지옥?”
“그래. 지금처럼 썩은 내가 가득하고 어두운 구름이 가득 차 있지 않았어.”
“…… 그럼요?”
미카엘이 검을 크게 휘두르자 공간이 뒤틀어지는 것처럼 보이며 소용돌이쳤다. 그 안으로 과거의 지옥으로 보이는 장면이 나타났다.
인간이 사는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을 보아, 적어도 천 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때인 것 같다,
이 시대에 저런 조잡해 보이는 가죽옷을 입고 다니지는 않으니 말이다.
“태초의 지옥은 이런 모습이었다. 어둡기는 했지만 모든 자가 살육과 광기에 미치지는 않았어.”
“악마들은 원래 악한 존재가 아닌가요?”
“악하지. 하지만 악한 것은 악마뿐만 아니라 인간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 정도가 다를 뿐.”
“……”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다.
하지만 지옥이 이 정도로 청정 지역인 줄은 몰랐다. 지금과 다르게 땅에서 불길이 솟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늘에서 잿가루가 떨어져 내리지도 않았다.
몇 초가 흐르자 뒤틀려 보이던 공간이 제자리를 찾으며 과거의 모습을 지웠다.
“앞으로도 지옥은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악마들은 신께서 말씀하신 범주를 넘었기에, 정화작업이 필요하게 된 것이야.”
“…… 알았어요. 머리 아픈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우선 도착지부터 알려주시죠?”
미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예?”
“우리도 아직 모른다. 흔적이 있을 만한 장소를 찾는 중이야.”
“그럼 저희도 루시퍼의 흔적을 찾으러 다녀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 그래.”
고온의 사우나처럼 숨도 쉬기 힘든 이곳에서 또다시 작업해야 한다니.
저번 라운드를 마지막으로 지옥에서의 임무가 끝인 줄 알았는데.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예상가는 지역은 전부 확인하셨나요? 녀석의 왕좌나 사탄의 탑 같은-”
“그 두 곳은 확인을 끝냈다. 지금 남은 곳은 쓰러진 신목을 통해 연결된 ‘잊혀진 계곡’과 고룡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하는 ‘어둠의 분출구’ 두 곳이야.”
‘잊혀진 계곡’과 ‘어둠의 분출구’.
멸망의 땅 본래의 루트로 가자면 열네 번째 라운드에 도착하는 곳들이다.
잊혀진 계곡에서 숨겨진 루시퍼의 심장을 찾고,
어둠의 분출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통해 놈의 그 심장을 녹인다.
이렇게 루시퍼의 힘을 약화해 맞붙게 되는 이야기가 바로 ‘멸망의 땅’ 열다섯 번째 라운드.
이 게임의 마지막 바로 전 라운드다.
물론 그렇게 약해진 루시퍼에게도 우리가 졌지만….
두 곳의 상태를 전부 알고 있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은 잊혀진 계곡으로 가더라도 루시퍼의 흔적을 찾기에는 힘들 테니까.
‘아직은 흔적이 없을 테니…… ’
나는 미카엘을 떠보듯 질문했다.
“그곳 말고는 없나요?”
“…… 있다.”
응? 있다고?
“어딘데요?”
미카엘이 보수 중인 성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곳은 얼마 전까지 라파엘이 봉인되어 있던 신성한 장소.
“지옥 성전이 세워지기 전, 이 땅에 중심을 지킨 탑.”
“……”
“‘사자의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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