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미카엘과 그의 부하들이 나타나자 루시퍼가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었다.
“김천재!”
“…… 미카엘.”
천사들이 빠르게 날아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들은 곳곳에 서려 있는 악마의 기운을 정화하기 시작했다.
겨우 오 분도 안 되는 시간이 흘렀는데, 전투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깨끗한 방이 되었다.
“전투가 있었나 보군.”
“…… 그래.”
“벨제붑, 그 녀석이 또 방해했나?”
“벨제붑. 그리고 루시퍼.”
“…… 루시퍼?! 녀석은 아직 저 안에 봉인된 것 아니었나?”
내가 모래시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에게 말했다.
“맞아. 다만 봉인되기 전 어딘가에 숨겨놓은 혼의 조각이 있었나 봐.”
“혼의 조각….”
“그리고 봉인된 루시퍼의 영혼이 사라졌어. 모래시계를 봐.”
미카엘이 모래시계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내게 물었다.
“어디로 사라진 거지?”
“그건 나도 모르지.”
“……”
“다만 저 안에 있는 건 확실해. 루시퍼 스스로의 힘으로 봉인을 뚫고 나갈 수는 없으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문제를 판단할 사람은 우리가 아닌 대천사 미카엘. 즉, 가브리엘과 동일 선상에 있는 천사장이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모르지. 루시퍼가 사라졌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
“……”
“다만 봉인 해제 여부는 빨리 선택하는 게 좋을 거야. 라파엘 혼자 밖에서 결계로 버티고 있으니까.”
미카엘이 모래시계 속에 갇힌 가브리엘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답이 없는 문제다.
[‘미카엘’ 님이 두 개의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1. 루시퍼의 여부와 상관없이 봉인을 푼다.
-2. 가브리엘만 따로 빼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봉인을 풀지 않는다.
[‘김천재’ 님의 그룹은 앞으로의 스토리 흐름을 선택하여 주십시오.]
[남은 시간: 60초]
응?
갑자기 눈앞에 60초라는 숫자가 뜨더니 카운트다운을 하듯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니, 이걸 우리보고 선택하라고?’
다른 그룹원들과 이야기가 되지 않은 상태라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
대화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공간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나는 두 개의 선택지를 번갈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 정도는 시스템이 직접 정하고 움직여도 되지 않나 싶다.
결과에는 큰 차이가 없을 텐데 말이다.
“…… 그래도 정한다면 이게 낫지.”
[‘김천재’ 플레이어님이 1번 흐름을 선택하셨습니다.]
[다른 플레이어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턱을 괴고 마정우를 쳐다보았다. 대놓고 왼쪽으로 손이 가는 것으로 보아, 나와 같은 선택지다.
역시….
이어서 다른 이들을 둘러보았다. 기가 찰 정도로 웃긴 결과가 나왔다.
모두의 손이 하나같이 왼쪽으로 향했다. 대화한 적도 없고, 선택하기 전까지는 다른 플레이어를 볼 수 없는데.
‘허허….’
삐빅.
[‘김천재’ 님의 그룹은 1번 흐름을 선택하셨습니다.]
[‘가브리엘과 루시퍼의 약속’ 흐름으로 스토리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응?’
가브리엘과 루시퍼의 약속이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다. 천사와 악마가 약속을 할 수도 있다는 건가.
터벅. 터벅. 터벅.
미카엘이 진중한 표정으로 내 앞으로 바짝 붙었다.
“봉인, 그냥 풀도록 하지.”
“…… 루시퍼가 같이 나오면?”
“같이 막으면 된다.”
“가능해?”
“가능할 거야. 삼천 년 동안 봉인되어 있었으면 녀석의 몸에도 분명히 변화가 왔다.”
“……”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따돌릴 수는 있을 거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의견을 존중할수록 천사들과의 친밀도가 올라가니 잘 구슬려야 한다.
[‘미카엘’ 님이 김천재 플레이어에게 친밀감을 느낍니다.]
바로 반응하다니.
‘…… 개꿀이네.’
“그럼 바로 봉인 해제 작업을 시작하도록 하지.”
“잠깐, 어차피 해제할 거 모래시계를 둘로 나눠서 진행하도록 하자. 운이 좋으면 저 안에서 루시퍼와 가브리엘을 나눌 수 있잖아?”
“……”
“어차피 모래시계를 둘로 나누는 작업을 할 예정이었고 말이야.”
내 의견에 미카엘이 적극적으로 찬성해 주었다. 이대로 친밀도를 계속 높이면 마지막 라운드까지 천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천사 여럿이 모래시계에 붙어 성스러운 주문을 외웠다.
도넛 모양의 빛 고리가 모래시계의 중간을 휘감더니 서서히 조여졌다.
키기기긱!
그에 따라 모래시계가 조금씩 휘기 시작했다. 손에 힘을 주어 플라스틱 숟가락을 휘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점점 작아지는 빛의 고리가 하나의 원이 되자, 모래시계의 중간 부분이 막히며 떨어지는 모래알이 멈추었다.
나는 모래시계를 보며 미카엘에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 알았다.”
내가 손가락을 까딱여 유소라를 불렀다.
“부르셨어요?”
“지금 사자의 서 있죠?”
“예.”
유소라가 사자의 서를 꺼내어 내게 보여 주었다.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종잇장의 끝부분이 살짝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제가 말한 주문은 전부 외우셨어요?”
“그럼요! 천재 씨가 말씀하셨는데 당연히 했죠.”
“그럼…. 이 모래시계 위에 사자의 서를 잡은 손을 얹고, 그 주문을 외워주시겠어요?”
유소라가 사자의 서를 모래시계에 가져다 대더니 내게 물었다.
“이렇게 하면 돼요?”
“예.”
“…… 아! 이게 바로 그 신의 힘을 품고 있는 물건이군요!”
“맞아요. 이제 따로 말해주지 않아도 척척 아시네요.”
유소라가 신이 난 얼굴을 지었다.
“이제 주문 외울까요?”
“바로 들어가세요.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집중하시고요.”
“…… 알겠습니다.”
그녀가 두 눈을 천천히 감으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사자의 서.
다른 플레이어들의 눈에는 고대 문자라서 해독이 불가능했지만, 오직 여는 자의 동료라고 인정된 유소라만이 읽을 수 있는 언어였다.
그녀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모래시계가 진동을 했다. 시계의 틀에 조금씩 진동이 가고, 투명한 관에는 거미줄처럼 금이 가며 부서지고 있음을 나타냈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라도 모래시계 안에 갇혀있던 루시퍼가 폭주할까 봐 겁이 났다.
‘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러지는 않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는가?
조심해서 나쁜 일은 없을 것이고.
유소라가 주문의 마지막 문장을 내뱉자 쾅! 소리와 함께 모래시계가 터졌다.
깨진 시계 밑으로 황금빛 모래알이 쏟아져 내렸다.
가브리엘이 쓸려 나왔다.
우리 모두 긴장한 상태로 루시퍼의 행방을 찾았다. 분명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 설마.’
내가 고개를 내려 가브리엘을 보았다. 그녀의 몸에서 성스러운 기운과 사악한 기운이 같이 흘러나오고 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있는 몸.
가브리엘이 모래시계 안에 갇혀있는 동안에는 몰랐는데, 이렇게 밖으로 나오니 알 수 있었다.
눈에 보일 만큼 선명한 검은 오라.
“…… 비켜라, 미카엘!”
내가 낫을 휘둘러 가브리엘의 가슴을 노렸다.
부웅-
미카엘이 검을 뻗어 내 낫을 막아냈다.
캉!
“멈춰라, 김천재.”
“뭐?”
“네 의도는 알겠으나, 그렇게 하면 가브리엘도 같이 죽어.”
“지금이 아니면 루시퍼를 잡을 기회를 놓칠 거야.”
“아니, 루시퍼는 언젠가 내 손으로 꼭 잡는다. 지금은 가브리엘의 치료가 우선이다.”
“……”
내가 미카엘의 어깨를 발로 걷어찼다. 퍽!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뒤로 밀렸다.
천사 병사들이 전원 무기를 들고 나를 겨누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소리쳤다.
“미친 소리 하지 마. 가브리엘이 네 이야기를 듣는다면 뭐라고 할까?”
“……”
“내가 그녀였다면 스스로를 희생해서라도 루시퍼를 잡았을 거야.”
“진정해라.”
“미카엘, 지금 우리끼리 이렇게 대화할 시간이 없어. 빨리 녀석을 죽여야 해.”
미카엘이 성스러운 오라를 뿜으며 가브리엘의 앞을 막았다.
“미안하다, 김천재. 나는 가브리엘을 죽일 수 없어. 이번에 루시퍼 녀석을 죽이지 못하더라도 말이야.”
못난 놈.
지옥에 성전을 짓기 위해 루시퍼를 희생할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가브리엘은 지키려고 하는 것인가.
“…… 후회하게 될 거야.”
“대천사는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지 않는다.”
“루시퍼가 부활하면 너희도. 그리고 천국도 위험한 거 알고 있지?”
“……”
“메타트론이 이 장면을 봤으면 뭐라고 할까?”
미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설득하려 하지 마라.”
“…… 빌어먹을.”
내가 땅을 걷어찼다. 쾅! 소리와 함께 대리석 조각이 깨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 * * * *
미카엘과 다른 천사들이 성스러운 힘을 조금씩 모아 가브리엘의 몸에 주입했다. 루시퍼의 힘을 약화하려는 주문인 것 같은데, 오히려 상황은 악화되어갔다.
그들의 힘에 반응한 루시퍼가 가브리엘의 몸에서 깨어나려는 징조가 보였다.
-키아아아악!
가브리엘의 몸에서 어두운 기운이 세차게 흘러나왔다. 그녀의 얼굴이 매섭게 변하고 손과 팔에 핏줄이 굵게 튀어나왔다.
미카엘이 그녀의 가슴팍에 손을 올려놓고 인공호흡을 하듯 강하게 눌렀다.
“정신 차려라, 가브리엘!”
“키에에에엑!”
“루시퍼를 네 몸에서 뱉어내도록 해라. 너는 할 수 있어. 놈을 빼내고 다시 천국으로 돌아가는 거야.”
“키에엑!”
“가브리엘!”
뚜둑. 가브리엘의 머리에서 무언가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날개를 펄럭였다.
반짝이는 검은 가루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가브리엘이 눈을 뜨더니 미카엘을 보며 속삭였다.
“미카엘.”
“…… 정신이 들었나?”
“오랜만이야.”
“그래, 수고 많았다.”
“수고 많기는. 지금까지 가브리엘하고 잘 놀았는데.”
푸슉-!
가브리엘의 손이 미카엘의 명치를 뚫고 지나갔다. 너무나 빠른 일격이라 반응하지 못했다.
공허한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가브리엘이 소름 끼칠 정도로 사악한 웃음을 내뱉었다.
-캬하하하!
그녀의 이마에서 두 개의 뿔이 튀어나왔다.
미카엘의 몸에서 기름 같은 투명한 액체가 빗방울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가…. 가브리엘….”
“미카엘, 미안하지만 나는 가브리엘이 아니야.”
“…… 루시퍼인가?”
“루시퍼도 아니지.”
“크윽…. 그럼….”
가브리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 나는…. 루시엘.”
[시스템 메시지]
[모든 플레이어는 힘을 모아 ‘성스러운 악마 루시엘’의 폭주를 막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녀가 가볍게 손을 흔들어 미카엘을 던졌다. 천사들이 우왕좌왕하면 어쩔 줄 몰라 했다.
‘루시엘….’
그렇구나.
내가 아는 존재가 등장했다.
저번 게임에서는 만난 적 없지만 어떻게 제압할 수 있는지 아는 놈이다.
순간 가슴이 뛰었다.
잘못된 길로 들어온 줄 알았는데 나만이 지나갈 수 있는 곳이었다.
마정우도 녀석의 존재를 눈치 채고 내게 말했다.
“김천재, 저 녀석은 네 상대다.”
“…… 맡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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