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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가까이서 내 목소리를 들은 김정재가 움찔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짐승처럼 나를 잡아먹으려고 들던 놈이.

천천히 손을 거두며 내게 말했다.

“…… 김천재인가.”

모습은 저래도 인간의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건가.

“맞아.”

“크르르르…. 기어코 이곳까지 왔구나.”

“…… 악당이 할 만한 대사네?”

악당이라는 말이 심기가 거슬렸는지, 놈이 미간을 찌푸렸다. 두 개의 비늘이 맞닿으며 키이이익! 소리를 내었다.

“이곳에는 어떻게 왔지?”

“걸어왔지.”

“…… 말장난하지 마라.”

“진짠데? 내가 걸어왔지 날아왔겠어?”

“……”

김정재가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천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야말로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놈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오라의 형태를 보니 악마가 된 것 같다.

그저 어둡기만 한 오라가 아니라 불길할 정도로 날카로워 보였다.

“‘여는 자’가 이곳까지 무엇을 하러 왔겠나?”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 모르겠네?”

“멍청한 놈.”

“그렇다고 하자. 너랑 말싸움하고 싶지 않으니까, 서로 용건만 짧게 말하고 끝내도록 할까?”

“……”

녀석과 내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적인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애매한 상황이다.

악마가 되었다면 내가 처리해야 할 적이 분명한데,

김정재는 분명 이번 라운드의 마지막 전투 때, 벨제붑의 목을 떨어뜨릴 메인 NPC다.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던 김정재가 천천히 입을 뗐다.

“김천재.”

“왜?”

“루시퍼의 목을 치러 왔나?”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루시퍼의 목을 치려는 것은 맞지만, 이번 라운드에서는 아니다.

“…… 맞는데. 아니야.”

“뭐?”

“놈의 목을 칠 예정이기는 한데, 지금은 불가능해.”

내 말뜻을 알아들은 김정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드래곤으로 변한 그의 몸을 가리키며 물었다.

“너는 왜 그런 몸이 된 거지?”

“……”

“괴물이 따로 없네.”

“네가 보기에도 내가 괴물로 보이나?”

“그럼 사람이겠어? 온몸이 비늘로 덮여있는 데다가 무슨…. 개조에 실패한 키메라 같은 외관인데.”

녀석이 잠깐 화를 내어 오라를 뿜다가, 다시 진정하며 내게 대답했다.

“이 몸은 내가 원해서 가진 것이 아니다.”

“…… 그럼?”

김정재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여기까지 왔으면 너도 알겠지만, 이 성안에는 지금 두 마리의 대악마가 진을 치고 있다.”

“…… 그래서?”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 것 같나?”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멍청한 놈.”

“…… 김정재, 멍청하다고만 하지 말고 말을 똑바로 해. 빙빙 돌려 말하는 것도 재주긴 한데, 내가 지금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녀석이 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쿵!

나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며 그에게 손바닥을 뻗었다. 혹시라도 갑자기 덤벼들까 하는 생각에 거리를 두었다.

“김천재, 한 가지만 부탁하마.”

“…… 뭔데?”

녀석이 비장한 표정으로 갑자기 머리를 내렸다.

“나를 죽여다오. 네가 직접.”

[시스템 메시지]

[새로운 스토리 발견]

[열한 번째 라운드의 메인 NPC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영웅 김정재’의 기억 속에 있는 파편을 발동시켜 스토리 영상을 재현합니다.]

“자, 잠깐만. 너를 죽여 달라니?”

김정재가 무어라 중얼거렸는데, 하얀 안개가 눈앞에 펼쳐지며 내 앞을 가렸다.

‘…… 하아.’

이놈에 스토리 영상은 몇 번이나 보는 건지. 궁금하지도 않은 김정재의 과거까지 보게 되는구나.

나는 뒤로 발라당 누웠다. 우주인처럼 공중에 몸이 둥둥 뜨며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어차피 시간이 멈추었다면 지금이 바로 쉴 타이밍.

눈을 감고 잠시 졸고 있는데,

촤르르륵!

갑자기 안개 커튼이 빠르게 열렸다.

“…… 저게 김정재라고?”

어린 날의 김정재다.

그가 허공에 목검을 휘두르며 신체를 단련하고 있다. 나는 놈의 옆으로 날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딘지 모르겠는 깊은 산 속이다. 21세기에 이런 수련을 하는 자들이 아직도 있단 말인가?

겨우 열 살배기로 보이는 어린아이인데 말이다.

열심히 목검을 휘두르던 김정재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휴유-.”

놈이 잠시 쉬려 바위 위에 앉자, 어디선가 튀어나온 백발의 할아버지가 성을 냈다.

“또 쉬는 게냐!”

어디서 많이 본얼굴인데.

‘…… 누구지?’

김정재가 깜짝 놀라 땅을 차고 일어났다.

“스, 스승님!”

“이 녀석, 내가 천 번을 휘두르라고 하지 않았느냐.”

“처, 천 번은 이미 끝냈습니다.”

“…… 그래?”

갑자기 백발의 할아범이 미소를 지으며 김정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삼류 코미디처럼 급작스러운 전개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뱉으며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정재야, 언젠가는 네가 이 세상을 구해야 한다.”

“…… 제가요?”

“그래. 이 세상에는 곧 멸망이 찾아올 거야. 그때가 되면 사람들이 너를 찾을 거고. 너는 영웅이 되어 괴물들을 물리쳐야 한다.”

푸른 하늘을 보니 루시퍼에 의해 멸망이 찾아오기 전인데, 이미 눈치를 채고 준비하는 이가 있었단 말인가?

‘호오라….’

“괴물이라뇨….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지금은 없지만, 후에 나타날 거야.”

“거짓말하지 마세요.”

“거짓말은 무슨!”

“엄마한테 말해도 돼요?”

백발의 할아범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건 안 된다. 이 사실은 너만이 알고 있어야 해.”

“헤에…. 제가 할아버지 약속을 안 지키고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요?”

“그럼 너는 영웅이 되지 못하는 거지.”

김정재가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응?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영웅이란 자고로 단 한 명만이 될 수 있는 자리야. 네가 아닌 다른 자가 괴물들을 처리한다면 너는 영웅이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잖니?”

“어…. 저는 영웅이 되고 싶지 않은데요?”

백발의 할아범이 김정재의 머리통에 꿀밤을 먹였다.

퍽!

둔탁한 소리가 날 정도로 강했다. 김정재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악!”

“너는 영웅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도록 해.”

“…… 저는 영웅이 되기 위해 태어났어요?”

“그렇지. 네 아비가 누구더냐?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영웅이라 부르지 않냐.”

김정재의 아버지?

처음 듣는 이야기다. ‘멸망의 땅’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언급되지 않은 부분이다.

이야기가 점점 흥미로워진다.

자칭 ‘여는 자’이자, 이 게임 속 영웅이라 불리는 사나이의 아버지.

‘누굴까?’

김정재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

백발의 할아범은 꿀밤을 먹인 것이 미안했는지 괜히 헛기침하며 말했다.

“정재야, 너 또한 네 아비와 같이 영웅이 될 수 있다. 그때까지 조금만 더 참고 강해지도록 해.”

“…… 알겠어요.”

김정재의 마지막 대답을 끝으로 다시 새하얀 연기가 커튼을 쳤다.

시스템이 김정재의 아버지에 대해 언급을 했다면 분명 스토리와 어떠한 연관이 있을 텐데.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답을 찾기 위해 사색에 잠겼다.

‘……’

다음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 계속해서 생각해 보았지만, 전혀 모르겠다. 아직 내게 보여주지 않은 다음 장면에 답이 있으려나?

쉬이이익-!

안개가 걷히며 낯익은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하늘에는 자동차들이 날아다니고 땅에는 각종 동물과 곤충을 닮은 로봇들이 일하고 있다.

김정재가 그사이를 백발의 할아버지와 걸으며 대화했다.

“여기가 메카니아라는 곳이에요?”

“그래, 이 근처에 네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말해준 악마가 숨어 있지.”

“악마….”

“이제 곧 내 말을 믿게 될 게다. 네가 영웅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

김정재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백발의 할아버지를 보았다.

“흐음….”

둘은 메카니아를 가로질러 커다란 기계 문을 넘었다. 밖으로 나오자 도시 안과는 전혀 다른 숲이 그들을 반겼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나무를 헤치며 나아가자 낭떠러지가 나왔다.

산기슭이라 생각했던 메카니아는 사실 이 산의 꼭대기에 있었다.

자칫 잘못해서 떨어지면 즉시 사망할 정도로 높은 절벽이다.

김정재가 백발의 할아버지 옆으로 바짝 붙으며 물었다.

“기, 길이 더 없는데요.”

“…… 있다.”

“예?”

“나를 따라오너라.”

백발의 할아버지가 두 눈을 감더니 망설임 없이 허공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소년 김정재는 순간 할아버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

“…… 응?”

“뭐 하냐? 안 따라오고.”

김정재는 두 눈을 비볐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자신 앞에서 일어났다.

할아버지가 하늘을 걸어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 할아버지.”

“왜?”

“어떻게 하신 거예요?”

“뭘?”

“…… 지금 하늘을 날고 있잖아요!”

다시 보아도 할아버지의 발밑으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이 강하게 한 번 불면 밑으로 떨어질 것 같이 말이다.

소년은 겁을 먹었다.

그와는 다르게 할아버지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건 네 눈에 이 길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 거지.”

“…… 길이요?”

“그래, 너도 두 눈을 감아라. 그리고 내 허리춤에 손을 얹고 따라오도록 해.”

“……”

“알겠냐?”

“……”

김정재를 보니 겁을 먹은 눈초리다. 그가 망설이자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뭐 해?! 안 따라오고.”

“아, 알았어요!”

김정재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할아버지의 허리를 잡았다. 그리곤 그와 함께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늘을 걸어 반대쪽 산을 향해 걸었다. 걷는 내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김정재가 비명을 질렀다. 할아버지는 그의 모습이 우스운 듯 킥킥대며 앞을 향해 나아갔다.

“됐다. 도착했다.”

“이제 눈 떠도 돼요?”

“그래.”

김정재가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오…. 이건 또 뭐지?’

그들이 도착한 산에는 큰 구멍이 있었다. 거인이 들어갈 만한 정도로 큰 공간은 아니었는데, 마치 곰 같은 커다란 야생 동물이 살 것 같았다.

“따라오너라.”

“…… 네.”

김정재가 백발의 할아범 뒤를 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강력한 기운이 느껴진다.

근래에 느껴본 사악한 오라다.

‘뭐지?’

나도 그들을 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가는 내내 불안한 기운이 주변을 감싸 안았다.

이 정도로 불길할 정도면 보통 인물이 아닌 것 같은데.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동굴의 끝에 도착했을 때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 루시퍼!’

사지가 찢어진 채로 팔과 다리에 쇠고랑이 채워져 있는 루시퍼가 있다.

놈의 주변으로 수십, 수백 장의 노란 부적이 사방에 붙여져 있었으며,

아무도 접근할 수 없도록 결계가 쳐져 있는 철창이 감옥처럼 놈을 가두고 있었다.

백발의 할아버지가 그 앞으로 가더니 손을 뻗었다.

치직! 소리와 함께 그의 손이 튕겨 나왔다.

“크윽….”

“할아버지!”

“괜…. 찮다.”

“방금 그게 뭐예요?”

“…… 결계. 내가 예전에 말한 누군가를 봉인하기 위해 만든 장치 중 하나다.”

“결계….”

김정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이 능력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해 보였다.

“정재야, 네가 이 결계를 풀어야겠구나.”

“…… 저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군데요?”

누가 보아도 심상치 않은 인물. 오라를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육감적으로 느낄 수 있는 살기다.

“너를 영웅으로 만들어 줄 사람이지.”

“저를 영웅으로 만들어 줄 사람?”

“그래, 과거에 네 아비도 저분 덕택에 영웅이 되었단다.”

“…… 저희 아버지가요?”

백발의 할아버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고말고. 결계를 푸는 방법은 기억나지?”

“…… 기억나요.”

소년 김정재가 백발의 할아버지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결계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가 옷의 안주머니에서 짤막한 단검을 꺼내었다.

‘롱기누스인가?’

내가 김정재 가까이 다가가 검을 확인했다.

맞다.

롱기누스다.

신의 아들, 예수의 피가 묻어 있는 신화 속 물건 중 하나.

“…… 할아버지.”

“왜?”

“정말 결계를 풀어요? 저…. 이상하게 무서워요.”

“무서워할 게 뭐 있냐! 빨리 풀어라. 그래야 네가 영웅이 되어 네 아비를 죽인 놈들에게 복수할 거 아니냐!”

“……”

김정재가 망설였다.

백발의 할아버지가 그를 떠밀 듯이 윽박질렀다.

단검을 바라보며 숨을 천천히 쉬던 김정재.

그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결계를 향해 단검을 던졌다.

쉬익-!

단검이 빙글빙글 돌며 날아갔다. 김정재가 두 팔을 앞으로 향해 뻗고 주문을 외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하나 되어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여 주소서….”

단검이 결계에 부딪쳤다.

동시에 폭발이 일며 굉음이 났다. 회색 연기가 동굴에 가득 찼다. 바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옇다.

나는 연기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앞에서 루시퍼의 봉인이 풀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크으으으…. 이 얼마 만인가….”

갈기갈기 찢어진 놈의 피부가 순식간에 재생되었다. 손과 발을 묶고 있던 쇠고랑이 박살나고,

노란 부적들이 새까맣게 불탔다.

루시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발 할아버지의 몸이 뒤틀리더니 가죽이 벗겨지며 그 안에서 사탄이 비열한 웃음을 뱉으며 나왔다.

어리둥절한 김정재가 그들을 보며 떨었다.

루시퍼는 쓰러져있는 소년 김정재를 발견하더니 천천히 걸어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 고맙다. 내가 너를 이 세계의 영웅으로 만들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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