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저택으로 돌아온 우리를 반긴 것은 정비를 마친 장비들이었다. 불카누스가 각자의 방 앞에 깔끔하게 깔아 놓았다.
내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갑주를 들었다. 생각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번보다 훨씬 가벼워져 사용하기 편했다.
관절 부분들도 움직임이 더욱더 자연스러워졌다.
“수고했다. 불카누스.”
“감사합니다. 열심히 했습니다.”
마정우와 마이클도 만족스러운 눈치다. 불카누스의 제련 솜씨는 이 게임 내에서 최고니, 불평이 나올 리가 없었다.
유소라가 기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천재 씨, 제 옷은 좀 많이 바뀐 것 같은데요?”
외관이 바뀐 유소라의 간호사 전용 의상. 검은 간호사복에 허리춤에는 커다란 주사기 모양 권총이 있었다.
“멋지네요. 그 총 나가는 거예요?”
“모르겠는데 한 번 쏴볼까요?”
“예, 저 새끼한테 쏴보세요.”
내가 불카누스를 가리켰다. 놈이 겁먹은 표정으로 떨며 말했다.
“아, 안됩니다! 그 총은 공격용이 아닙니다.”
“뭐? 그럼 뭔데.”
“저번에 보니 주사기를 통해 강화 능력을 사용하시길래, 한 번에 여러 방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강화 능력을 부여한 악세사리를 만들어 봤습니다.”
“악세사리?”
“예! 그 주사기를 들고 스킬을 사용하시면 안에 충전될 겁니다.”
“……”
내가 저런 물건을 만들라고 했었나? 라는 생각과 함께 불카누스를 혼내려다 말았다.
재료 낭비라 생각되었지만, 어차피 만들어진 물건. 잘 사용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되었다.
유소라도 좋아하고 있으니 괜찮겠지 뭐.
철컥.
모든 아이템 착용을 마친 마정우가 불카누스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이 새끼 완전 물건이네. 도끼랑 갑옷이 엄청 가벼워졌어.”
“하핫, 무겁고 방어력이 낮은 부분들은 크레이프 가공법으로 얇게 썰어 수십, 수백 장으로 덧대었습니다.”
“그럼 방어력은 그대로인 건가?”
불카누스가 윙크하며 마정우의 갑주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가벼워졌지만 금붙이의 양이 많아져 방어력이 높아진 갑주가 있다? 없다?”
마정우가 환하게 웃으며 녀석의 머리통을 쳤다.
팍!
“있다!”
“없다!”
“…… 뭐?”
“죄송합니다. 사실 가벼워지기만 하고 방어력은 조금 내려갔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정우가 도끼를 강하게 쥐며 그에게 말했다.
“아니,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너 또라이냐?”
“자, 장난이었습니다. 흥분하지 마십쇼.”
“아니…. 하….”
“방어력은 정말 소폭 내려갔습니다. 대신 엄청나게 가벼워졌으니 전투에는 훨씬 유리할 겁니다.”
정우가 녀석을 한 대 더 때리려다 말고 머리를 긁적였다.
“후우…. 만드느라 고생했다. 다음부터는 이상한 말장난 하지 마라.”
“예….”
나는 모두를 보며 어떠한 점이 바뀌었는지 체크했다.
추가된 능력만큼 앞으로의 전투에서 어떠한 작전으로 움직일지 생각해야 하니 말이다.
우선 유소라가 충전식 주사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 스킬 믹서의 역할을 하는 물건인 것 같은데, 내 예상이 맞다면 저 물건을 통해 세 가지 주사를 동시에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부작용이 얼마나 클지는 모르겠지만….
“소라 씨, 주사기 세 종류 전부 사용해보시겠어요?”
“지금요?”
“예.”
유소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사 스킬을 순서대로 사용했다.
빨강, 노랑, 파랑.
세 가지 색상이 불카누스가 만든 커다란 주사기 안에 모여 휘몰아쳤다.
서로 섞이지는 않았다.
다만 세 가지 능력을 동시에 투입할 수 있는 건 알게 되었다.
“천재 씨, 총 세 명까지 투여할 수 있다고 나와 있어요.”
“…… 그래요?”
“예.”
“그럼 한 번 사용해보세요.”
내가 손을 뻗었다.
정우와 마이클도 손을 뻗었다.
유소라가 순서대로 주사를 놔주었다. 앞서 바늘로 몸을 뚫고 주입해야 하는 것과는 다르게, 그저 피부 위에 올려놓고 방아쇠만 당기면 되었다.
[‘유소라’ 플레이어로부터 세 가지 속성의 피를 수혈 받았습니다.]
[제천대성(齊天大聖), 천봉원수(天蓬元帥), 권렴대장(卷簾大將)의 힘을 동시에 부여받습니다.]
[활성화 시간: 160분]
근육이 팽창해지며 덩치가 한 층 커졌다. 가슴속이 뜨겁다. 그와는 반대로 피부는 시원하게 느껴졌다.
‘천봉원수….’
삼장의 힘이 사라지고 하늘의 강을 지키는 사령관 중 한 명인 저팔계, 천봉원수가 설명에 추가되었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 굉장해.”
* * * * *
준비를 마친 우리는 메카니아로 돌아왔다. 도시의 하늘이 푸르게 변하고, 땅에는 시멘트 사이로 잔디가 자라날 정도로 풍토가 좋아졌다.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활기를 띠고 있다. 마을 주민들이 모두 뛰쳐나와 우리를 반겨 주었다.
-김천재 님이 돌아오셨다!
-선생님…. 선생님 덕분에 저희가 잘 살고 있습니다.
-다들 뭐해? 강대원 님 안 찾아오고!
서둘러 움직이던 군인들이 강대원을 찾아 우리에게 데려왔다. 그동안 바쁘게 지내왔는지 수염을 자르지 못해 덥수룩한 상태의 강대원이 찾아왔다.
“어! 어! 오셨습니까!”
그가 달려와서 내게 안겼다.
나는 그를 내려보며 물었다.
“잘 지내셨나요.”
“예, 덕분에 이 도시가 다시 태어났습니다.”
“다행이네요.”
“천재 씨도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요.”
우리의 대화를 듣던 김연희가 이빨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를 내었다.
잘 못지냈다는 표현을 하려는 것 같은데, 내가 손가락을 휘저어 그녀의 입을 다물게 했다.
“에이도스는 일을 잘 수행하고 있나요?”
“그럼요! 제 염려와는 다르게 모든 일을 잘 처리하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사실 저희가 떠난 후에 에이도스가 폭주할까 싶어 걱정 많이 했거든요.”
“허허…. 그런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맞지, 에이도스?”
[‘에이도스’가 김천재 님의 그룹이 돌아온 것을 환영합니다.]
땅에서 홀로그램 여성이 튀어나오며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실체가 없는 시스템으로서는 최대의 예우를 갖춘 것이라 생각된다.
나는 에이도스의 앞에 서서 물었다.
“일은?”
[‘처리 완료’ 상태입니다.]
“…… 잘했어.”
대충 둘러보아도 지금의 메카니아는 완벽한 방어시스템을 갖추었다.
내가 오기 전보다 훨씬 많은 로봇 기체들과 컨트롤 타워만큼 단단해 보이는 방어 시설들이 곳곳에 있었다.
“대공 미사일을 좀 더 늘려야 할 것 같은데.”
[‘에이도스’가 김천재 님의 명령을 인지합니다.]
[건설 로봇에게 대공 미사일 터렛 작업을 지시합니다.]
내가 에이도스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녀석도 나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AI 주제에 사람의 기분을 따라 하다니.
‘귀여운 놈.’
“총독, 저희는 이만 자리를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강대원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총독이라니요. 저는 그저 이들의 대표로 도시를 바꾸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씨익 미소를 지어 그에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럼, 대표님. 저희가 바빠서 먼저 움직이도록 하지요.”
“바로 이동하셔야 합니까?”
“예. 오늘은 이곳에 볼일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라, 저기 저-”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있는 붉은색 게이트. 메카니아의 중앙에 있는 컨트롤 타워 앞에 못 보던 게이트가 생겼다.
강대원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내게 물었다.
“저게 어디로 연결된 게이트인지 아십니까?”
“예.”
“…… 그렇군요.”
“아저씨도 알고 계신가요?”
“그럼요. 천재 씨가 오기 훨씬 전, 저희에게 구세주라 불린 자가 나타났던 게이트지요. 갑자기 사라져서 어디로 갔나 했는데…. 얼마 전 다시 나타나더군요.”
구세주.
하긴 대천사들이 인간의 구세주이긴 하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그에게 말했다.
“악마들이 이곳을 다시 찾아올 거예요.”
“…… 언제입니까?”
“그건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일주일 이상은 걸리지 않을 거예요.”
“일주일이라….”
“제가 이곳을 떠나면, 바로 도시 전체를 비상경계 체제로 전환하세요.”
강대원이 비장한 표정으로 내게 대답했다.
“…… 알겠습니다.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그럼 저희는 이만….”
내가 그룹원 모두에게 손짓했다.
우리는 한둘씩 게이트를 넘어 천국으로 향했다. 메카니아의 주민들이 손을 흔들어 배웅해주었다.
* * * * *
[‘김천재’ 님의 그룹이 천국에 입장합니다.]
[‘불타는 지옥-2’으로 향하는 게이트가 ‘성스러운 회랑’에 열립니다.]
[성스러운 존재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마동석’이 활성화됩니다.]
[마동석의 힘을 받은 천사들이 전투 준비를 마칩니다.]
성스러운 회랑으로 이동하자 만반의 준비를 마친 천사들이 보였다.
여름 하늘을 가득 메운 잠자리만큼 셀 수 없이 많았다.
내가 그들 사이에서 미카엘을 찾았다.
“미카엘.”
“…… 왔구나.”
“출발하는 건가요?”
“너희들이 오면 바로 출발하기로 했지. 준비는 되었나?”
내가 그룹원들을 한 번씩 둘러본 후 대답했다.
“예.”
“그럼…. 라파엘! 우리엘!”
건장한 여성 모습의 두 천사가 우리 옆으로 날아왔다.
먼저 도착한 라파엘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불렀어?”
“인간들이 돌아왔다. 저들은 네가 통솔하도록 해라.”
“오…. 알았어.”
뒤늦게 도착한 우리엘이 미카엘에게 물었다.
“나는 왜?”
“너는 나머지 천병들을 이끌고 지옥으로 향한다. 라파엘을 따라가기만 하면 돼.”
“너는?”
“나는 메타트론이 회랑 결계를 완성 시키면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우리엘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근데 다른 천사장들은 전부 어디에 있는 거야?”
미카엘이 숨을 길게 내뱉으며 짜증 섞인 소리를 내었다.
“미리 출발한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은 회랑을 지키고 있겠다고 하더군.”
“회랑을…. 지켜? 메타트론과 결계가 있는데 뭐 하러 회랑을 지켜?”
“……”
“아니! 가브리엘을 구출하자고 할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그런데?”
“막상 신마대전 때를 회상하면 다시 싸우고 싶지 않겠지.”
“빌어먹을 녀석들이….”
우리엘, 역시 천군 중 제일 우악스럽다는 대천사답다. 거친 입담과 몸짓에서 그녀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우리엘이 창을 머리 위로 높이 들더니 천군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전 병력 집결한다!”
그녀가 명령하자 하위 천사들이 밀집 대형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준비를 마친 우리엘과 라파엘이 지옥으로 향하는 게이트 앞으로 향했다. 우리는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천군의 제일 뒤쪽에 줄을 서게 되었다. 나는 출발하기 전 유소라에게 물었다.
“소라 씨.”
“네?”
“혹시 어제 스펙터를 만나셨나요?”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 그렇군요.”
“왜요?”
“곧 있으면 녀석이 소라 씨를 찾아 갈 거예요. 그때가 되면 저에게 다시 알려주시겠어요?”
“…… 그럼요, 바로 알려드릴게요.”
내가 사람 좋은 미소로 유소라의 등을 툭 쳤다.
“고마워요.”
위이이이잉-
게이트가 열렸다.
천사들이 지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일 없이 지나가게 된 열 번째 라운드와는 다르게
열한 번째 라운드는 큰 전투가 기다리고 있다. 일반적으로라면 일곱 번째 라운드보다 이번 라운드가 난이도는 더 낮아야 하지만,
나로 인해 바뀐 스토리 흐름에서는 그러지 않을 것 같다.
‘벨제붑의 상태가 달라졌으니….’
나는 천사들을 따라 지옥으로 가는 게이트에 몸을 담았다. 다시 가기 싫은 곳이지만, 이번만 가면 되니깐….
스으으윽.
따뜻한 물결을 가르고 지나가는 느낌이다. 정우와 김연희가 바로 내 뒤를 따랐다. 유소라와 마이클이 그 뒤로 천천히 들어왔다.
우리는 그렇게 천사들을 따라 다시 지옥으로 들어왔다.
‘……’
천사와 악마.
두 종족을 멸살시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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