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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노효만’의 과거를 시청하시면 멸망의 땅이 시작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선택에 신중을 가해주시기 바랍니다.]

‘NO’를 선택하려던 내 손가락이 멈추었다.

노효만의 과거에서 멸망의 땅이 시작하게 된 이유를 알 수 있다고?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됐다. 선택에 신중을 가해달라는 말은 이 장면은 다시 볼 수 없다는 말.

나는 잠시 망설였다.

녀석의 과거를 보며 시간을 허비할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스킵하고 노효만을 처리할 것인지.

둘 중 무엇을 하더라도 노효만이 죽는 결과는 똑같다.

‘그래.’

어차피 결과가 똑같다면 녀석의 과거를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내가 모르는 스토리에 대해서.

[YES]

나는 좌측 홀로그램 버튼을 눌렀다. 갑자기 공간이 일그러지며 다시 하얀 안개 커튼이 쳐졌다.

[이어서 ‘노효만’의 과거를 시청하시겠습니다.]

[이제부터 펼쳐지는 화면은 ‘멸망의 땅’이 시작하게 된 이유니 집중해서 봐주시기 바랍니다.]

“…… 그래.”

촤르르륵!

안개 커튼이 강하게 열리며 굳센 얼굴의 노효만이 보였다. 그의 견장이 중위에서 대위로 바뀌었다.

이번에 보이는 장면에는 그는 더이상 어리숙한 바보가 아닌 거 같다.

“부대- 차렷!”

그의 외침에 도깨비부대의 대원들이 바짝 긴장한 상태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이어 김준철이 단상에서 내려와 그들을 보았다.

“이번 훈련도 전 병력 수고 많았다. 너희들이 이번 훈련에서 대항군을 잡은 덕분에 여단장님이 칭찬을 아주 많이 하셨다.”

-감사합니다!

“작전 과장, 자네도 수고 많았어. 이번 훈련 준비를 아주 철저히 했더군.”

노효만이 기쁜 표정으로 소리쳤다.

“단! 결!”

그의 경례를 받은 김준철이 부대원들을 한 명씩 살피며 연병장을 지나갔다.

모두가 존경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노효만 또한 아까 전과는 다르게 김준철을 향한 충성심이 보였다.

물론 연기겠지만 말이다.

모두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노효만의 옆으로 날아가 그의 독백을 들었다.

“후우…. 힘들다. 빨리 씻고 자야지.”

힘든 훈련을 마친 것 같은데, 방탄모를 벗은 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뿌듯해하는 그의 표정을 보니 사람이 많이 바뀐 것 같다.

막사로 돌아온 노효만이 지휘통제실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전 병력 금일 열한시까지 라면 취식을 허가하도록 한다. 취사병한테 말해서 밥 지어 놨으니까 필요한 사람은 밥솥에서 알아서 퍼먹어라.”

환호가 들렸다.

-우워어어어!

“이번 훈련도 다들 수고했다. 푹 자고 내일 아침에 보자.”

노효만이 마이크 버튼을 끄더니 당직 사병에게 말했다.

“오늘 당직 사관이 누구지?”

“주임원사입니다.”

“주임원사가 당직 사관을 서?”

“그렇습니다. 본부대장님께서 직접 명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그래?”

노효만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굳은 표정으로 당직 사병을 쳐다보던 그가 천천히 얼굴을 풀며 환하게 웃었다.

“알았다. 그럼 나는 이만 관사로 돌아가도록 하마.”

“수고하셨습니다!”

대화를 마친 노효만이 막사 밖으로 나왔다. 그는 가벼운 걸음으로 소나무 숲길을 지나 관사로 들어왔다.

어둠에 가려진 회색 아파트 여러 채, 그중 제일 끝에 있는 건물에 노효만이 들어갔다.

신축 관사치고는 벽면이 꽤나 오래되어 보이는데, 좋은 자리를 배정받지 못한 것 같았다.

달칵.

노효만이 열쇠를 돌려 집 문을 열었다. 현관 등이 켜지며 그를 비추었다.

천천히 전투복을 벗으며 집 안으로 들어간 그가 세탁기 앞에 모든 옷을 던져버렸다.

“후우.”

그가 소파 위에 그대로 누웠다.

TV를 틀자 YTM 뉴스가 나왔다. 여느 때와 같이 그날의 사건 사고를 중계해주고 있다.

노효만이 팔뚝 하나를 올려 두 눈을 가리더니 작게 속삭였다.

“빌어먹을.”

응?

조금 전까지 기분이 좋아 보이던 노효만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마치 그의 몸속에 또 다른 인격이 들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아까 그 새끼 언덕 밑으로 밀어 버리라고 했잖아? 왜 안 민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었고, 녀석을 죽였으면 내가 이곳에 올 수 있었어. 대체 왜? 왜?! 왜!! 왜 자꾸 내 말을 듣지 않는 거야 이 병신아!”

“……”

뭐지?

드디어 단단히 돌아버린 건가.

노효만이 연극을 하는 것처럼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고 있다.

질문하는 쪽은 어디선가 들어본 말투인데, 머리에 딱 떠오르지는 않는다.

‘누구지….’

“후우…. 노효만, 내가 너 작전 과장 자리까지 갈 수 있게 도와줬지?”

“응….”

“그럼 너도 나를 도와야 할 거 아니야? 더 높이 가고 싶지 않아? 작전 과장이 아니라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더 올라가 장군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계속 작전 과장만 하고 싶어?”

노효만이 고개를 떨구었다.

“아니….”

“그럼 다음에는 내 말을 듣도록 해. 내가 이곳으로 올 수 있도록 점찍은 놈을 죽이도록.”

“……”

“대답 안 해?”

한참을 망설이던 노효만의 순한 인격이 대답했다.

“알았어….”

내가 녀석들을 보며 손뼉을 쳤다.

‘그렇구나!’

지금 노효만의 몸속에 있는 두 개의 인격 중 하나는 루시퍼다. 목소리가 전부 노효만이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잔뜩 화가 난 듯한 루시퍼의 특유 억양에서 알 수 있었다.

대화가 끝나자 안개 커튼이 쳐졌다. 벌써 세 번째인데 언제까지 이런 장면을 보여 주려는지 모르겠다.

촤르륵- 소리와 함께 안개 커튼이 펼쳐졌다. 이번에는 너무나도 빠른 화면 전환이라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 흐음.’

시커먼 밤,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숲속이다. 정확하게 어디 산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노효만은,

살인자다.

“작전 과장님, 정말 이 근처에 거수자가 나온 것 맞습니까?”

두 명의 군인이 천천히 양옆을 관찰하며 걷고 있다.

“김진원 하사.”

“예?”

김진원 하사가 고개를 뒤로 돌리는 순간,

탕!

총성이 울렸다.

그를 따라온 또 다른 부사관이 깜짝 놀라 노효만을 보았다.

“무, 무슨 일-”

탕!

또다시 총성이 울렸다.

노효만이 쓰러진 둘을 보며 천천히 심호흡했다.

“하아…. 하아….”

그가 울었다, 웃기를 반복하며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잘했어, 노효만.”

“이,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우선 저기 저 김진원이라는 녀석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서 땅에 원을 그려.”

노효만이 땅에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 안에 삼각형을 두 개. 하나는 역방향으로 그려서 별을 만들고.”

“…… 그다음?”

“그 위에 녀석의 시체를 올려라.”

대화를 들어보니 루시퍼 녀석이 노효만의 몸을 직접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아…. 하아…. 올렸어.”

“잘했어. 그럼 이제…. 녀석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어라. 그 후에는 내가 알아서 하지.”

노효만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조차 못 하는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김진원의 이마 위에 올려놓았다.

준비를 마치자 루시퍼의 억양을 가진 자가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나 여기 맹세한다. 찬란한 성역의 구세주, 칠흑 같은 어둠의 창조자시여. 당신 앞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어리석은 자들에게 어둠을 보여 주도록….”

부우우우웅-

주변에 강풍이 몰아쳤다. 사악한 얼굴의 노효만이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어두운 오라가 주변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갑자기 주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한 어둠이 사방을 감싸 안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노효만과 김진원만이 남았다.

시간이 흐르자 어둠이 점차 사라지고. 달빛이 주변을 비추었다.

“…… 수고했다, 노효만.”

총에 맞아 죽었던 김진원이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효만이 어버버거리며 그를 보았다.

“어…. 어!”

“덕분에 이 세계로 올 수 있었어.”

“너, 너는.”

“그래, 나다. 루시퍼.”

김진원이 땅에 떨어져 있는 소총을 줍더니 노효만을 겨누었다. 노효만이 두 손을 저으며 공포에 떨었다.

“제발 그러지 마.”

“다 너를 위해서 이러는 거야. 지금 내가 사라져야 네가 살 수 있어.”

“그게 무슨-”

“오늘 일어난 살인은 전부 내가 저지른 거다. 너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하도록 해. 내가 너를 위해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탕!

“크악!”

총에 맞은 노효만의 비명과 함께 주위의 공간이 깨지며 쏟아져 내렸다.

순식간에 다른 화면이 보였다.

백색의 공간 안에 오박사와 노효만이 서로를 보며 앉아있다. 불안한 모습의 둘.

오박사가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노효만에게 말했다.

“너무 위험해.”

“박사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자네도 알다시피 김준철 소령은 이 연구를 반대하고 있어. 진행시키다가 그에게 걸리면 나는 물론 자네도 죽게 될 거야.”

대화를 들어보니 개조 좀비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기 전으로 보인다.

이 게임에 고인물인 나도 모르는, 생각보다 흥미로운 이야기다.

“…… 저는 죽어도 괜찮습니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된다면 모든 책임은 제가 지도록 하지요.”

노효만의 단호한 태도에 오박사가 난처한 표정을 취했다. 현 상황에서 김준철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은 생존권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 연구를 지속시키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 죄를 씻기 위해섭니다.”

“죄를 씻어?”

“예…. 이 바이러스의 원흉. 그 녀석을 탄생시킨 주범이 접니다.”

오박사가 깜짝 놀라며 손뼉을 쳤다.

“자, 자네가 이 Z바이러스를 만들었다는 말인가?”

“그건 아닙니다. 다만 그 원흉을 제가 이 세상에 나오도록….”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진다.

대화 소리가 작아지며 둘의 모습이 가려졌다.

‘…… 그런 건가.’

내가 알고 있던 노효만의 스토리랑 조금 다르다. 물론 오늘의 이 장면을 보지 않았다면 알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노효만과 오 박사가 X 바이러스와 개조 좀비를 만든 이유가 루시퍼를 잡기 위해서였다니.

그저 Z 바이러스의 대항마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일인자의 자리를 노리는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전개다.

[‘노효만의 숨겨진 스토리 영상’ 이 종료 됩니다.]

화면이 점점 밝아진다.

영상 속으로 들어가기 전이다.

아레스가 노효만을 마무리 짓기 일보 직전이다. 그들을 확인한 내가 소리쳤다.

“스톱!”

부우웅-

바람을 가르던 아레스의 창끝이.

스윽.

노효만의 이마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 왜지?”

아레스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잠깐, 놈과 대화를 해야겠다.”

“……”

“노효만, 일어나.”

개조 좀비로 변한 노효만이 피 섞인 침을 뱉더니 내게 말했다.

“같잖은 동정 따윈 필요 없다.”

“동정이 아니야. 정말 네게 묻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나와 노효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나를 증오하는 듯한 그의 눈빛, 내가 눈에 힘을 풀며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라.”

“……”

노효만이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이렇게 ‘멸망의 땅’ 과거에 대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곧 망자가 될 노효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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