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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벙커 내부로 들어가자 김준철 소령이 우리를 반겼다. 문 앞까지 한걸음에 달려 올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하긴 열 번째 라운드까지 클리어한 플레이어니 인간 측 메인 NPC 입장에서는 얼마나 반갑겠는가.

“김천재 씨!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소령님도 잘 지내셨나요?”

“예, 천재 씨 덕분에 아주 잘 지내고 있지요.”

“허허….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네요.”

인사를 마친 우리는 김준철 소령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와 컵 몇 개를 가져오더니 우리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메카니아에서 일은 작전 과장으로부터 보고받았습니다.”

“…… 뭐라고 하던가요?”

김준철이 멋쩍은 표정으로 이마를 긁었다.

“그쪽에도 감염자가 나왔다며 도와줘야 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도와줘야 한다고요?”

“예, 주민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령님.”

“말씀하십시오.”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

“혹시 작전 과장이 보고하는 말들을 전부 믿고 계십니까?”

내 질문에 그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어떠한 의도로 이런 말을 했는지 김준철도 이해했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전부 믿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그와 적대적인 관계가 될 것 같아요.”

“…… 이유를 알 수 있습니까?”

나는 작전 과장이 숨기고 있는 사실들을 하나씩 풀어놓았다.

증거가 없어 지금까지는 이야기하지 못했다는 말을 필두로 오 박사와 작전 과장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꾸미고 있는 일들.

우귀가 있는 연구실에서 만들어진 개조 좀비부터,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들어 창조의 영역에 나서려는 오 박사의 계획.

그리고 그와 손을 잡고 연구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메카니아에 바이러스를 퍼트린 사실까지 전부 말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김준철의 표정이 굳었다.

“혹시 제게 해주신 이야기의 증거는 있으십니까?”

“바이러스가 담겨 있던 주사기, 이것과 근처 던전에서 발견된 개조 좀비의 혈액. 그리고 연구소가 설치된 장소의 위치. 제가 파악하고 있는 것은 요 정도예요.”

“흐음….”

“제가 지금 소령님에게 해드린 이야기들은 전부 증거가 부족한 추측에 가깝습니다.”

“……”

나는 작전 과장이 바이러스를 담았던 주사기를 흔들어 보여주며 말했다.

“근데 그 추측이 현실이 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시겠지요?”

“천재 씨.”

“예.”

“저는 천재 씨의 말을 믿고 있습니다. 앞서 메카니아에서 먼저 도착한 작전 과장이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무슨 말이요?”

“천재 씨와 그 일행이 자신과 그곳에 파견한 군인들을 위협했다고요.”

“……”

역시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는 쏙 빼놓고 했구나.

내가 해명하려 하는 순간 김준철이 먼저 말을 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날, 저는 이 벙커 안으로 들어와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천재 씨가 대체 무슨 이유로 우리를 공격하려 했을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나?”

“……”

“제 머릿속에 그 답은 단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우리 쪽에서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천재 씨는 절대로 저희를 공격하지 않는다. 그럴 만한 이유도 없고요.”

다행이다.

김준철이 꽉 막히고 보수적인 생각만을 하는 자였다면 작전 과장의 말을 믿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히도 생각이 깨어있는 자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수긍했다.

“저를 잘 알고 계시는군요.”

“덕분에 목숨이 붙어있으니까요.”

“그럼 제 말을 전부 믿어주시는 건가요?”

“……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전부 믿고 있다고는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작전 과장이 제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부분은 확실하게 알겠습니다.”

그 부분만 알더라도 내게는 큰 수확을 가진 대화가 되었다. 대화의 흐름이 내 쪽으로 기울었다.

이제 오 박사와 작전 과장은 신뢰를 잃었으니, 김준철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기는 힘들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제가 이곳에 온 목적은 소령님이 그들에게 배신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니까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준철이 어른에게 인사하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마움의 표시를 할 줄 아는 멋진 남자다.

나는 그에게 맞인사를 한 후 벙커 밖으로 향했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천재 씨.”

“예?”

“생각해보니 작전 과장이 최근 위병소에 보고 없이 마을 밖으로 나간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마을 밖으로요?”

“예, 시간과 그가 움직인 동선을 추적해보니 대경성에 들렀다고 하더군요.”

“대경성?”

작전 과장이 굳이 그곳에 갈 이유가 있나? 경매장과 박물과 밖에 없는 장소인데 말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경성에는 왜 간 걸까요?”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그쪽으로 가게 되신다면 한번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 그건 소령님이 직접 알아보는 게 더 빠르지 않나요? 거기에도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을 텐데요.”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그쪽에서는 작전 과장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보고하더군요. 작전 과장, 본인도 완강하게 다녀온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가 대경성에 들른 사실은 어떻게 아신 거죠?”

“근래 작전 과장의 움직임이 수상해서 그에게 사람을 붙여 놨습니다.”

“아….”

“분명 대경성에 간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부인하더군요.”

“부인하는 이유는 알고 있으시고요?”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대경성에 진입하는 순간 어딘가로 몸을 감추었다던데, 그도 특전사 출신이라 몸을 숨기는 솜씨가….”

작전 과장이 대경성에 드나들고,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수상한 냄새가 짙게 풍겨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김준철에게 대답했다.

“우선 알겠습니다. 마침 대경성에 갈 일이 있었는데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 * * * *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는 것처럼 하늘에 큰 구멍이 생기며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천사들이 강림할 것만 같은 분위기다. 그 모습을 본 플레이어들이 환호했다.

저 빛은 같은 서버에 있는 누군가가 열 번째 라운드를 열면 생기는 전조.

즉, 저들에게 이곳에서 나갈 희망이 생겼다는 말이다.

-우와아아! 누가 열 번째 라운드에 도착했나 봐!

-그럼 우리도 곧 이 게임에서 나갈 수 있는 건가?

-아니지, 게임을 끝낸 사람들만 나갈 수 있는 거 아니냐?

-아닐걸! 마지막 라운드는 분명 모든 플레이어가 전부 참가한다고 했었어.

마이클이 다른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우쭐거렸다. 우리가 한 일들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내가 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장비가 없는 동안에는 조용히 지내야 해.”

“…… 알겠어요우.”

마을 광장에 모인 우리는 금화를 던져 그날의 운세를 보았다.

[소흉(小凶), 난흉(亂凶), 대흉(大凶). 일생일대의 큰 고비가 당신을 찾아옵니다.]

“…… ”

뭐?

나는 다시 한번 동전을 던져 보았다. 결과는 아까와 같았다.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마정우, 내 운세가 너무 안 좋은데?”

“…… 뭐라는데?”

“일생일대의 큰 고비가 나를 찾아온대.”

정우가 피식 웃었다.

“큰 고비라…. 그게 뭘까?”

“나도 모르지.”

“그래서 대경성에는 안 갈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야지. 내일까지 밀린 일을 전부 처리하려면 시간이 없는데.”

“흐음…. 그럼 나랑 같이 가자. 이곳에서 처리해야 할 일은 소라 씨하고 마이클한테 맡기고.”

김연희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도 있잖아!”

“…… 그래. 쟤도 있고.”

내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너랑 가면 큰 고비가 와도 괜찮겠지.”

“나만 믿어. 내 운세는 최상이거든.”

“뭐라고 나왔는데?”

“‘당신의 운명을 바꿔 줄 귀인이 찾아옵니다.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도록 하십시오.’”

“…… 개꿀이네?”

“개꿀이지.”

우리는 대화를 끝내자마자 광장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제한시간 내에 모든 일을 끝내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와 마정우는 대경성으로 향하고, 다른 인원들은 마을에 남아 다음 라운드에 필요한 물건들을 찾기로 했다.

* * * * *

대경성에 도착한 정우와 나는 곧장 박물관으로 향했다. 빠른 걸음으로 제일 안쪽 방으로 향하자 줄지어 서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이 보였다.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라운드를 건너뛴 내게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신화 급 영웅은 총 세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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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신화)

-신과 인간의 혼혈로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전사 형 영웅.

*아레스(신화)

-남들과는 다른 탁월한 전투 센스에 특수한 스킬을 가진 순수 혈통 영웅.

*아프로디테(신화)

-욕망을 관장하는 여신으로서 애욕을 이용한 현혹술을 사용하는 보조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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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카누스와 대화를 하고 오지 않았더라면 고민에 빠졌을 수도 있는 설명들이다. 하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두 번째 선택지를 바로 골랐다.

[‘신화’등급의 소환수 발견]

[인구수 20에 달하는 ‘신화’등급의 소환 수입니다.]

[‘아레스’를 영입하시겠습니까?]

“예.”

콰지직!

뽀글 머리에 짙은 눈썹을 가지고 있는 아레스 동상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녀석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김천재, 저 녀석이 아레스야?”

“어. 너는 처음 보지?”

“그렇지. 전사 클래스는 이곳에 올 이유가 없으니깐.”

“…… 하긴.”

아레스를 감싸고 있는 동상 조각들이 전부 떨어지자, 그 안에서 붉은 망토와 푸른 갑주를 입은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나를 불렀는가.”

※ 신규 영입: 아레스(전장의 지배자)

레벨: 85

생명력: 1050/1050

마나: 0/0

체력: 100 공격: 85

방어: 85 속도: 85

▶전장의 지배자 (마나 소모: 0)

-아레스의 일반 공격은 필살의 형태로 판정되어 적에게 치명적인 대미지를 줍니다.

*크리티컬 확률 +99.98%

▶끝없는 전투 (마나 소모: 0)

-아군의 사기를 높여 전투를 승리로 이끕니다.

*체력 재생력+50 마나 재생력+50 (1초당)

신화 등급의 영웅치고는 능력치가 생각보다 매우 낮은 편이다.

그런데도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스킬이 말도 안 되는 능력치다.

매 공격이 스킬 수준인 ‘전장의 지배자’와 초당 체력, 마력 회복력이 50이나 되는 ‘끝없는 전투’.

가웨인과 박규환이 가지고 있는 강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나는 고개를 들어 녀석을 보며 말했다.

“내가 너를 불렀다.”

“…… 인간이로군.”

“그래, 깨어난 기분이 어때?”

아레스가 자신의 몸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 든다.”

“그래?”

내가 녀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나는 너의 주인인 김천재라고 한다.”

아레스가 천천히 무릎을 구부리더니 내 손을 잡았다.

“내 주인이라, 나도 만나서 반갑-”

우리가 서로 손을 흔들어 악수하려는 순간,

쾅!

굉음이 들렸다.

[‘작전 과장’ 노효만의 신체 개조를 완료하였습니다.]

[‘김천재’ 님의 그룹, 스토리의 메인 흐름이 변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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