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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 오랜만이야, 스펙터.”

스펙터의 의상이 바뀌었다.

검은 정장 차림에 머리에는 갓을 쓰고 있었다. 마치 저승사자가 생각나는 옷차림새다.

녀석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삼촌, 이제 USB 돌려주세요.”

“그거 소라 씨한테 줬는데?”

“거짓말하지 마시고요. 전부 알고 왔어요.”

“…… 뭘 알아?”

“지금 옷 주머니 안에 있잖아요. 안 주면 죽여서라도 가져갈 수밖에 없어요.”

“나를 죽인다고?”

스펙터가 해맑은 얼굴로 대답했다.

“예.”

순간 공포 때문에 전율이 몸을 스쳐 지나갔다. 벨제붑을 마주쳤을 때의 공포나 메타트론을 보았을 때의 환희와는 전혀 다르다.

시스템상 압도적인 강함. 내가 진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오는 떨림이다.

“너는 나를 죽이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제는 가능해요. 한 번 보여드릴까요?”

설마 녀석의 데이터베이스를 바꾼 건가? 허튼 말을 할 녀석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스펙터는 나를 죽일 수 있다는 말.

“…… 스펙터,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냐?”

“뭔데요.”

“네 뒤에는 누가 있는 거지?”

내 질문에 녀석의 표정이 굳었다.

“제 뒤요?”

녀석이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아니! 배후에 누가 있느냐를 물어본 거잖아.”

“아…. 난 또. 제 배후에 누가 있냐는 건 무슨 말인데요?”

“네게 명령하는 사람. 총 몇 명이야?”

“…… 그건 스스로 알아보세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플레이어가 풀어가야 합니다.”

마지막 대화는 스펙터가 아닌 다른 존재가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킨 후 그에게 말했다.

“됐다. 이거나 가져가라.”

나는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어 스펙터에게 넘겨주었다. 가위에 눌리는 것 같은 상태인데도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놈이 USB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내게 말했다.

“진짜군요.”

“그럼 내가 가짜를 주겠냐.”

“그럴 수도 있죠. 저는 이만 가도록 하겠습니다.”

“어? 그것만 가지러 온 거야?”

“예, USB 찾아서 소라 누나한테 직접 가져다주라고 했어요.”

“누가?”

“그 저번에 말…. 아니다! 아니에요!”

“…… 알았다. 가봐라.”

녀석의 움직임을 보아 시스템을 움직이는 자들이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 같은데.

곧 있으면 우리가 루시퍼와의 대결을 준비해서 그런 건가?

멸망의 땅 최후의 라운드, 인류의 최후를 걸고 싸우는 대격전을 위해.

마지막 라운드는 전 서버의 모든 플레이어가 강제로 참가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최후의 게임을 여는 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끝을 누가 보게 될지는 운영진들 사이에서는 고민거리.

스토리의 전개 속도를 맞추기 위해 놈들이 머리를 쓰기 시작한 것 같다.

대화를 마친 스펙터 녀석이 손을 흔들며 벽 사이로 사라졌다.

망할 놈이 USB 달라고 협박할 때는 언제고 저런 미소를 짓는단 말인가.

‘빌어먹을.’

* * * * *

스펙터가 사라지자 꿈에서 깨었다. 아니, 꿈이 아닌가? 내 주머니에 있는 USB가 사라졌으니 말이다.

“후우.”

이 게임에서 나갈 중요한 정보를 가진 USB를 잃어버렸다. 그 안에는 다른 플레이어에 대한 자료도 저장되어 있는데, 아쉽구만.

침대에서 일어나자 내가 누운 자리 그대로 땀에 젖어 있었다.

나는 옷을 훌러덩 벗어버리고 그대로 샤워했다. 따뜻한 물에 머리를 적시자 그동안의 피로가 훌훌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비눗물을 만들어 내의를 빨고, 갑주를 닦아내었다. 얼룩덜룩해진 갑옷이 말끔해졌다.

“…… 들어와, 불카누스.”

불카누스가 내 방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놈이 벌거벗은 내 몸을 보더니 화들짝 놀랬다.

“저, 저는 그런 취미 없습니다!”

“…… 헛소리하지 말고 이 갑주, 좀 더 가볍게 만들어봐.”

“예?”

“이 갑주, 너라면 더 가볍게 만들 수 있지?”

“…… ”

불카누스가 내 갑주를 들어 무게를 확인했다.

“중 갑옷치고는 꽤 가벼운 편입니다만?”

“더 가벼워야 해. 방어력이 낮아지더라도.”

“…… 흐음, 가볍게 만들 수는 있는데 최상의 조건으로 제작하려면 많은 양의 금과 은이 필요합니다.”

“금과 은?”

“예, 단순히 제련만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부위를 잘라내고 새로 붙여야 하니까요.”

내가 씨익 웃었다.

“금과 은 걱정은 하지 마, 썩어날 정도로 많으니까.”

“…… 예?”

스켈레톤 병사들이 한 마리씩 내 방에 들어와 금구슬과 은구슬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일곱 번째 라운드에서 처치한 골드 골렘과 실버 골렘의 잔유물(殘留物)이다.

불카누스가 쌓여 오르는 금과 은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많은 양의 재료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한 서버에서 구할 수 있는 금과 은의 양은 정해져 있는데다가, 대부분을 내가 가져왔으니 할 말이 없겠지.

“갑주를 가볍게 만들고, 낫의 날을 정비해 줘.”

“…… 낫도 가벼워져야 합니까?”

“그럼 좋지. 그리고 내 친구들 아이템도 전부 정비해놓고.”

불카누스가 금구슬을 한주먹 움켜쥐어 들며 말했다.

“맡겨주십쇼. 제가 끝내주게 완성해놓겠습니다.”

“그리고 마정우라는 플레이어의 도끼는 모든 재료를 써서라도 아주 강력하게 만들어놔야 해. 네 모든 전력을 사용해서.”

“주인님과 마정우, 둘 중 누구의 물건에 더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까?”

내가 불쾌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것도 모르냐는 의미를 내포한 몸짓이었다.

“당연히 나지. 내가 말한 모든 재료는, 내 물건을 만들고 남은 재료를 말 한 거야.”

“…… 알겠습니다.”

다음 라운드는 정우가 전장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 벨제붑과의 갈등은 둘째치고 열한 번째 라운드에 나오는 적들은 전부 어둠의 힘으로 무찌르기 힘든 놈들이니깐.

나는 담뱃불을 붙이며 불카누스에게 물었다.

“불카누스.”

“예.”

“이제 네 형제를 한 명씩 데려올까 하는데.”

“제 형제들 말입니까?”

“그래, 혹시 추천할 만한 자가 있나? 지금 내가 데려올 수 있는 자는 총 세 명. 헤라클레스, 아프로디테, 아레스야.”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역 중 세 명이다. 물론 이 외에도 더욱 강한 신들이 존재하지만, 지금 내게 선택지는 많지 않다.

“꼭 저들 중 한 명이어야 합니까?”

“어, 신화 급은 데려올 수 있는 숫자가 제한되어 있으니 한 명밖에 못 데려와.”

“아니, 저 세 명 말고는 선택지가 없느냐 묻는 겁니다.”

“그렇지.”

“그렇다면 당연히 아프로디테 아닙니까?”

“아프로디테? 왜지?”

불카누스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녀는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 그래서?”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지요.”

“그리고?”

“즐거울 겁니다.”

“뭐가?”

“날이 어두워지면- ”

내가 불카누스의 뺨따귀를 때렸다. 찰싹! 소리와 함께 녀석의 턱이 돌아갔다. 역시 자타공인 개복치 같은 놈이다.

“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다.”

“크윽…. 왜 때리시는 겁니까.”

“됐어, 내가 주문한 일들이나 잘 처리해놔.”

“아프로디테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럼 헤라 여신도-”

“아니! 내가 필요한 건 강력한 동료지, 좋은 친구가 아니야.”

“아…! 그럼 당연히 아레스를 데려와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매서운 눈초리로 녀석을 째려보았다. 또 이상한 말을 내뱉으면 이번에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불카누스가 내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레스는 전쟁의 신! 신들의 왕자! 그의 권능은 누구보다도 뛰어납니다.”

“…… 그래?”

“그렇습니다. 전투 실력 또한 그의 아버지인 제우스보다도 높게 평가될 정도입니다.”

“호오라.”

아레스의 능력치는 헤라클레스보다 낮은 편이다. 그런데도 제우스보다 높게 평가될 정도면 스킬에 특별함이 있다는 것.

PC 버전에서는 신화에 대한 설명만이 있을 뿐, 무력에 대한 비교가 없었는데 좋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앞서 헤라클레스만 사용해 보았는데, 이번에는 아레스를 한번 영입해봐야겠다.

그때보다 더 강해져야 하니깐.

* * * * *

나는 옷이 마르는 대로 저택에서 나왔다. 다음 라운드에 가기 전 김준철을 만나 메카니아의 일을 설명해주어야 했다.

우리 그룹원 모두가 근처 잡화점에서 구입한 망토를 둘러멨다.

그리곤 간단한 장비를 구매한 후 도깨비 부대의 벙커를 찾아갔다.

걷는 내내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대낮에 신분을 감추기 위해 온몸을 가리고 다니니, 수상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정우가 내 옆으로 바짝 붙어 말했다.

“누가 쫓아오는 것 같은데?”

“우리를?”

“어, 수는 둘 또는 셋. 기척을 숨기는 솜씨를 보니 보통 놈들은 아니야.”

“…… 세 번째 라운드에 그런 실력자가 있나?”

“뭐…. 우리보다는 약하겠지만, 그래도 보통 놈은 아닌 것 같아.”

라운드를 진행하지 않은 숨겨진 고수들인가? 이 게임에는 임무 진행과는 다르게 PK에 특화된 플레이어들이 있긴 하다.

오직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재미로만 게임을 즐기는 자들.

“무시해, 먼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굳이 쫓을 필요 없어.”

“기습당하면? 지금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는데.”

“지금 우리 실력이면 젓가락으로도 웬만한 놈들을 제압할 수 있어.”

“……”

“다음 라운드가 시작되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 해. 나는 벙커 들렀다가 대경성에도 가야 하거든.”

정우가 눈썹을 움찔거렸다.

“대경성? 이제 경매는 참가할 필요가 없지 않나.”

“경매 말고, 박물관.”

“박물관?”

“그래, 조건이 갖추어졌으니 이제 신화급 동료를 데리러 가야지.”

“…… 아!”

끼이이익- 끼이이익-

멀지 않은 곳에서 쇠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름칠이 잘되지 않은 기기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벙커 앞에 도착한 나는 보초를 향해 걸었다.

세 명 중 두 명이 나를 향해 총을 겨누고, 조장으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와 내게 물었다.

철컥.

“어떤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김준철 소령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 누구라고 전하면 되겠습니까?”

“김천재라고 전하시면 됩니다.”

“김천재?! 아, 알겠습니다. 타지에서 복귀 후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몰라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빨리 전달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완장을 차고 있는 자가 무전기로 어딘가에 연락했다. 벙커 내부로 통하는 무전인 것 같은데, 무선이 아니라 유선이었다.

도청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장치인가?

삐빅.

-지휘 통제실, 위병소입니다.

수 초 후 무전기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위병소, 이곳은 지휘 통제실.

-김천재라는 분이 오셨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김천재?

-그렇습니다. 위병소 블랙리스트 명단에 있는 분입니다. 김준철 소령님을 찾아왔다고 하십니다.

블랙리스트?

블랙리스트란 대게 위험한 인물들의 명단을 부르는 단어가 아닌가.

설마 김준철이 작전 과장의 말을 믿고 나를 안 좋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아니지.

그렇다면 지금 이 녀석들은 나를 적대시하며 총구를 겨누었어야 한다.

최소한 오 분 대기조라도 출동해서 나를 죽이려 한다든가 말이다.

잠시 기다리자 벙커 내부에서 얄팍한 목소리의 남성이 대답해왔다.

-…… 보초와 함께 들여보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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