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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내 제안에 회랑에 모인 모든 대천사장들이 침묵했다.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같이 봉인되어있는데, 둘 중 한 명만 꺼낼 수 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도 한낱 인간이 대악마와 대천사들조차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니 말이다.

메타트론이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정말 가브리엘만 따로 그곳에서 빼낼 수 있는가?”

“예, 저를 믿고 맡겨주신다면 루시퍼가 봉인된 곳을 찾아 가브리엘을 구출하도록 하겠습니다.”

“…… 우선 그 방법이 무엇인지 들어보도록 하지. 합당하다 생각되면 자네 말대로 움직이겠네.”

[용의 모래시계]

천사와 인간이 드래곤의 힘을 빌려 만든 고대 봉인 도구 중 하나.

원래는 신마 전쟁 때 벨제붑을 봉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였지만, 루시퍼의 탄생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봉인 대상이 달라진 물건이다.

나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메타트론에게 대답했다.

“모래시계는 두 칸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렇지, 위아래로 나뉘어 있으니 말이야.”

“현재 모래시계 속 봉인 대상은 총 두 명.”

“……”

“저희가 모래시계 밖에서 성스러운 힘으로 그들을 각자 다른 공간에 다시 봉인한 후, 중심을 막고 나머지 한쪽을 부수면 됩니다.”

“……”

이야기를 듣던 미카엘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게 가능한가? 용의 모래시계는 신께서 직접 설계하신 물건이라 부수기 여간 쉽지 않을 텐데 말이야.”

“가능해요. 물론 ‘여는 자’의 도움이 필요하지만요.”

“여는 자….”

모든 천사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렇다, 이곳에서 ‘여는 자’란 나를 뜻하는 말이었다.

미카엘이 메타트론을 슬쩍 보더니 말을 이었다.

“‘여는 자’라면 너를 말하는 게 아닌가?”

“맞습니다.”

“그럼 너는 모래시계를 부술 수 있다는 말인가?”

“예.”

“…… 어떻게?”

내가 주먹에 오라를 모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지옥과 천국의 오라와는 다르게 플레이어만이 사용할 수 있는 파도 같은 오라다.

물론 ‘여는 자’란 모든 플레이어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오직 형태만으로 그 의미를 나타낼 수 있었다.

네크로맨서의 검은 오라가 넘실거렸다.

메타트론이 내 오라를 보며 물었다.

“확실히 우리의 것과는 다른 오라군.”

“여기 계신 분들 전부 알고 계시겠지만. 이 오라는 신께서 직접 여는 자에게 부여한 힘입니다.”

“……”

“천상과 지하의 갈등을 해결하라고요.”

“어째서 네가 그 사실을 알고 있지? 아무리 ‘여는 자’라고 하더라도 신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는 못했-”

내가 손을 뻗어 그의 말을 멈추었다.

“저는 전부 알고 있어요. 이곳에 계신 모든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지.”

내 대답에 메타트론이 화들짝 놀랬다. 대부분이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 자네가 우리의 목적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럼요. 지옥도 이곳과 같은 성스러운 장소로 만들 생각이시잖아요.”

“그렇긴 한데….”

“저기, 이야기가 좀 다른 방향으로 센 것 같은데. 우선 가브리엘의 이야기를 먼저 마무리 지을까요?”

“…… ”

천사장 중 몇몇이 헛기침을 했다. 내게 눈치를 주는 것 같은데, 나는 망설임 없이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메타트론, 지금 당장 가브리엘을 구출하러 지옥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이곳에 남아 신중하게 다른 작전을 펼쳐보시겠어요?”

쉽사리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본래라면 이 질문을 하는 인물은 메타트론 자신이다. 그것도 플레이어에게 말이다. 나는 그 점을 이용하여 그에게 역으로 질문했다.

어떤 길이 더 나은지 알기 위해서 한 행동이다.

“이건 나 혼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군. 잠시만 기다리게나.”

메타트론이 황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를 따라 천사장들이 일제히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가 선서하듯 손을 들고 말했다.

“조금 전 ‘여는 자’라 말하는 저 인간이 말하는 대로. 가브리엘을 지금 구하러 가자고 생각하는 자는 손을 들도록 하고, 다른 계획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자는 손을 내리도록 한다.”

권위적인 말투.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이 주로 쓰는 화법이었다.

천사들이 한둘씩 손을 들기 시작했다. 그들 중 절반은 손을 올렸고, 절반은 손을 내렸다.

서른 한 명의 대 천사 중 가브리엘을 제외한 서른 명의 투표가 끝났다.

결과는 정확하게 15:15.

의견이 정확하게 반으로 갈렸다.

메타트론이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이 문건에 관한 결정은 의장인 그가 선택하게 되니 말이다.

“……”

미카엘이 그에게 말했다.

“메타트론, 지금 구하러 가야 합니다. 나중이 되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이곳에 오기 전, 벨제붑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곧 있으면 루시퍼의 봉인이 풀린다고 했었습니다.”

“…… 정말인가?”

“예.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벨제붑과 루시퍼가 손을 잡은 것 같더군요.”

미카엘의 마지막 말에 메타트론이 날개를 활짝 펼쳤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여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 같았다. 메타트론이 천천히 날개를 접더니 미카엘에게 되물었다.

“벨제붑과 루시퍼가 손을 잡는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두 명의 대악마, 그 정점에 서 있는 놈들이 손을 잡는다는 말은 천계에도 큰 위험. 둘의 이야기를 들은 천사장들이 크게 술렁였다.

회의에 참석한 천사장들 전원의 의견이 한 번에 바뀌었다. 만장일치로 이른 시일 내에 지옥으로 향하기로 결정되었다.

탕! 탕! 탕!

“그럼 이번 회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모두 수고 많았네.”

회의가 끝나자 천사들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카엘이 나와 다른 플레이어들을 회랑 밖으로 데려와 말했다.

“너희들은 메카니아로 돌아가도록 해라. 때가 되면 지옥으로 같이 가도록 하지.”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대표로 말했다.

“그게 언제인가요?”

이건 나도 처음 해보는 스토리 전개라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의 시간으로 빠르면 하루, 느리면 이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하루 이틀이라…. 알겠습니다.”

“메카니아로 가는 길은 라파엘이 안내해줄 것이야.”

라파엘이 우리 앞으로 날아와 활짝 웃었다.

“인간 여러분들, 이제부터는 나랑 함께 움직이도록 해요.”

* * * * *

라파엘의 안내를 따라 회랑 근처에 있는 게이트 집합소로 자리를 이동했다.

여러 가지 색상의 게이트들이 줄지어 있었다.

“다들 게이트는 사용할 줄 알지? 건너편에 도착하면 이곳으로 되돌아오는 길은 없어지니 그렇게 알도록 하고. 신중하게 들어가도록 해.”

이곳은 첫 번째 라운드부터 열다섯 번째 라운드까지 플레이어가 스토리를 진행한 모든 곳을 이동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있는 장소.

<게이트웨이>

가는 것은 자유지만 돌아올 때는 무조건 메카니아를 통해서 올 수 있다.

[게이트 선택 화면]

-▶1라운드- ‘멸망의 시작’ 선택

-▶2라운드- ‘회색 도시’ 선택

-▶3라운드-‘폐허가 된 마을 ’선택

.

.

.

.

-▶10라운드- ‘신성한 회랑’ 선택

[시스템 메시지]

[현 시간부로 열 번째 라운드에 도달하신 모든 플레이어는 ‘천상 게이트’ 이용이 가능해집니다.]

우우우우웅-.

비행기 엔진 소리처럼 커다란 굉음이 들렸다. 여러 게이트가 동시에 돌아가며 만들어내는 소음이었다.

플레이어들이 게이트웨이 앞에 서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문제가 생기더라도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수 있으니 말이다.

왕천마가 내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자네 덕분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네.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정말 고맙네.”

내가 표정을 구기며 대답했다.

“됐고,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야. 다음부터는 서로 엮이지 말자고.”

“…… 알았네. 그럼 이만-.”

왕천마가 세 번째 라운드의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열한 번째 라운드에 도전하지 않을 생각인가보다.

어차피 다음 라운드는 국제적인 서버가 아니기 때문에 녀석들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특정 지역에서 만나지 않는 이상….

마정우가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해? 열한 번째 라운드로 바로 도전해? 아니면 마을에서 정비 좀 하고 갈까?”

“우선 마을로 가서 정비를 좀 하고 가자. 다들 지쳐서 좀 쉴 필요가 있는 것 같아.”

“그렇지? 하긴 나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지옥에 바로 가고 싶지도 않고.”

마정우가 우리 그룹원들을 한 명씩 모아 불렀다. 다른 한국인 플레이어들이 우리와 함께하고 싶어 했지만, 단번에 거절했다.

짐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앞으로 우리와 같이하기에는 능력이 많이 부족한 자들이었다.

저런 플레이어와 함께 한다면, 중요한 순간에 발목 잡히는 일이 분명히 발생한다.

이 게임의 특성상 한 명을 살리려고 다수가 희생하게 되는 상황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정, 사랑, 인연.

전장에서 찾아서는 안 되는 단어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모두 보유하고 있는 감정이지만 이곳에서는 필요 없다.

물론 김연희도 우리와 함께하기에 능력 미달이기는 하지만,

조영기 일이 있으니….

“자, 그럼 폐허가 된 마을로 모두 이동하자.”

내가 세 번째 게이트 앞에 섰다.

마이클과 마정우, 그리고 유소라와 김연희가 내 뒤로 섰다.

나는 천천히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천국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옥보다는 괜찮은 공기가 나를 반겼다.

-▶3라운드 선택.

[세 번째 라운드로 이동합니다.]

* * * * *

세 번째 라운드로 이동하자 조금 변한 풍경이 우리를 반겼다.

일곱 번째 라운드를 클리어하기 전보다 하늘이 좀 더 황토색으로 짙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화면이 모든 플레이어에게 동일하게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오직 천상에 다녀온 자들만이 알 수 있는 색상의 하늘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천계와는 상대가 안 될 정도로 탁하지만, 그래도 지옥보다는 훨씬 좋았다.

‘이래야지….’

이 정도는 돼야 사람이 살 만한 장소다.

마을로 돌아온 우리는 아지트로 발을 옮겼다. 세 번째 라운드의 보스, 장유의 저택으로 말이다.

[저택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머무시는 동안 편히 쉬어주시기 바랍니다.]

유소라가 손뼉을 짝하고 치더니 모두가 들리도록 말했다.

“그럼 일곱 시간 후에 제가 전부 깨워드릴게요. 그때까지 편히 쉬도록 하세요!”

모두가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마의 라운드라 불리는 일곱 번째 라운드까지 마쳤으니, 이제는 열다섯 번째 라운드까지 크게 힘든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갑주를 벗고 침대 위에 편히 누웠다. 아무 일도 하고 싶지가 않다. 저택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뼈 마디마디가 쑤셨다.

너무 무리했나 보다.

하긴 VR 게임도 이용시간이 3시간 넘어가면 잠시 쉬었다 하라며 안내 문구가 나오는데,

우리는 대체 몇 시간이나 쉬지도 않고 움직인 것일까?

마이클의 회복 능력으로 이런 잔병도 고쳐지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몬스터에게 당한 상처나 생명력에 관련된 회복만 가능했다.

“후우.”

그냥 이대로 한숨 자고 일어난 다음에 씻어야겠다. 앞으로의 일정을 따라가려면 쉴 때는 확실하게 쉬어야 한다.

눈을 감는 순간 잠이 들었다.

근데,

꿈속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만나기 조금 꺼림칙한 인물이 내 앞에 서 있다. 이 녀석의 존재에 대해 한참 동안 잊고 있었는데.

‘…… 큰일이네.’

꼬마 아이의 그림자가 내게 말했다.

“형, USB 내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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