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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스토리 영상을 보는 사이 벨제붑이 사라졌다. 정황을 보아 메타트론이 직접 쫓아낸 것 같다.

전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얼마나 격렬한 싸움이었는지 지면이 갈라지고 그 안에서 지옥의 불길이 거세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메타트론이 우리를 내려보았다.

천군과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숙이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전원 천국으로 가도록 한다. 모두 수고 많았다.”

그의 한마디에 모두가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국에서 직접 마중 나온 은빛 갑주를 입은 천군들이 사방을 경계하며 우리를 보호해주었다.

든든하다.

악마들이 근처로 다가오지 못했다. 하긴 이렇게 많은 수의 천군이 있는데 누가 덤벼들겠는가.

수장인 루시퍼도 없고, 그에 준하는 벨제붑도 사라졌으니 말이다.

덕분에 모두가 경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게이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황금 게이트 안으로 진입하시겠습니까?]

[Y/N]

이런 질문은 왜 따로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 상황에서 지옥에 남고 싶은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하나?

“…… ”

[YES]

천사들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게이트로 가는 길을 열었다.

[현 시간부로 플레이어의 입장이 허가됩니다.]

[순서대로 입장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를 필두로 플레이어들이 줄지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 번째 라운드…. 지린다!

-나는 PC 버전으로도 열 번째 라운드에 가본 적 없는데.

-고인물님이랑 같이 하는데 어딘 들 못 가겠느냐?

마정우가 내 옆에 바짝 붙어 말했다.

“저 새끼들 너한테 홀딱 반했는데?”

“아 꺼져. 남자 새끼들 꼬여봤자 좋은 거 없어.”

“그래? 크큭.”

게이트 안으로 발을 넣었다.

깊은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몸이 붕 뜨는 느낌이다.

게임에 표현되었던 우주를 걷는 기분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천천히 게이트 속으로 들어갔다.

찬란한 빛이 얼굴을 감싸 안았다. 이어 금빛의 시스템 메시지가 우리를 반겼다.

[시스템 메시지]

[열 번째 라운드 ‘천국: 성스러운 회랑’에 진입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 * * * *

단번에 일곱 번째 라운드에서 열 번째 라운드로 넘어왔다.

산뜻한 바람과 따스한 햇볕이 느껴진다. 마치 푸른 하늘 밑 숲속에 들어온 것처럼 기분이 상쾌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지나가자 구름 위에 만들어진 천상의 회랑이 보였다.

높이 솟아오른 탑.

그 주위로 신성한 힘을 가진 자의 동상이 서 있었다.

백색 로브에 흰 긴 수염을 가진 존재.

회랑으로 들어가는 모두가 동상 앞에 기도를 드린 후 이동했다.

‘신….’

앞서 본 적 있다.

PC 버전으로 플레이할 때는 VR기기를 최대한 위로 꺾어 올려야 볼 수 있는 자였다.

물론 그때도 이처럼 동상으로밖에 못 보았지만 말이다.

메타트론이 동상 앞에 서서 미카엘에게 말했다.

“인간들이 이곳까지 온 것은 처음이군.”

미카엘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지요.”

“아니지, 생각해보니 예전에 인간 중 한 명이 이곳을 찾아오기는 했었지.”

“……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메타트론은 기억이 희미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얼마 전, 자네가 메카니아에 봉인되어 있을 때의 일이네.”

“제가 메카니아에….”

“인간의 시간으로 따지면 삼 년 정도 된 것 같군.”

“……… 그때 온 자가 누굽니까?”

미카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나는 누군지 알고 있다. 마정우 또한 알고 있는 상대고.

라운드 점프를 경험한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후반부 공포의 대상.

“김정재. 김정재라는 인간이 왔다 갔어.”

-기, 김정재? 그 미친 사이코 NPC 말하는 거야?

-아니 그놈은 게임 초반부에만 얼쩡거리잖아? 그리고 여덟 번째 라운드에서 잠깐 나와서 벨제붑한테 까부는 존재가 아니었나.

-그 새끼가 게임상 스스로를 ‘여는 자’라고 자칭하는 놈이잖아.

용기사 김정재.

게임 초반부에 나오는 빌런이자, 10번째 라운드부터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하는 악마다.

아, 아니지.

놈을 악마라고 표현하는 것은 악마들에게 실례다. 그보다 더한 쓰레기니깐 말이다.

미카엘은 그가 누군지 모르기에 반응이 시원찮았다.

“그렇습니까. 제가 모르는 자군요.”

“그래, 이곳까지 혼자 온 것으로 보아 보통 놈은 아닌 것 같은데. 지옥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더군.”

“지옥으로 가는 길….”

“지옥에서는 녀석을 본 적이 없나?”

“없습니다.”

“흐음…. 우선 알았네. 그럼 인간들을 데리고 회랑으로 들어가도록 하게나. 내 천사장들을 모아 바로 회의를 주최하도록 하지.”

미카엘이 깜짝 놀란 눈으로 메타트론에게 말했다.

“메타트론, 인간들을 회랑까지 들어 올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 저들과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네.”

“인간들이 천사장 회의에 참석한다는 말입니까?”

“그래.”

“…… 안 됩니다. 저들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영혼을 가졌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회랑이 어둠에 물들 수도 있습니다.”

메타트론이 이빨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쓰읍.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그냥 안으로 들여보내도록 하게나.”

“메타트론.”

“그럼 먼저 가보도록 하지.”

메타트론이 회랑 안으로 들어갔다.

미카엘이 그 앞에 서서 걸음을 머뭇거렸다. 꺼림칙한 표정의 그를 보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겠다.

과거 메카니아에서 인간에게 배신을 당했었기에, 그때의 기억이 악몽처럼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천사들도 결국 신성한 존재 이전에는 인간이었으니 말이다.

우리가 멀뚱히 서 있자 뒤따라온 라파엘이 그의 어깨를 밀쳤다.

“뭐해, 안 들어가고?”

“메타트론이 인간들을 회랑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시는군.”

“그럼 안으로 들어가면 되잖아?”

“…… 위험하지 않은가?”

“지금 네 표정이 더 위험해 보여. 빨리 데리고 들어가. 늦으면 모두가 기다려야 할 거야.”

소녀 같은 얼굴의 라파엘이 내 쪽을 보며 윙크를 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옆머리를 긁었다.

‘라파엘이 원래 저런 캐릭터였나?’

* * * * *

회랑 안으로 들어가자 특수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자그마한 탑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천사들이 사용하는 마력의 원동력.

마동석.

저기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천사들에게 연결되어 무한한 힘을 내게 해주는 것이다.

-와! 저게 마동석인가 봐.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느껴지네.

-괜히 건들지 마라. 천사들한테 혼난다.

혼나는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지.

잘못 건드려서 마동석에 문제라도 생기는 날에는 죽을 수도 있다.

가뜩이나 미카엘이 우리를 안 좋은 눈초리로 보고 있는데 말이다.

복도에 대화 소리가 울리자 미카엘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곳은 우리에게도 정숙을 요하는 곳이니 행동에 문제를 일으키지 말길 바란다.”

내가 대표로 대답했다.

“예.”

이렇게 해야 다른 이들도 단번에 알아듣고, 이야기가 길어지지 않는다.

기나긴 원형의 계단을 올라갔다. 중간쯤 도착했을 때 미카엘이 무어라 속삭이자 투명한 계단이 늘어나며 회의장으로 통하는 길이 생겼다.

“이곳에는 너희 중 단 한 명만 들어갈 수 있다. 나머지는 밖에서 대기하도록.”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학창 시절 반장 하고 싶은 사람, 했을 때 시선이 몰리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뭐- 인간 대표로 나서는 것이니 나쁠 이유는 없지.

“그럼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안에서는 절대로 소란을 피우지 마라.”

“예.”

“무기는 전부 밖에 두고 들어오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내가 낫을 땅에 내려놓았다.

치지지직! 소리와 함께 연기가 일었다. 어둠의 힘이 깃들여져 있어서 그런가 보다. 미카엘이 내 무기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강령술에 사용하는 무기군.”

“예.”

“…… 강령술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일이야. 알고 있나?”

“…… 그런가요?”

“그렇지. 죽은 자의 영혼을 움직이니 어찌 보면 신이라고도 할 수 있지.”

미카엘이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회의장의 문을 두드렸다.

쿠웅. 쿠웅. 쿠웅.

끝을 보려면 고개를 뒤로 꺾어야 할 정도로 높은 문이 천천히 열렸다.

끼이이이익.

하얀빛이 쏟아져 나왔다.

[‘김천재’ 플레이어의 입장을 허가합니다.]

미카엘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니 천사장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양옆으로 줄지어 앉아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 있는 메타트론, 그가 비어있는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미카엘과 인간은 저곳에 안도록 하게나.”

왕좌가 떠오를 정도로 화려한 의자, 그 옆에 초라한 나무 의자 하나가 있었다.

미카엘과 내가 나란히 앉았다.

그래도 손님인데 이런 의자는 너무한 것 아닌가? 몸을 걸치기만 했는데도 나무 의자의 다리가 삐걱거렸다.

-저 녀석이 미카엘과 라파엘을 악마들에게서 구출했다는 바로 그 인간인가?

-대악마 중 다섯을 물리쳤다던대.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인간 주제에 어떻게 대악마를 물리칩니까? 하급이나 중급 악마 정도라면 몰라도.

모두가 조용히 메타트론을 응시했다. 그가 고민에 빠진 얼굴로 몇 장의 서류를 넘기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미카엘.”

“말씀하십시오.”

“루시퍼가 지금 어디 있는지는 들었나?”

“…… 예, 라파엘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용의 모래시계 속에 봉인된 것이 맞습니까?”

메타트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브리엘의 희생 덕분에 놈을 봉인 할 수 있었지.”

“그럼 가브리엘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 모래시계 속에 같이 있다네.”

갑자기 회의장이 소란스러워졌다. 몇몇 천사장들이 지금까지 몰랐던 이야기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메타트론, 가브리엘의 행방을 알고 계셨습니까?

-저번에는 모른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신의 대리인이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메타트론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당시에는 나도 몰랐다. 이후에 가브리엘의 행방을 알았을 때는, 너희들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왜입니까?

“…… 내가 그녀의 행방을 말했다면 너희 중 누군가는 분명히 가브리엘을 구출하기 위해, 용의 모래시계를 찾아갔을 테니깐.”

그의 말을 들은 모두가 숙연해졌다. 천사장 중 대부분은 성령 가브리엘에 의해 만들어진 자.

메타트론의 말대로 그녀의 위기를 알았더라면 이곳에 있는 몇은 벌써 용의 모래시계를 찾으러 갔을 것이다.

이야기를 듣던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기-”

미카엘이 손을 뻗어 내 입을 가렸다.

“됐다,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메타트론이 손가락을 저으며 미카엘에게 말했다.

“아니, 미카엘. 그 인간도 회의에 참석한 의상 발언권이 있네. 이야기를 막지 말게나.”

“…… 메타트론.”

“인간이여. 말해보게나.”

내가 미카엘을 보았다.

그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팔을 치웠다. 나는 모두가 나를 볼 수 있도록 자리에서 일어나 이야기를 시작했다.

“루시퍼의 봉인을 풀지 않고, 가브리엘만 모래시계에서 꺼낼 방법. 제가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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