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루시퍼의 부활이 내게 좋은 소식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벨제붑이 허리춤에 걸려있는 한조의 검을 뽑더니 말을 이었다.
“루시퍼가 올 때까지 너희 전부 이곳에서 나가지 못한다.”
“너는 루시퍼와 사이가 안 좋지 않나?”
“루시퍼와 그렇게 보이겠지. 나를 저 왕좌에 삼천 년 동안 가둬두었으니 말이야.”
“……”
벨제붑과 루시퍼는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 그게 바로 멸망의 땅 중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가는 메인 스토리의 핵심이다.
이 부분이 둘의 갈등을 빌미로 천사들에게 악마 퇴치의 기회를 만드는 작업인데, 루시퍼의 부활을 기회라고 표현하다니.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벨제붑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 계속해서 루시퍼를 환영하는 말을 뱉어냈다.
“김천재, 다시 한 번 물어보마. 내 밑으로 올 생각이 없나? 루시퍼가 나오면 저 빌어먹을 미카엘과 라파엘도 타락시킬 수 있을 거야.”
“…… 루시퍼가 나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여기서 떠날걸?”
“아니, 너희들은 떠나지 못해. 이곳은 내가 지키도록 한다.”
샥-
벨제붑이 허공에 검을 휘두르자 어둠의 오라가 소용돌이쳤다. 이어 강풍이 주변을 집어삼키며 천사들을 날려 보냈다.
그 모습을 본 미카엘이 날아왔다.
캉!
둘의 검이 맞닿으며 만들어낸 공명에 갑주가 떨려왔다.
“미카엘.”
“벨제붑.”
“오랜만이군, 너와 꼭 붙고 싶었는데 말이야.”
“루시퍼의 봉인이 풀린다는 게 무슨 말이지?”
“노코멘트, 그 부분에 대해서는 너와 할 말이 없다.”
“…… 천벌을 내려주마.”
“네가 내게 천벌을? 크하하하! 좋아, 좋다고. 근데 말이야. 내가 없었어도 루시퍼는 지옥의 왕이 될 운명이었다.”
“……”
“우리는 신이 만든 인과율의 흐름 안에서 흘러간다. 녀석이 악마가 된 것도 신의 뜻이야.”
미카엘이 분노한 표정으로 커다란 검을 휘둘렀다.
부웅-
“닥쳐라!”
캉!
벨제붑이 가볍게 받아냈다.
“느려. 대천사라는 자가 이렇게 약해서야.”
라파엘이 빠르게 날아와 신성한 빛을 뿜어냈다. 벨제붑이 검은 오라로 몸을 휘감아 빛을 막았다.
대악마 한 명과,
대천사 두 명의 대결.
플레이어 전원 셋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시스템 메시지]
[보스 발견]
[일곱 번째 라운드의 마지막 보스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벨제붑’의 기억 속에 있는 파편을 발동시켜 스토리 영상을 재현합니다.]
‘잠깐만.’
마지막 보스?
벨제붑은 플레이어가 상대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이야기의 안내인 정도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보스로 판단한다니.
“…… 후우.”
눈앞에 새하얀 안개가 나타나며 주변을 가렸다.
‘지옥인가?’
나는 안개 커튼이 펼쳐지기 전까지 지금 벌어진 상황에 대하여 생각했다.
벨제붑이 왜 루시퍼의 봉인을 풀어 주었을까?
기존 스토리대로라면 루시퍼의 봉인은 제 2차 신마 전쟁에서 천사에게 패배한 벨제붑의 사망 시점을 기준으로 풀리게 되어있다.
‘…… 혹시.’
내가 모르는 오 년의 시간.
그 안에 둘이 화해, 또는 동맹을 한 건가.
촤르르르륵!
안개 커튼이 펼쳐졌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땅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하늘에서는 천둥이 미칠 듯이 쏟아졌다.
지옥의 대악마, 그중에서도 최강의 존재라 불리는 자가 머무는 악마성.
그 앞에 벨제붑과 루시퍼가 나란히 서 있다.
연기같이 흐릿한 형체에 머리에는 짧은 뿔을 가지고 있는 인간 형태의 벨제붑.
이제 막 어둠의 힘을 받아 천사의 갑주를 입고 있는 악마, 루시퍼.
천사에서 악마로 다시 태어날 때의 모습인가보다.
“루시퍼, 기분이 어떠냐?”
루시퍼는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두 눈을 천천히 떴다.
“어떻게 된 거지?”
그는 믿을 수 없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둘러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 피부로 바뀌어 있었다.
머리에는 악마의 상징인 두 개의 뿔이 자라 있었고, 손톱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서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변해버린 악의 모습.
루시퍼가 머리를 부여잡고 포효했다.
“크아아아악!”
벨제붑이 그의 앞으로 다가가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하!”
“벨제붑, 내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무슨 짓?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을 뿐.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지금 그 모습은 네 안에서 끓어오른 증오가 만들어낸 것이지. 내가 만든 게 아니야.”
루시퍼가 땅을 차고 나아가 벨제붑을 향해 손톱을 뻗었다.
푸욱!
벨제붑은 그의 공격을 막지 않고 그대로 받아냈다. 손톱이 벨제붑의 배를 관통해 등 뒤로 나왔다.
“좋아…. 계속해라. 그럴수록 너의 분노는 점점 커지고, 그 분노는 증오로 변하여 네 힘의 원천이 된다.”
“뭐?”
“너는 증오의 악마, 앞으로 오만한 자들에게 벌을 내릴 ‘오만의 루시퍼’라 불리게 될 것이야.”
루시퍼가 이를 꽉 깨물어 분노를 억누르더니 벨제붑에게 박힌 손톱을 빼어냈다.
스으으윽- 팍!
“…… 이런다고 내가 악마가 될 것 같은가?”
“벌써 악마가 아닌가? 부정하지 마라. 이 모든 것은 신께서 정해주신 일이다.”
“……”
“너도 알겠지만, 신께서는 선과 악을 전부 창조했다. 천상과 지하, 둘 다 사랑하시는 거지.”
“닥쳐라, 네 더러운 입은 신성한 그분의 이름을 논할 자격이 없어.”
벨제붑이 자신의 복부에 흐르는 피를 손바닥으로 스윽 닦아내자 상처가 치유되었다. 마치 스케치북 위에 그려진 그림을 지우개로 지워내는 것처럼.
그는 루시퍼의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왜지? 이 악마의 지옥도. 천사의 천국도. 결국 그분이 결정하고 만드신 건데?”
“네놈들은 천국에서 떨어져 나간 쓰레기. 폐기물이다.”
“그 폐기물도 신께서 만든 거잖아? 결국, 소멸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언젠가 사용하려고 하신 거야.”
“……”
“그리고 그때가 바로 지금이다. 루시퍼, 언제까지 천국을 신성한 영역이라 단정 짓고 그 오만한 놈들에게 조종당할 거지?”
“……”
“메타트론이 신의 이야기를 전달한다고 하는데, 정말 모든 말을 너희에게 전달했을까?”
루시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벨제붑이 씨익 웃더니 말을 이었다.
“전달하지 않은 내용 중 우리와 싸우지 말라는 전문이 있었다면? 천국과 지옥은 왜 맨날 싸워야 하지? 둘 중 한쪽이 승리하면 결국 이 싸움은 끝이 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메타트론은 신의 말을 일부분만 너희들에게 전달하고 있어. 천국과 지옥을 일부로 분열시켜 계속된 정쟁을 야기하고 있지.”
이 게임을 하면서 처음 듣는 이야기다. 루시퍼와 벨제붑에 관한 이야기는 팬 사이트에 글로만 풀어져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자세한 대화를 듣게 될 줄이야.
나는 그들의 옆으로 바짝 날아가 대화 내용에 집중했다.
정적 속, 루시퍼가 벨제붑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물었다.
“네 혀에 내가 속아 넘어가리라 생각하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다만 이것만큼은 확실하지, 메타트론은 전쟁을 원해.”
“……?!”
“루시퍼, 잘 생각해봐라. 메타트론은 왜 지옥에 성전을 지으려 했을까? 그것도 수많은 천사를 희생해가면서 말이야.”
“그건 신께서-”
“신께서 지옥에 성전을 지으라고 했다? 신마 전쟁을 일으키면서까지? 그럼 메타트론이 아니라 신께서 전쟁을 원하신다는 거냐?”
루시퍼가 말을 잇지 못했다.
벨제붑은 대화를 다 끝냈다는 듯 등을 돌렸다.
“루시퍼, 나는 더 이상 네 일에 관여하지 않도록 하마. 이제부터는 네 맘대로 해라.”
“……”
“아까 말했지만 이제 너는 악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과율은 신께서 정하신다. 네가 오늘 어둠의 힘을 받은 것도 결국 신의 뜻.”
“……”
“루시퍼, 네가 다시 천사가 되겠다고 한들 이곳에서는 아무도 말리지 않아. 선택은 자유.”
의미심장한 미소의 벨제붑과 독기가 서려 있는 루시퍼의 눈빛.
그렇게 둘의 대화가 끝났다.
* * * * *
안개 커튼이 쳐지며 지옥을 비추는 화면이 사라졌다. 눈앞을 가리는 안개가 고정된 것으로 보아 또 다른 흐름을 보여주려는 것이 확실하다.
어떤 화면을 보여주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대기 시간이 꽤 길었다.
“……”
그렇구나.
안개 커튼이 걷히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시스템이 많은 장면을 표현해야 하기에 대기 시간이 길었나 보다.
그저 영상일 뿐인데 진득한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것 같았다.
벨제붑이 땅에 쓰러져 있고,
루시퍼가 녀석의 가슴을 발바닥으로 누르고 있었다.
“벨제붑, 이제 지옥은 내가 통치하도록 하지.”
루시퍼가 천사 갑주를 입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천국에 다녀온 이후가 확실했다.
“크윽….”
“이렇게 될 줄 몰랐나? 천사가 악마의 힘까지 갖게 되면 얼마나 강해지는지.”
뿌득!
벨제붑의 가슴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누가 보아도 압도적인 전투였음이 분명했다.
만신창이가 된 벨제붑에 비해 루시퍼의 몸에는 생채기가 하나도 없었다.
‘흐음….’
무력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봤으면 좋았을 텐데.
루시퍼가 벨제붑의 양쪽 팔꿈치와 무릎을 부러뜨리더니 목을 잡아들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나?”
“크흐- 너는 내가 만든 악마 중 최고다.”
“……”
“신마 전쟁 때 너를 버리고 간 천상을 향한 증오와 절실한 기도에도 구원해주지 않은 신을 향한 분노.”
“……”
“…… 완벽해. 이 정도로 타락할 줄 몰랐는데, 너는 완벽한 악마가 되었어.”
콰득!
벨제붑의 목이 부러졌다. 그 장면을 보던 내 인상이 찡그려졌다. 뼈 부러지는 소리가 저렇게까지 선명하게 들릴 줄이야.
벨제붑의 머리 위에 있는 생명력 게이지가 회색으로 변함과 동시에 몸이 파리 떼로 변했다.
위이이이잉-
파리들이 높이 날아오르더니 다시 한곳에 뭉쳤다.
파바바바박!
뭉친 파리들이 오라를 뿜더니 지점토처럼 뭉개지며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
‘벨제붑?’
벨제붑이 살아났다.
완벽한 상태의 신체로 말이다.
루시퍼가 그 모습을 보더니 이빨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를 내었다.
쓰읍.
“어떻게 살아난 거지?”
“크하하하! 나를 지옥에서 죽이는 것은 불가능한 것 몰랐나?”
“죽지 않는 몸이라는 것은 들었다. 다만 재생하는 건 처음 보는군. 아니지, 새로이 만들어졌으니 재생이 아니라 탄생인가?”
벨제붑이 씨익 웃더니 루시퍼를 향해 말했다.
“루시퍼, 다시 한 번 제안하도록 하마. 나와 손을 잡는 게 어떤가?”
“……”
“신을 만나고 싶지 않은가? 왜 너를 구원해주지 않았는지 물어보러 말이야.”
루시퍼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정적이 흘렀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죽일듯한 눈빛을 흘리더니, 벨제붑의 말에 동요된 듯 뿜어내는 오라의 크기를 줄였다.
“…… 네가 원하는 건 뭐지?”
“없어.”
“없다고?”
“그래, 나는 네가 천상에 복수하는 모습이 보고 싶을 뿐이다.”
“…… 거짓말하지 마라.”
벨제붑이 서커스단의 피에로처럼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들켰나?”
“너 정도 되는 놈이 아무런 이유 없이 나와 손을 잡으려 하지 않겠지.”
무슨 능력을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벨제붑과 루시퍼의 중간에 공간이 뒤틀려 보이더니, 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루시퍼, 너는 천사에서 악마가 되어 모르겠지만. 태초부터 악으로 태어난 자들은 타인의 고통을 즐긴다.”
“…… 그래서?”
벨제붑의 얼굴이 의미심장해지며 웃음이 사라졌다. 그가 지옥의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루시퍼에게 말했다.
“천상과 지상 그리고 지하까지. 살아있는 모두를 고통으로 뒤덮는 것.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세계야.”
미친놈.
끔찍한 일을 원하고 있다.
내 반응과는 다르게 루시퍼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지. 나는 모든 존재의 멸망을 원한다. 너는 모든 존재에 고통을 원하고.”
“……”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나?”
벨제붑이 고개를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은 언제부터 실행할 생각이지?”
“앞으로 삼천 년 뒤, 과거 신이 말한 ‘여는 자’라는 존재가 나타날 때 진행하도록 하지.”
* * * * *
안개가 걷히며 스토리 화면이 끝났다. 플레이어들이 원상태로 돌아왔을 때는 벨제붑이 눈앞에 없었다.
게이트 주변이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빛이 뿜어져 나오는 곳을 보았다.
찬란하다.
성스러운 빛 속에 수십 개의 날개가 달린 천사가 보였다.
천사들이 전원 무릎을 꿇고 그를 향해 경배했다.
“…… 메타트론.”
로그인 더 아포칼립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