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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지옥의 붕괴가 시작되는 탓에 우리 모두가 성전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벨제붑’의 폭주로 인하여 지옥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우리를 지옥에 묶어 놓기 위해 녀석이 선택한 비장의 방법인 것 같다.

이유는 당연했다.

우리가 천국으로 돌아간다면 라파엘 탈환 소식을 받은 천사들이 지옥으로 역습하러 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게이트로 향하지 못했다.

균열이 생긴 공간 안에서는 한 걸음만 잘못 걸어도 어디로 이동할지 모르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지금 움직이는 것은 벨제붑 녀석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

오히려 성전 안에 대기하고 있는 편이 나았다.

“…… 게이트를 향해 가도록.”

내가 소환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물론 가웨인과 박규환을 제외한 언데드 병사들이다.

성전 입구에서 내려보는 풍경은 대단했다.

공간이 깨진 퍼즐 조각처럼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있었다. 바로 앞은 먼 곳처럼 보이고, 먼 곳은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병사들이 방황하며 게이트로 가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답은 찾아낼 수 있다.

확실하다.

나는 앞서 이런 상황을 겪어 본 적 있으니깐.

기다리는 동안 미카엘과 라파엘이 ‘불타는 성전’ 안에 있는 악의 기운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김천재, 부서진 공간은 시간이 흐르면 돌아온다.”

나도 알고 있었다.

다만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지를 모를 뿐. 벨제붑의 폭주는 메인 이벤트 실패 시 벌어지는 상황,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인터넷을 통해 들어 봤다.

세상이 깨지며 플레이어들이 성전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온다는 이야기를.

“그래? 얼마나 지나면 돌아오는데?”

“그건 녀석이 어느 정도의 힘을 썼느냐에 따라 달라서 알 수가 없어.”

“예상 시간은?”

“빠르면 한 시간, 늦으면 두 시간 정도다. 그 이상은 녀석도 힘들 거야.”

“두 시간이라….”

천사들이 빠르게 날아다니며 신마 전쟁 때 만들어진 악마들의 흔적을 지웠다.

벽에 그려진 악마를 숭배하는 문양들과 치열한 전투의 흔적인 악마의 검은 핏자국과 천사들의 박살 난 갑주.

나도 몰랐던 부분 중 하나인 성전 바닥에 그려져 있는 바포메트의 문양까지.

“……”

말이 성전이지 사실 악마화 되어 있었다. 라파엘이 봉인되기 전 만든 결계가 아니었다면 이곳은 벌써 악마들이 점령했을 것이다.

쿠구궁!

다시 한 번 땅이 울렸다.

나는 굉음이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각난 공간 파편 중 하나가 세계수 근처를 비추었다.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었지만 가는 길이 쉽지 않아 보였다. 그 앞에 있는 조각에서는 절벽이 보이고 있었다.

나는 계단 밑으로 내려가 쓰러진 세계수가 보이는 조각을 보았다.

그 안으로 벨제붑이 있다.

녀석이 게이트를 막아보려는 듯 그 앞에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허허.”

내가 조각 앞으로 손을 뻗었다.

거리가 멀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뭐가 충분하냐고?

[‘시체 폭발’을 시전합니다.]

[헬하운드 36기, 가고일 15기, 임프 50기에 대한 폭발이 이루어집니다.]

[시체의 수가 많아 위력이 매우 강하니 인근 지역에서 벗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카운트 시작 ‘5초’]

앞서 한국 플레이어들이 상대한 시체 더미 위로 숫자가 나타났다.

5초부터 시작된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었다.

시체 폭발 스킬을 눈치 채지 못한 벨제붑이 계속해서 게이트를 보고 있다.

쾅!

시체가 폭발했다.

앞서 마몬을 상대할 때보다 더욱 큰 위력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충격을 완화해줄 골렘조차 없었다. 공격이 정통으로 들어갔다.

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정도면 대미지는 확실하게 준 것 같은데, 어느 정도의 피해가 갔을까?

조용히 먼지가 걷히기를 기다렸다. 내 시선이 녀석의 머리 위에 있는 생명력 게이지를 응시했다.

“…… 응?”

공간 파편 안으로 보이는 벨제붑의 생명력 게이지에 변동이 없었다.

다만 녀석의 얼굴을 보니 분노가 차오른 것은 확실했다. 누가 보아도 화가 났다고 말할 정도로 얼굴이 구겨졌으니 말이다.

“크아아아아!”

녀석의 비명이 공간 파편을 너머서 들려왔다. 귀가 찢어질 것같이 높은 고음이었다. 나는 두 귀를 막고 바닥에 납작이 엎드렸다. 내가 한 짓이라는 것을 알면 벨제붑 녀석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는 것으로 보아 내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나는 조용히 자리를 옮겨 조각이 비추지 않는 곳으로 갔다.

‘허허….’

최상급 스킬 중 하나인 시체 폭발로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한다니, 그것도 백 마리가 넘는 악마를 사용했는데 말이다.

강해도 보통 강한 놈이 아니었다.

다른 대악마들과는 정말 급이 달랐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상대할 만할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모든 플레이어가 다 같이 덤벼도 이길 수 없을 정도다.

‘역시 천사의 힘 없이는….’

나는 사각지대에서 담배를 태우며 녀석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벨제붑은 게이트에 주문을 외우는 것을 포기했는지 딴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녀석이 몇 발자국 옆으로 걷자 조각이 비추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놈의 강함은 이미 확실하게 내 머릿속에 박혔다.

‘……’

어떻게 해야 벨제붑을 이길 수 있는지까지도.

* * * * *

시간이 흐르자 조각난 공간 파편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미카엘과 라파엘이 천사 군단을 이끌고 나와 주변을 살폈다.

어느 정도 길이 만들어지자 성전 안에 있는 모두가 밖으로 나와 다시 게이트를 향한 행진을 시작했다.

“출발한다.”

미카엘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필두로 모두가 발걸음을 떼었다.

주변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벨제붑이 흘리고 간 오라가 분명했다. 나는 갑주의 목덜미 부분을 닦아내었다.

많이 긴장했는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유소라가 내 옆으로 바짝 붙어 물었다.

“천재 씨.”

“예?”

“이제 저희는 천국으로 가는 건가요?”

“맞아요. 저 게이트에 들어가면 이번 라운드는 자동 종료예요.”

“아…. 그럼 두 번째 흐름은 없는 거네요?”

“그렇죠. 강제로 열 번째 라운드로 이동하니까요.”

우리의 대화를 들은 다른 플레이어들이 기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유소라가 일부러 내게 물은 것 같다.

다른 이들의 불안감을 지워주기 위해서.

그걸 알기에 내가 더욱 목소리를 높여 대답해 주었다. 베트남과 중국 플레이어들도 들을 수 있게 말이다.

중국 플레이어라고 해봤자 두 명밖에 안 남았지만….

왕천마와 드루이드 플레이어가 초췌한 모습으로 행렬의 끝을 맡았다.

우리와 거리를 두고 싶었는지 출발 전부터 저 자리를 원했다.

나는 천천히 걸으며 모두의 숫자를 세어 보았다.

오십에서 육십여 명 정도다.

“…… 미카엘!”

내 외침에 천사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미카엘은 순간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높이 날아올랐다.

“알겠다!”

그가 고개를 좌측에서 우측으로 천천히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먼 곳에서 무언가를 찾았는지 오라를 뿜어 전투 신호를 알렸다.

“벨제붑이 온다.”

벨제붑?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에게 덤비겠다는 말인가. 플레이어를 제외하더라도 두 명의 대천사가 있는데 말이다.

“모두 게이트를 향해 빨리 이동하도록 해라!”

라파엘이 목소리를 높이자 천사들이 서둘러 움직였다. 플레이어들이 눈치를 보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나 또한 미카엘이 바라보는 방향을 경계했다.

전방에는 미카엘, 후방에는 라파엘이 배치되었다.

다행히도 게이트 앞에 도착하기 전까지 벨제붑이 우리를 찾지 못했다. 아니지, 찾지 못했다기보다는 추격에 실패했다.

따라오려고 했던 것 같은데 아직 완벽하지 않은 공간 조각이 그를 다른 곳으로 보낸 것 같았다.

게이트 앞에 도착한 미카엘이 천사들을 순서대로 천국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이번 라운드에 참여하신 모든 플레이어의 ‘게이트’ 입장이 허용됩니다.]

게이트가 요동을 치며 천사들을 한 명씩 삼켰다. 그 속에서 따뜻한 빛이 흘러나왔다.

플레이어들이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천사들이 모두 들어가야 우리의 기회가 찾아온다.

꿀꺽.

내가 침을 삼켜 벨제붑이 다가오는 방향을 보았다. 가까워질수록 녀석의 오라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미카엘 또한 위기감을 느꼈는지 천사들에게 서두를 것을 요청했다.

“미카엘, 너와 벨제붑 중 누가 더 강하지?”

“어떤 답을 원하지?”

“네가 더 강했으면 좋겠네.”

“…… 미안하지만 그 반대다. 녀석은 루시퍼가 나타나기 전까지 지옥의 최강자였어.”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확신을 담아 말할 줄 몰랐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싸울 수 있겠지.’

나는 팔짱을 끼고 게이트를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천사 입장의 속도가 느려 플레이어가 단 한 명도 못 들어갔다.

[앞으로 5분 후 플레이어의 입장이 허가됩니다.]

5분.

짧은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긴 시간이었다. 벨제붑 녀석만 없었더라도 이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텐데.

터벅. 터벅. 터벅. 터벅.

먼 곳에서 무거운 걸음 소리가 들렸다. 일반인은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울림이다.

나는 낫에 오라를 담고 녀석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게이트 안에 들어가기 전 놈과 한 판 붙어야 할 것 같다.

‘대천사가 둘이나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그림자의 형태가 보였다. 이마 가운데 긴 뿔이 박혀있는 것으로 보아 벨제붑이 확실했다.

본 모습을 그림자에 숨긴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아까 내가 사용한 시체 폭발 때문인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자신의 실체를 보이지 않았다.

미카엘과 내가 전장의 앞으로 나가 벨제붑의 예상 도착지를 점령했다.

어쩔 수 없다.

잠깐이라도 게이트를 위해 싸워야 한다.

“정우야, 네가 사람들 데리고 먼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나는 미카엘이랑 같이 움직일 테니깐.”

정우가 콧잔등을 닦아냈다.

“너 혼자 미카엘이랑 남는다고?”

“어.”

“너무 위험하지 않나? 떠난 후에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도와줄 수 없어.”

“괜찮아. 걱정하지 말고 먼저 들어가면 내가 따라갈게.”

“…… 김천재.”

“응?”

마정우가 가슴 깊은 곳에서 숨을 끌어모아 뱉으며 내 목덜미에 손을 걸쳤다.

“죽지 마라.”

“죽겠냐? 걱정하지 말고 천국에서 기다리셔.”

내가 반응을 크게 보이자 마정우가 씨익 웃었다. 우리 둘은 서로의 손을 잡고 강하게 악수를 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남자라면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니까.

[대악마 ‘식탐의 벨제붑’이 김천재 일행을 찾아옵니다.]

게이트 앞에 도착한 그림자에서 벨제붑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전부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 상황임에도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김천재, 내가 좋은 소식 하나를 가져왔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이야기, 벨제붑은 마치 오랫동안 나를 알고 지낸 듯 자연스럽게 말했다.

좋은 소식?

나를 죽이러 온 줄 알았는데 의외의 말을 했다.

“…… 좋은 소식?”

“그래, 네가 싫어하는 루시퍼가 지금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있나?”

“루시퍼? 어디?”

벨제붑의 손가락이 사탄의 왕좌를 가리켰다.

“녀석이 곧 봉인에서 풀려난다. 이제 우리들의 세상이 찾아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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