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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멸망의 땅 설정상 루시퍼와 동급이라 불리는 벨제붑의 강림.

모든 플레이어에게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켜보기만 해도 기가 빠지는 것 같은 검은 오라를 뿜었다.

앞서 만난 다섯 대악마들이 우습게 느껴질 만큼 강하다.

모두가 멈춰서 있을 때 나는 벨제붑 앞으로 걸어갔다.

“어이, 벨제붑.”

놈이 나를 노려보았다.

“…… 고맙군, 네 덕분에 이 녀석이 나를 깨워줬어.”

“고맙긴. 어차피 깨어날 놈 좀 일찍 깨워준 거지.”

“…… 반갑군, 잠들어 있는 동안에 너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내 이야기? 나는 지옥에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벨제붑이 고개를 저었다.

“내 영역이 겨우 지옥뿐만이라 생각하는가?”

“…… 뭐 악마 왕 출신이니, 인간 세상까지 뻗어 있겠지. 하지만 너는 루시퍼의 왕좌에 갇혀있었을 텐데?”

“놈의 왕좌에서는 나온 지 오래다. 뭐, 아는 놈이 많지는 않지만 말이야.”

“……”

어떻게 나온 것일까? 분명 스스로 풀 수 없는 강력한 봉인이 사지를 묶고 있었을 텐데.

물어보려는 찰나 벨제붑이 말을 이었다.

“김천재, 네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뭐지?”

“뭐?”

“왜 여기에 있느냐 물었다.”

“……”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충분히 알았다. 지옥에서 온 이후로 내 행동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

악마와 손을 잡을 듯 말 듯.

천사와 거리가 있는 듯 아닌 듯.

애매한 포지션을 보여주었기에 영입하려는 수작이 확실하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녀석에게 대답했다.

“여기 있고 싶으니까?”

“…… 크하하! 이 능구렁이 같은 녀석.”

“구렁이라, 그래도 벌레가 아니라서 다행이네.”

“허허-.”

“그나저나 내가 리바이어던을 죽인 건 알고 있나?”

리바이어던의 이야기가 나오자 벨제붑의 표정이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근엄한 표정을 짓던 놈이 눈썹을 움찔거렸다.

“알고 있지.”

“그래?”

내가 벨제붑을 향해 낫을 겨누었다. 놈이 날 끝을 슬쩍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됐다, 너랑은 싸울 마음이 없어.”

“뭐?”

“김천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도록 하지. 내 부하가 되는 것이 어떻겠나?”

“……?”

“나쁜 제안은 전혀 아닐 거야. 네가 내 밑으로 들어온다면 악마로 만들어 강한 힘을 주도록 하지. 일반적인 악마가 아니라, 나와 동급인 대악마 말이야.”

솔깃한 제안이다.

라고 생각할 줄 알았나? 어차피 죽으면 이승으로 갈 텐데 굳이 지금 악마가 될 이유가 없다.

천사가 된다면 몰라도.

게다가 게임 속 악마로 남고 싶지는 않다.

내가 손을 저어 바로 거절했다.

“노우-. 내가 왜 악마가 돼?”

“악마가 되어 힘을 얻는다면, 네가 살던 세상의 지배자가 되는 것도 가능해.”

“지배자?”

“그래, ‘헬 바이블’을 읽었다면 루시퍼 녀석도 내가 악마로 만든 사실은 알고 있겠지.”

“……”

“너도 그 녀석과 마찬가지로 큰 힘을 얻을 수 있어. 내 손을 잡기만 한다면.”

벨제붑이 미카엘과 라파엘을 번갈아 보더니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게임 실력은 좋으나 정신적으로 약한 플레이어들을 꼬드기려는 악마의 유혹.

내가 손을 잡으려 뻗다가,

녀석의 얼굴에 중지를 들이밀었다.

“빠큐다. 내가 왜 너랑 손을 잡아.”

벨제붑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실소했다. 지옥뿐만 아니라 천국과 지상까지 영향력을 끼치는 대악마로 만들어준다는 제안을 거절했으니 당황스러울 만도 했다.

“내 힘이 필요 없다는 건가?”

“그래.”

“…… 후회하지는 않겠고?”

“당연하지.”

녀석이 머쓱해 하며 손을 걷었다.

‘사자의 방’에 모인 모든 플레이어가 놈을 경계하며 진을 펼쳤다.

벨제붑이 플레이어의 얼굴을 한 명씩 전부 둘러보았다.

“강하군, 인간들이 이렇게 강해지기 힘든데 말이야.”

“……”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내가 아직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나중에 다시 오도록 하마.”

벨제붑의 몸에서 강한 오라가 뿜어져 나와 근처에 있는 사무라이 플레이어들을 휘감았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반응하지 못했다.

샥-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사무라이 플레이어들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털썩.

NPC도 아닌 일반 플레이어가 말이다. 그것도 일곱 번째 라운드에 도달한 상위 플레이어.

사무라이의 목이 지면에 떨어지자, 벨제붑이 어둠의 오라로 몸을 휘감았다.

[‘대악마 벨제붑’이 플레이어의 오라를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사망한 플레이어의 몸에서 수증기처럼 오라가 뿜어져 나와, 벨제붑의 오라와 실타래처럼 엮였다.

벨제붑이 손가락을 튕기자 모든 오라가 그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김천재, 다음에 만날 때는 네 목도 가져가도록 하겠다.”

“……”

공기가 무거워지며 놈의 옆으로 화면이 뒤틀렸다.

사탄이 공간을 흔들어 성전의 결계를 뚫었을 때와 같은 능력이었다.

우리 모두 그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덤빌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 마정우.”

정우가 내 옆으로 붙었다.

“어.”

“벨제붑, 이 녀석 생각보다 강한데?”

“약하면 되겠냐, 앞으로 루시퍼랑 싸워야 하는데.”

“그럼 녀석을 이긴 루시퍼는 얼마나 강한 거지?”

“…… 글쎄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예전보다 난이도가 너무 높아졌다.”

“……”

* * * * *

벨제붑이 사라졌다.

그의 오라가 느껴지지 않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확인하며 흔적을 둘러보았다.

한조의 몸으로는 완벽한 부활을 할 수 없다. 불안정한 상태의 벨제붑. 힘을 되찾을 때까지는 루시퍼에게 도전하지 않겠지.

“모두 준비하세요!”

내 외침에 플레이어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혹시나 벌어질 수 있는 돌발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미카엘을 보호해야 한다.

준비를 마친 우리는 노심초사 하는 마음으로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일곱 번째 라운드에 봉인된 대천사가 깨어난다.

그녀만 일어난다면 고대 천사들의 힘으로 우리 모두 천국으로 직행한다.

지옥에서 보내는 일곱, 여덟, 아홉 번째 라운드를 전부 건너서 열 번째 라운드로 말이다.

성전의 시계가 라파엘의 부활을 가리켰다.

[00:00:00]

[시스템 메시지]

[라파엘이 곧 부활합니다.]

[남쪽의 대악마 ‘질투의 리바이어던’이 성전을 향해 공격해옵니다.]

나는 팔짱을 끼고 미카엘을 쳐다보았다. 라파엘의 가슴에서 검날이 빠지는 것이 보였다. 벌써 9할 이상이 뽑혀 있었다.

기존 스토리대로라면 리바이어던을 처치하면 라파엘의 가슴에 박힌 검이 뽑히는 것이지만, 이번에는 단숨에 빠졌다.

팍!

[남쪽의 대악마 ‘질투의 리바이어던’ 처치에 성공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단독 처치에 성공하신 ‘김천재’ 플레이어에게는 특전이 지급됩니다.]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전투 없이 앞서 처리한 리바이어던에 대한 보상이 나왔으니 말이다.

[보상: 뇌전 구슬]

[*뇌전 구슬: 천둥과 번개의 힘을 담은 구슬로 플레이어가 섭취 시 직업에 맞는 특성이 추가됩니다.]

홀로그램 구슬이 내 앞에 만들어지자 다른 플레이어들이 손뼉을 쳤다.

-축하드립니다!

-받을만한 사람이 가져가니 할 말이 없네, 쩝.

-저거 먹으면 전기 속성 마법 쓸 수 있지 않냐? 하…. 부럽다! 네크로맨서가 전기 능력까지 사용한다니.

나는 구슬을 단숨에 삼켰다.

양보 같은 건 없다. 내 스스로가 강해져야 앞으로의 일을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으니 말이다.

꿀꺽.

[‘김천재’ 플레이어가 뇌전 구슬을 섭취하였습니다.]

[네크로맨서 전용 NEW! 특성 개방!]

[플레이어 수하 아래 있는 스켈레톤 병사들이 천둥 신의 힘, 강력한 번개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치지지직.

내 귓가에 스파크 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켈레톤 병사들을 성전 밖에 대기시켜놨는데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들릴 정도의 뇌전이란 말인가?

“…… 좋네.”

미카엘이 라파엘의 가슴에서 뽑은 검을 땅에 내려놓았다.

댕그랑!

[‘라파엘’의 봉인이 풀렸습니다.]

[불타는 성전 안에 있는 모든 천사의 봉인이 풀립니다.]

라파엘의 봉인이 풀림과 동시에 땅이 흔들렸다. 성전 안에 있는 천사 동상들이 조금씩 깨지더니 그 안에서 푸른빛을 뿜어내는 천사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가 적어도 수백은 되어 보였다.

눈을 뜬 라파엘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미카엘, 오랜만이야.”

“라파엘!”

[현 시간부로 일곱 번째 라운드의 첫 번째 흐름이 종료됩니다.]

성전 안을 가득 메운 천사들이 날아올랐다. 플레이어들이 환호하며 그들을 반겼다.

-우와아아아!!! 드디어 천사들이 해방되었다!

-드디어 게임 밖으로 나갈 길이 열린 건가….

-우리 이제 지옥에서 나갈 수 있는 거야?

나는 플레이어들의 대화를 뒤로하고 미카엘에게 물었다.

“미카엘.”

“말해라.”

“내가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놨다. 복귀하도록 하자.”

“…… 네가?”

“그래.”

* * * * *

성전 밖으로 나오자 세계수가 쓰러진 자리에 쏟아져 내리는 빛기둥이 보였다.

마치 우리를 기다리는 듯한 신성한 기운이 느껴졌다.

미카엘이 빛이 쏟아지는 곳에 있는 게이트를 보더니 내게 물었다.

“저건 어떻게 찾은 거지? 루시퍼가 부순 줄 알았는데.”

“…… 녀석도 언젠가는 다시 천국으로 갈 생각이었겠지.”

“루시퍼가?”

“그래, 이유는 모르겠지만 뭐….”

과거 우리 초월자 그룹에서 도달한 것은 열다섯 번째 라운드가 끝이었다.

이 게임의 마지막이라 불리는 열여섯 번째 라운드를 클리어하지 못했기에, 루시퍼가 저 게이트를 남겨놓은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미카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라파엘에게 물었다.

“라파엘, 이곳에 남겠나? 성전으로 돌아가겠나?”

라파엘이 곳곳에 부서진 성전을 보더니 숨을 길게 내뱉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편이 좋겠지? 나 혼자 여기 남아 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좋은 선택이다. 그럼….”

미카엘이 머리 위로 검을 들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천사들이 그의 명령을 알아듣고 높이 날아올랐다.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천국으로 가는 게이트.

출발하기 전 나는 마이클에게 부탁했다.

“마이클, 저기 내 언데드로 변한 베트남 플레이어들 보이지?”

“네엡!”

“전부 살려줘, 신체 훼손율이 5프로 미만이라 가능할 거야.”

“오오- 오케이!”

나는 베트남 플레이어들을 한곳에 모아두고 소환을 취소했다.

영혼이 빠져나간 그들의 몸이 축 처지며 땅에 쓰러졌다.

마이클이 쓰러진 베트남 플레이어들 앞에 서더니 가톨릭의 신부처럼 기도문을 외웠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문]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의 중얼거림이 끝나자 사망한 베트남 플레이어들의 몸에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일 먼저 일어난 베트남 플레이어가 눈을 부비며 내게 물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대화해보니 언데드가 되었을 때의 기억은 하지 못했다.

나는 그들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대충 설명해주었다.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내 손을 맞잡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뭘요, 그럼 이제 이동할 준비 하시죠.”

플레이어들의 이동 준비가 끝나자 미카엘이 게이트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지옥에서의 성스러운 행군이 시작되었다.

악마, 그 누구도 우리를 막지 않았다. 오히려 놈들이 모습을 감추었다.

루시퍼가 아직 왕좌에서 나오지 못하는 상태, 두 명의 대천사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 모두 멈춰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퍼졌다.

전방에서 길을 안내하던 미카엘이었다. 그가 검을 크게 휘둘러 허공을 갈랐다.

굉음과 함께 공간이 갈라졌다.

뭐지?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지옥이 일그러지고 있다는 표현이 제일 어울리는 것 같다.

하늘이 깨진 거울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조각이 되어 지면을 향해 떨어졌다.

투두두두두두-.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미카엘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빨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를 내었다.

쓰읍.

“전원 성전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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