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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혹시나 하고 생각했는데 역시였다. 그녀는 악마에게 세뇌당하고 있는 상태.

왜 나는 빨리 눈치 채지 못했을까?

말도 안 될 정도로 횡설수설하고 검의 파지법을 잊을 정도로 이상한 행동을 보였는데 말이다.

어떠한 경로로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르겠지만, 일이 복잡하게 되었다.

김연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암울하다고 표현할 정도다.

“너를 공격한 놈이 누구지?”

“…… 몰라.”

“적에게 어떤 스킬에 당했는지는 알고 있나?”

“그것도 몰라.”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면 사용주가 지정한 범위 안에서만 기억력이 재생된다.

그녀의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것으로 보아 김연희를 살려낸 자가 여러 가지 정보를 벌써 빼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네 몸을 사용하는 자는 누구고?”

“그건 말 못 해.”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적에 의해 조종당하는 중일 텐데.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하급 병사들에게 당한 것은 아니었다.

“제한된 질문 외에는 대답할 수 없는 거지?”

“응.”

내 행동이 어느 정도 범주까지 허락될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선의 힘인지 악의 힘인지 확인해야겠다.

다른 국가의 플레이어가 공격했을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나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리바이브.”

[생명이 있는 몸입니다.]

생명이 있는 몸을 움직이는 중이라면 분명 악의 힘이다.

선의 힘으로 그녀를 데려갔다면 ‘조종 불가능’이라는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을 테니깐.

“이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나? 너를 살려낸 자가 날개가 있는지 없는지.”

“…… 못해.”

“이름의 앞글자만 대답하는 건?”

“그것도 못 해.”

“내가 이름을 말하면 반응은 할 수 있나?”

“…… 되겠어?”

제약의 범위가 생각보다 넓구나.

“나를 찾아온 이유는 뭐지?”

“…… 그것도 말 못 해.”

“앞에 내게 말한 이야기들은 전부 거짓인가?”

“무슨 이야기?”

“세계수에 관한 것.”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벌써 잊어버린 건가.

“됐다. 우선 거기 앉아있어.”

“…… 싸울 거야.”

“뭘 싸워? 악마들은 벌써 다 처리했는데.”

“누구라도.”

“누구라도? 그럼 나랑 싸우자는 말인가?”

“그것도 괜찮고.”

김연희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참지 못하는 듯 눈까지 충혈되었다. 금방이라도 나를 향해 달려들 듯한 야수의 눈빛.

흐음-.

그녀가 나를 죽이려 했다면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손가락을 튕겨 소리 냈다.

딱!

“오케이. 박규환, 너 잠깐 이 여자랑 놀아줘야겠다.”

박규환이 비틀어진 도깨비 가면을 고쳐 쓰며 내게 말했다.

“같은 그룹원이 아닙니까?”

“맞아. 그러니깐 죽이지는 말고 그냥 놀아주기만 해.”

“…… 알겠습니다.”

오로지 욕구에 의한 움직임.

김연희를 조종하는 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게 무언가를 원하는 놈이다.

‘…… 녀석이구나.’

내가 아는 답은 한 명밖에 없었다.

쉬익- 캉!

박규환과 김연희가 격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이 기회에 김연희의 실력을 다시 살펴볼 수 있었다.

연체동물처럼 유연한 몸놀림과 상대방의 움직임을 순식간에 포착하고 반응하는 순발력.

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검술.

방어형 암살자.

오로지 게임의 후반부만을 바라보며 키우는 캐릭터다.

김연희가 왜 저런 능력을 선호했는지 생각해보면 조영기와의 궁합을 맞추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강력한 마법력을 뒤에서 받쳐줄 방어력.

“…… 그렇군.”

김연희의 단검이 박규환의 가면을 살짝 그었다.

박규환은 자신도 모르게 총을 꺼내어 그녀의 복부를 노렸다.

탕!

총성이 울리는 순간 그가 아차 했다. 잠시 놀아주라고만 했는데 탄을 발사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녀는 총구를 보는 순간 몸을 가볍게 틀어 피했다.

“와! 와! 이거 나를 죽이려고 하네?”

“……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김천재! 너 부하 관리 좀 잘해야겠어!”

생각 정리를 마친 나는 수긍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연희.”

“응?”

“아무래도 사탄하고 내가 다시 만나봐야 할 것 같은데. 지금 불러줄 수 있나?”

* * * * *

사탄을 부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내가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성전 입구에 공간이 뒤틀리며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그래.”

“제가 김연희 씨의 몸에 숙주를 넣어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핫.”

비열한 표정으로 하는 존댓말.

정말이지 역겹게 느껴졌다.

“…… 김연희를 내게 넘겨라.”

“응? 이분을요?”

“그래.”

“허허허…. 갑자기요? 죄송하지만 이분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입니다만.”

사탄이 김연희의 목을 잡아들었다.

그녀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신음을 내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정신을 지배당하고 있는 이상 주인에게 반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깐.

나는 낫을 가볍게 휘둘러 녀석의 손을 노렸다.

사탄이 김연희를 틀어 내 공격을 막으려 했다.

내 날붙이의 끝이 김연희의 이마에서 멈추었다.

“…… 빌어먹을 새끼가.”

“어이쿠? 이거 조금만 더 오셨으면 소중한 연희 씨 머리통이 아작났겠는데요.”

“같이 손을 잡자더니. 이 무슨 개짓거리야?”

“에? 그건 제가 천재 씨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말인데요. 리바이어던을 처리하기 위해 같이 손을 잡기로 하신 분이 왜 천사들을 위해 성전을 막고 계신 거죠?”

나는 사탄을 노려보며 낫을 천천히 당겼다.

“내가 말했잖아. 나는 모두를 죽일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

“나는 천사, 악마 둘 다 가리지 않고 전부 죽일 생각이야.”

“진심이셨습니까?”

“진심이야.”

“…… 크흐흐흐!”

사탄 녀석이 김연희를 땅에 내동댕이치더니 배를 잡고 웃었다.

한낱 인간이 선과 악, 모든 존재를 멸망시킨다니. 녀석의 처지에서는 웃음이 나올 만도 했다.

김연희가 짓눌린 목을 잡고 콜록거렸다.

나는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며 사탄에게 되물었다.

“김연희를 풀어줘.”

“…… 싫다면요? 그리고 숙주가 몸을 지배한 이상 그녀의 몸은 제 것입니다.”

“권리를 포기하도록 해. 그럼 숙주 또한 몸에서 나가잖아?”

“……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신 거죠?”

[시스템 메시지]

[분노의 대악마 ‘사탄’의 의문이 강해집니다.]

[강해진 의문만큼 그의 판별력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나는 네크로맨서다. 네가 사용하는 ‘타락자의 손길’ 능력도 결국 소환 계열. 내가 소환의 권리를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 소환의 권리는 지옥 법전에만 나와 있는 내용인…. 데?”

“아- 그 헬 바이블? 그건 이미 전부 읽었지.”

사탄이 화들짝 놀라며 날개를 펼쳤다.

“당신이 헬 바이블을 읽었다고?”

“그래. 왜? 내용도 한 번 읊어줘? 제 1조 제1항 지옥의 악마들은 루시퍼에게 절대로 반기를 들 수 없다. 1조 제 2항 루시퍼에게 반기를 든 악마는 모든- ”

“그만, 겨우 인간 주제에 헬 바이블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나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보통 인간이 아니니깐.”

이번 라운드의 모든 정보는 이미 꽤 차고 있다. 특히나 지옥의 법전인 ‘헬 바이블’ 속 내용은 전부 암기가 되어있었다.

악의 힘을 사용하는 네크로맨서가 다음 단계로 성장하려면 필수인 코스니깐.

사탄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 김천재,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내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이 여자를 넘겨줄 수 없어.”

녀석이 흥분했는지 갑자기 반말했다. 시스템 상에서도 녀석의 기분을 표현할 때 존댓말과 반말로 나누어 놨었는데, 그때와 딱 맞는다.

“네 조건?”

사탄이 아까 전과 같은 조건을 내게 말했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표정으로 말이다.

“그래. 이 여자를 찾고 싶으면 리바이어던의 위치를 먼저 알아내.”

“……”

지금은 리바이어던의 행방을 알려 줄 수 없다. 그가 사망한 사실을 안다면 사탄 녀석이 기고만장해져서 플레이어들 더욱 압박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녀석이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내 근처에서만 얼쩡거리는 이유도 오직 리바이어던을 견제하기 위해서니깐….

“…… 리바이어던만 찾아 주면 되는 거지?”

“그렇지. 분명 심안으로 보았을 때 너는 그 녀석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어.”

“……”

“하지만 너는 리바이어던을 찾을 방법을 알고 있다. 내가 만든 공간에서 나왔을 때부터 이곳으로 오는 길, 그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생각해보니 답이 나오더군.”

“……”

나는 어깨를 으쓱거린 후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리바이어던은 그 쓰레기 마을에서 나오지 말라는 루시퍼 님의 명을 어긴 것을 겁내고 있지.”

“그래서?”

“그러기에 자신과 같은 뜻을 가진 벨제붑을 찾아 반란을 꿈꿀 거야.”

“……”

“그 말은 즉, 벨제붑이 숨어 있는 곳을 찾으면 다시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겠지.”

사탄,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혹시라도 내가 리바이어던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녀석의 말대로 스토리를 진행하려 했다.

지옥에서 최고의 모략가라고 불릴 만한 녀석이다. 내가 리바이어던의 행방을 모른다는 점에서 생각을 끝내지 않았다.

현재는 리바이어던의 행방을 모르지만, 찾을 방법은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네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해보자.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리바이어던을 찾을 수 있다는 거지?”

“네가 헬 바이블의 내용을 알고 있다면 벨제붑의 위치도 알고 있다.”

“……”

“김천재, 분명 계약서에 서명했었지? 리바이어던을 찾아 주기로.”

나는 석연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두 시간. 두 시간만 여유를 줘, 그럼 리바이어던의 행방을 찾아 주도록 하지.”

“두 시간?”

“그래, 두 시간. 내가 놈을 찾아서 너를 찾아가도록 하지.”

* * * * *

사탄이 떠났다.

내게 두 시간이라는 여유가 생겼다. 이번 라운드의 내 계획이 더욱 완벽해졌다.

앞으로 세계수가 쓰러질 동안은 시간을 확실하게 벌었으니 말이다.

김연희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땅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발끝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툭 친 후 던지듯 말했다.

“김연희.”

“…… 왜.”

“전부 잘 될 테니깐 너무 걱정 하지 마.”

“…… 알았어.”

쿠웅!

땅이 크게 울렸다.

정우가 세계수를 칠 때마다 미세하게 느껴지기는 했는데, 이 정도로 강한 울림은 처음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세계수를 보았다. 천천히 넘어가고 있는 불타는 가지들이 보였다. 타이밍이 너무 좋다.

세계수가 중심을 잃고 쓰러진다.

멀리서 악마들의 포효가 들려왔다.

지옥의 중심을 말해주는 매개체가 쓰러졌으니 녀석들 또한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이제 그 녀석이 움직이겠구나.’

쿠궁!

건물 철거 현장에서나 들어볼 법한 굉음이었다. 그저 나무가 고꾸라졌을 뿐인데 강한 모래바람이 불어 주변을 집어삼켰다.

내가 서 있는 성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플레이어들은 순간적으로 손을 올려 눈과 코, 입을 막았다.

[지옥의 중심을 잡아주는 세계수가 쓰러졌습니다.]

[현 시간부로 지옥과 천국을 이어주는 게이트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원하던 메시지가 홀로그램으로 보였다.

선과 악이 크게 대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지옥과 천국을 연결하는 유일한 게이트.

[‘멸망의 게이트’가 현 시간부로 개방됩니다.]

[모든 플레이어는 게이트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두 번의 공격만 더 막으면 이번 라운드는 끝난다.

북쪽과 동쪽이 끝났으니, 그다음으로 서쪽을 막으면 내가 있는 남쪽은 저절로 처리될 것이다.

보스 없는 보스전이겠지만 말이다.

김연희가 쓰러진 세계수를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마정우와 다른 플레이어들이 복귀할 텐데, 그들에게 할 말이 없겠지.

“김천재, 나 이제 어떻게 해?”

“너 혹시 우리 계획에 대해서도 사탄에게 말해줬나?”

“……”

침묵으로 충분한 대답을 받았다.

알고 있었다면 다른 반응을 보였겠지. 어차피 사탄과의 정령의 맹약 때문에 제대로 대답하기도 힘들겠지만 말이다.

“정우한테는 내가 귀띔할 테니깐 걱정하지 말고. 평소처럼 행동해.”

“…… 알겠어.”

“최전방에 배치해 줄 테니 전투 욕구는 거기서 풀도록 하고.”

“응.”

잠시 숨 좀 돌리려고 하는데, 또다시 악마들이 성전을 향해 찾아오기 시작했다.

파충류 형 악마들이었다.

거북이, 도마뱀, 악어 같은 녀석들이 사람이 입는 것과 똑같은 갑주와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 악마들의 보스는 탐욕의 마몬.

하급 병사들을 보내 상대방의 전력을 확인하는 신중한 녀석이다.

‘……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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