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유소라가 붉은 주사기를 만들어 마정우의 팔뚝에 놓아 주었다.
정우의 몸이 부풀어 오르며 헤비급 보디빌더처럼 커졌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도끼의 손잡이를 꽉 쥐며 기합을 불어넣었다.
“흐아아아압!”
이어 크게 휘두른 그의 도끼가 세계수의 밑동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쾅!
불타는 세계수가 흔들리며 잿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땅이 흔들릴 정도였으니 다른 악마들도 눈치를 챘을 것이다.
마정우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도끼질해나갔다.
같이 따라온 다른 플레이어들이 악마들을 상대하며 시간을 끌어 주었다.
잠깐의 전투만으로도 그들의 전력을 알 수 있었다.
안정적인 사냥에 탁월하다고 소문난 직업, 기사 중에서도 성스러운 힘을 사용하는 왕궁 성기사.
열댓 명의 플레이어가 전원 성기사였다. 모두 같은 직업이었지만, 그들의 선택은 존중할 만하다.
죽음에 제일 거리가 먼 직업이니 위험도가 굉장히 높은 이곳에서 최고로 선호되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악마들이 들끓는 지옥에서 성스러운 힘을 사용하는 직업은 1티어 클래스.
정우가 그들을 보며 기분 좋은 얼굴을 하더니 다시 나무를 내리찍기 시작했다.
“마이클!”
마이클이 망원경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크게 소리쳤다.
“오케이!”
마이클이 유탄 발사기로 하늘을 조준하더니 주문을 외웠다.
[천사의 찬가]
그가 스킬을 사용하자 빛나는 원형 구가 하늘로 날아가 폭죽처럼 터졌다.
쏟아져 내리는 빛이 주위를 감싸 안았다. 상처를 입은 플레이어들이 치료되고 악마들의 몸이 녹아내렸다.
-키야야악!
이 광경을 지켜보던 김연희가 단검을 굳게 쥐었다.
“마정우! 내가 도울 건 없나?”
쾅!
마정우가 도끼를 내려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대답했다.
“후우- 아직, 때가 안 왔어.”
“그게 언제인데?”
“세계수가 쓰러진 이후.”
“세계수가 쓰러진 이후?”
“그래. 세계수가 쓰러지면 이곳에는 새로운 게이트가 열린다. 게이트에 대해서는 아직 설명하지 말라고 했으니 기다려.”
김연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누가 설명하지 말라고 했는데?”
“천재가.”
“김천재? 왜지?”
“…… 그건 곧 알게 될 거야.”
* * * * *
끝없이 몰려오는 악마들을 상대하고 있는데.
띠링!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도착했다,
[일곱 번째 라운드의 메인 이벤트, 첫 번째 보스가 곧 도착합니다.]
[남은 시간: 10:04:59]
벌써 두 시간이나 흐른 건가.
그저 전투를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이번 라운드의 첫 번째 보스가 도착하게 되었다.
물론 남쪽을 담당하는 리바이어던은 사라져 버렸으니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묵묵히 이곳을 지키고 있기만 하면 될 뿐.
그나저나 첫 번째 보스로 누가 나오게 될 것인가? 이번 라운드의 보스는 임의로 출현하기에 알 수 없지만 전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은 확실하다.
한 마리 한 마리가 멸망이라는 단어에 가까운 힘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리바이어던은 약점이 너무나도 치명적이라 나 혼자 처리할 수 있었지만, 다른 악마들은 그게 불가능하니….
탁. 탁. 탁.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고개를 들어 세계수를 보니 흔들리고 있었다.
땅을 타고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
거리가 꽤 되는데도 불구하고 정우의 힘이 이곳까지 느껴졌다.
“잘하고 있으려나.”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가웨인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발록의 머리를 들고 와 내 앞에 두었다.
털썩.
“주군, 임무를 마쳤습니다.”
“…… 잘했다. 잠깐 계단에 앉아서 쉬고 있도록 해.”
“옙!”
나는 발록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리바이브 주문을 외웠다.
[‘발록’은 인구수 10개를 사용하는 특급 소환수입니다.]
[스킬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지금 내게 남은 인구수는 오직 1개. 조금 전에 헬 하운드한테 당한 임프 뿐이었다.
“…… 잠시 대기.”
[소환 대기 상태에 들어갑니다.]
앞서 소환한 악마들의 수명을 다할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내가 발록의 머리를 보며 만족스러워하고 있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에 젖은 박규환이 계단을 올라왔다.
“후우-. 임무를 마쳤습니다.”
박규환이 반쯤 감긴 눈으로 데몬의 머리를 들고 왔다.
무리했는지 갑주가 많이 찢겨 있었다.
“…… 수고했어. 너도 계단에 앉아서 좀 쉬고 있도록 해.”
“알겠습니다.”
가웨인과 박규환이 서로를 슬쩍 쳐다보았다. 나는 그들을 모른척하며 두 개의 머리를 내 옆에 두었다.
발록과 데몬이라.
일반 악마 병사들은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몬스터가 아니던가.
‘이렇게 순조로워도 되는 건가.’
마의 난이도라는 일곱 번째 라운드가 말이다.
[현 시간부로 일곱 번째 라운드, 메인 이벤트의 첫 보스가 등장합니다.]
[정욕의 왕 ‘아스모데우스’가 필드에 출현하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시작되는구나.
아스모데우스라면 사탄의 단짝으로 신계의 최대 적이라 불리는 놈이 아닌가?
파괴의 왕이라고 불리는 녀석이 제일 처음 보스로 나오다니….
-꺄아아아아악!
동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사, 살려줘. 나 죽는다!
뒤이어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거긴 중국 플레이어들이 있는 곳인데 어떻게 된 거지?
“…… 벌써 온 건가.”
나는 동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대충 예상이 되지만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녀석들을 도우러 가자고 이곳의 병력을 동쪽으로 보낸다면 내가 위험해질 테고.
내가 직접 가자니 지휘관이 없는 부대가 된다는 생각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쉬고 있는 가웨인과 박규환을 보았다.
둘도 많이 지친 상태라 다른 전투에 보낼 수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자리를 지키는 것뿐.
“…… 제길.”
아스모데우스가 그렇게 위력적인 보스였던가?
아무리 파괴의 왕이라 불리는 아스모데우스라도 중국 플레이어 전원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힘들다고 생각했다.
열 명도 아니고, 스무 명이나 되는 고수 플레이어들이니깐.
게다가 게임이 시작되고 2시간밖에 흐르지 않은 지금은 아직 게임의 초반부.
천사의 부름이 있는 상태에서 악마들에게 당할 일은 없을 텐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지.’
내가 모르는 5년의 공백 동안 새로운 악마들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겠구나.
사탄 녀석도 무희의 기술인 ‘거울의 방’을 가지고 있었으니 아스모데우스라도 무언가 새로운 능력을 갖추고 있겠지.
“흐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일곱 번째 라운드는 이벤트 진행에 실패한다면 전부 사망이다. 다시 돌아갈 방법도 없는 라운드.
동쪽이 무너지면 다 같이 끝난다.
“…… 어쩔 수 없지.”
나는 천천히 전장으로 걸어 나가 낫으로 내 병사들을 베어냈다.
단방에 임프 여러 마리와 헬하운드의 목이 떨어졌다.
쓰러진 놈들의 수를 세어보니 넉넉하게 스무 마리였다.
“리바이브.”
[용암 지대를 지키는 군단장 ‘발록’을 되살려냅니다.]
-*발록: 불타는 채찍으로 적의 살덩이를 찢어내는 강력한 대형 악마입니다.
[천공의 지배자 ‘데몬’을 되살려냅니다.]
-*데몬: 날카로운 손톱과 고속 이동이 가능한 날개를 사용하여 적을 목숨을 단숨에 빼앗습니다.
두 마리의 대형 몬스터가 내 앞으로 소환되었다.
[현재 남은 인구수: 159:160]
나는 근엄한 표정으로 녀석들에게 명령했다.
“다른 악마들이 성전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해라.”
음소거 모드의 두 악마가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들을 왜 음소거 모드로 해놨냐고? 악마형 몬스터는 입이 거칠기 때문에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발록이 불타는 채찍을 휘둘러 소형 악마들을 휩쓸었다.
데몬이 빠르게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성전 근처에 날아다니는 가고일들을 찢어 갈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위력을 확인한 후 다시 성전 앞으로 돌아왔다.
“가웨인, 너는 기사단장의 경험이 있으니 스켈레톤 부대를 지휘하도록 해. 성전의 입구만 잘 지키면 된다.”
가웨인이 대검을 땅에 꽂으며 대답했다.
쿵.
“맡겨주십시오.”
“박규환, 너는 내가 소환한 악마 병사들을 데리고 전장을 누비도록 한다. 하급 악마들은 신경 쓰지 말고 적장의 목만 챙기도록.”
박규환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들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 * * *
나는 성전 내부를 통해 동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위급한 상황이라 병사들을 이동시킬 수 없기에 혼자 가게 되었다.
높은 기둥 길을 넘어 동쪽 문으로 나가자 악마들과 대립 중인 중국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대부분이 소림사 복장을 하고 있었다.
전투할 때와 평상시의 옷이 다른 건가? 아까 내가 본 그들의 의상과 전혀 달랐다.
-하아아압!
그들 중 한 명이 기다란 나무 봉을 휘둘러 악마들을 쳐냈다. 봉 끝에 초록빛이 감도는 것으로 보아 마법사의 ‘웨폰 인챈트’ 스킬이 적용되었나보다.
‘…… 아무 문제도 없는데?’
중국 플레이어들은 너무나도 잘 싸우고 있었다. 오히려 악마들을 압도적으로 누르며 녀석들의 시체를 탑처럼 쌓아갔다.
나는 그들의 우두머리인 드루이드를 찾아갔다.
“괜찮으십니까.”
드루이드가 곰에서 내려 내게 대답했다.
“예. 남쪽은요?”
“없습니다. 살려달라는 비명이 들려서 와봤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네요?”
“살려달라고요? 그럴 리가…. 저희는 부상자도 없는데요.”
“그래요?”
“예. 이번 보스인 아스모데우스가 찾아오긴 할 건데, 아마 이곳에 도착하려면 삼십 분 정도는 더 걸릴 거예요.”
“…… 그렇죠.”
하긴.
악마 보스의 소환지인 루시퍼의 침실은 이곳에서 거리가 꽤 되니깐. 곧장 이동을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좀 걸리겠지.
드루이드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내게 말했다.
“혹시 잘못 들으신 거 아닙니까?”
“…… 그런가 봐요.”
“하하하하! 천하의 고인물 플레이어님도 이런 실수를 하시는군요.”
“실수라, 그런가?”
“이렇게 바쁜 상황에 따로 시간을 내서 나올 정도면 실수이지요.”
“…… 그렇다고 하죠. 그럼 저는 다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옙! 수고하십시오.”
“예, 그럼 이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남쪽을 향해 걸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성전 내부를 통해 걷는 동안 계속 생각해 보았지만, 아까 들은 비명은 분명 동쪽이었다.
-꺄아아아악!
또다시 비명이 들렸다.
이번에는 남쪽이다.
“응?”
그럴 리가.
저쪽은 내가 달려온 방향인데 말이야.
전속력으로 복도를 달렸다.
성전의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내 충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박규환과 가웨인이 성전 앞에서 서로에게 검을 맞대고 있었다.
“…… 너네 뭐하냐.”
내 목소리에 둘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갑자기 분노가 끓어올랐다. 성전 입구를 잘 지키고 있으라는 내 명령을 무시하고 둘이 싸우고 있다니.
가웨인이 갑자기 무릎을 털썩 꿇더니 내게 말했다.
“주군! 저 녀석은 박규환이 아닙니다. 지옥의 대악마 중 한 명인 사탄입니다.”
“…… 뭐?”
박규환이 그에 질세라 똑같이 무릎을 꿇었다.
“아닙니다! 저 호랑이 녀석이 빌어먹을 사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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