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격투기 체육관 같은 넓은 공간에 유소라와 내가 빠르게 뛰어다녔다.
“시선은 항상 제 가슴 쪽을 향하고, 전체적인 움직임을 봐야 해요.”
“하아…. 하아…. 알겠어요!”
그녀는 자신의 팔뚝에 주사기를 놓더니 부풀어 오른 몸으로 내게 덤벼들었다.
약물로 폭발적인 힘을 불어오는 제천대성(齊天大聖)의 힘.
부웅-
허공에 휘두른 주먹이 ‘팡!’ 소리와 함께 파열음을 내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피한 후 그녀의 발목을 걸어 쓰러뜨렸다.
털썩.
“하아…. 하아…. 더…. 이상 못하겠어요. 천재 씨.”
땀범벅이 된 유소라가 나를 올려 보았다.
“그럼 회복 주사 맞으시고, 다시 시작하도록 하죠.”
“……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예요?”
“죽지 않을만한 실력을 갖출 때까지요. 내일은 제가 챙겨드리지 못할 거예요.”
이제부터는 나도 이기기 힘든 적들이 몰려온다.
내 몸 챙기기도 힘든데 다른 이들까지 도와줄 수는 없으니, 스스로 강해지도록 만들어야 했다.
유소라는 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단번에 파악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임무 수행을 나간 다른 이 들이 돌아올 때까지 계속해서 싸웠다.
반나절이 지나자 그녀는 내 움직임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주사기의 활용법을 완벽하게 터득했다.
정우에게 배운 도망의 기술도 중요하지만, 언젠가는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순간이 올 테니 전투도 중요하다.
유소라가 기절하듯 뒤로 쓰러졌다.
털썩.
겨우 숨만 붙어있었다.
주사기로 체력과 생명력은 회복할 수 있어도 정신적 피로감은 그대로니, 말이다.
“그, 그만.”
“……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후우…. 이제부터 나오는 몬스터들은 전부 천재 씨보다 강하다는 거죠?”
나는 담뱃불을 붙이며 대답했다.
“이제 만날 몬스터 중에 저보다 약한 놈은 없을 거예요.”
“……”
“죽기 싫으면 강해지세요.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남는 건 이번 라운드가 마지막입니다.”
유소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벌떡 일어나 내게 물었다.
“천재 씨는 여기서 나가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응? 그게 무슨 말이죠.”
“게임 밖으로 나가면 어쩌실 거냐고요.”
전혀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다.
게임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니?
뭐 오랜 백수 생활을 끝내고 취직이라도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물어보니 모르겠네요. 우선은 나가서 생각해보려고요. 뭘 해도 여기보다는 나을 것 같아요.”
“…… 그렇군요.”
유소라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미소.
‘이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 * * * *
조영기와 김연희가 돌아왔다.
지하 수로에 숨어있는 주민들을 찾아왔다.
[현재 생존 주민 수: 307명]
다행이다.
누적된 주민의 수가 삼백 명이 넘었으니 말이다.
이제 구출한 주민들을 잘 지키기만 하면 이번 라운드를 안전하게 끝낼 수 있다.
쿵! 쿵! 쿵! 쿵!
망치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이클과 함께 돌아온 김승현의 아버지가 찌그러진 부품들을 다시 원 상태로 되돌린다며 열심히 정비 중이었다.
모든 일이 계획안에서 잘 흘러가고 있다.
불길할 정도로 말이다.
“…… 정우야, 방어 시설은?”
“전부 문제없더라. 생각해보니 에이도스에 맡겨도 될 일인데 왜 나한테 가보라고 했냐?”
“직접 눈으로 보는 게 확실하니깐. 기계는 한계가 있잖아.”
“…… 여긴 우리가 살던 곳이 아니야. 기계가 더 똑똑해.”
“그렇긴 하지, 근데 똑똑한 거하고 일을 확실하게 처리하는 거 하고는 다르잖아.”
정우 녀석이 괜스레 내 어깨를 툭 쳤다. 이 대사는 그가 항상 내게 하던 말이기 때문이다.
마정우.
어렸을 적부터 머리가 좋지는 않지만 일 하나는 확실하게 처리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던 터라, 더욱 그런 것 같다.
“천재. 메인 이벤트가 몇 시에 시작되지?”
“예상대로라면 아침 7시일 거야. 스토리 흐름이 바뀌었다고 했으니 더 일찍 올 수도 있고.”
“…… 시간 널널하네. 그럼 남는 시간 동안-.”
쿵!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물잔이 땅에 떨어져 깨졌다.
김연희가 균형을 잃고 발을 동동 구르며 내 쪽으로 몸을 기대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털썩!
“악! 이 미친놈아!”
“아, 미안하다. 일부로 그런 건 아니야.”
“아오…. 엉덩이야.”
마정우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김천재, 설마 이거….”
“맞아. 에이도스, 로봇 기체들을 전부 탑 근처로 이동시키고 탑 내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깨워.”
[‘에이도스’가 김천재 님의 명령을 하달합니다.]
[현재 메카니아에 존재하는 모든 로봇 기체가 탑 주위로 모여듭니다.]
[경고 사이렌을 울려 모든 주민과 군인을 기상시키겠습니다.]
-위이이이이이잉!!!
우리는 창밖을 내려 보았다.
저 멀리서 몰려오고 있는 거인 무리가 보였다.
백 마리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야 김천재…. 우리 X 된 것 같은데?”
천 마리는 되어 보인다.
“…… 튈까?”
“튀자, 이건 절대 못 이겨.”
“오케이, 모두 전투는 포기하도록 하고 게이트로 도망갈 준비를 한다.”
[‘에이도스’ 님이 게이트는 전부 닫혔다고 합니다.]
갑자기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독백했다.
“게이트가 닫혔다고?”
탑 밖에서 거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기세가 얼마나 강했는지 흔들림이 멈추지 않았다.
거인 중 제일 약한 개체, 단 한 마리를 잡는데도 우리 모두가 덤볐어야 했는데,
그런 놈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몰려오고 있다.
[메인 이벤트 시작과 동시에 게이트 가동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나는 마정우를 보았다.
마정우가 유소라를 보았다.
유소라가 마이클을 보았다.
마이클이 조영기를 보았다.
조영기가 김연희를 보았다.
김연희가 나를 보았다.
우리가 동시에 외쳤다.
-이런 X바알!
[보스 발견]
[여섯 번째 라운드의 메인 보스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타이탄’의 기억 속에 있는 파편을 발동시켜 스토리 영상을 재현합니다.]
몸이 굳었다.
모두 불안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이내 하얀 연기가 주위를 감싸더니 나를 메카니아의 과거로 보냈다.
유체이탈을 겪는 것처럼 내 영혼이 하늘을 날아다녔다.
푸른 하늘, 먼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맑은 공기가 메카니아에 불어왔다.
기계 문명답게 내가 살던 곳보다 훨씬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기기들이 도시 곳곳에 널려 있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
건물의 벽면을 기어 다니며 청소하고 있는 문어 로봇.
택배를 운반하고 있는 새 모양 드론.
-어여! 승현 아부지. 시간 날 때 우리 집 로봇 청소기 좀 고쳐줘!
땀을 뻘뻘 흘리며 자동차를 정비하던 중년이 대답했다.
“그려, 오늘은 바쁘니 내일 가도록 할게!”
행복해 보인다.
멸망하기 전 초고도 기계 문명을 가진 도시, 메카니아 말이다.
승현의 아버지는 자동차 수리를 마치더니 거미같이 생긴 로봇을 타고 자리를 옮겼다.
그가 걷는 곳마다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다. 이 도시 최고의 메카닉이다 보니 이런 대우는 당연했다.
‘대통령 출마해도 되겠는데?’
거미 같은 로봇을 타고 도착한 곳은 이 도시 중앙에 있는 탑.
메카니아 컨트롤 타워.
승현의 아버지가 거미 로봇에서 내려 탑으로 들어갔다.
터벅. 터벅. 터벅.
로비를 지키고 있는 안내원이 인사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안녕하신가, 총독이 찾으신다고 해서 왔는데 말이야.”
“아! 총독님은 지금 102층, 마지막 층에 대기하고 계십니다.”
“나 혼자 올라가도 될까?”
“그럼요. 강대원 님은 우리 도시의 영웅이신대요.”
김승현의 아버지, 강대원은 기분이 좋았는지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만. 그럼 나는 총독님의 방으로 이동하도록 하겠네.”
강대원이 엘리베이터에 타더니 안내 로봇에게 말했다.
“마지막 층으로.”
-마지막 층, 102층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위이이잉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고속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띵!
문이 열렸다.
총독은 안내원에게 보고를 받았는지 문 앞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강대원!”
“부르셨습니까, 총독님.”
“아이고 대원아, 여기에는 우리밖에 없는데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지 말아.”
“…… 그래.”
둘은 어깨동무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절친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우애가 깊어 보였다.
이어 강대원과 김수현은 학창 시절의 무용담 같은 잡다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술도 한잔 걸치고 말이다.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던 김수현이 눈빛을 바꾸었다.
“대원아.”
“…… 왜?”
“부탁 한 가지만 해도 되냐?”
대원이 멍한 표정으로 술잔을 쳐다보았다.
“들어보고.”
“나 전투용 로봇 좀 만들어 줘라.”
“그건 안 돼. 예전부터 말했지만, 전투에 쓰이는 로봇은 만들지 않아.”
“왜? 다른 병기들은 잘만 만들면서, 로봇은 안 된다는 거냐?”
대원이 수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김수현은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야, 내가 이 도시를 지키려고 만들어달라고 하는 거지. 뭐 딴 짓 하려고 너한테 부탁하겠냐?”
“로봇은 위험해.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면 정말 큰일 날 수 있어.”
“나 말고 아무도 안 쓴다니깐?”
“그건 모르는 거지.”
“하…. 참. 나 못 믿어?”
“아니. 너는 믿는데, 다른 사람들을 못 믿어. 특히 지금 너와 함께하는 인공지능 시스템, 에이도스.”
갑자기 젊은 여성 모습의 푸른색 홀로그램이 땅에서 튀어나왔다.
에이도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대원에게 말했다.
“저를 왜 못 믿으신다는 거죠?”
강대원이 혀를 차더니 잔에 담긴 술을 에이도스에게 뿌렸다.
촤륵!
“인간이 아니니깐.”
“…… 저도 인간과 같은 사고방식을 할 수 있습니다.”
“사고방식은 동물도 할 수 있어.”
“그들과는 지능이 다릅니다.”
“인간도 동물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 지능이 낮으면 너보다 밑으로 취급한다는 말 아니냐?”
에이도스가 대답을 멈추었다.
김수현이 에이도스와 대원을 번갈아 보더니, 눈치를 보며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자-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합세.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김수현. 전투 로봇에 대해 이야기할 거면 다시는 나를 부르지 마.”
“아이고…. 안 할게! 안 하면 되잖아. 미안하다 임마.”
김수현이 에이도스에게 물러나라며 손짓을 했다.
에이도스가 땅 밑으로 꺼졌다.
나는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강대원이 에이도스를 왜 이렇게 싫어하는 걸까….’
저런 대사는 처음 보는데 말이야.
실랑이가 끝나자 무대 위 커튼이 쳐지듯 안개구름이 내 눈을 가렸다.
나는 두 눈을 감고 다음 장면을 기다렸다.
-크하아아아악!
괴성에 내가 눈을 떴다.
“…… 시작된 건가.”
하늘이 불타고 있다.
도시 반대편에 만들어진 게이트에서 악마들이 쏟아져 나왔다.
흔히 임프라고 불리는 네 발로 걷는 소(小)악마들이 땅을 빠르게 뛰어 도시로 향했다.
수백, 아니 수천!
놈들의 뒤를 따라 다른 악마들도 도시를 습격했다.
루시퍼의 명을 따르는 지옥의 하수인들이었다. 도시는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고성능 슈트를 입은 보병들이 총을 쏘며 악마들과 맞서 싸워보려 했지만, 병력의 차이가 너무나도 컸다.
투두두두두!
콩 벌레 같은 악마 놈이 땅을 박차고 나가 보병 사이를 뚫었다. 피부가 얼마나 단단했는지 총으로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그들의 중간에 도착한 콩벌레가 몸을 펴더니 독가스를 뿜어냈다.
-키에엑!
보병들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목을 잡고 쓰러졌다.
“물러서지 마라!”
장성급 군인으로 보이는 자가 화염 방사기로 불을 뿜어냈다.
콩벌레가 녹아내렸다.
그의 외침과 함께 어디선가 나타난 전투기들이 지상에 있는 악마들에게 포탄을 쏟아부었다.
콰과광!
그것도 잠시, 가고일 수백 마리가 크게 날갯짓을 하며 날아와 입으로 화염구를 쏘아댔다.
쾅!
비행기가 하나둘씩 격추되기 시작했다. 방사포와 탱크로 막아보려 했지만, 뒤이어 나타난 거인들이 지상에 있는 병력을 휩쓸었다.
그 어느 곳보다 뛰어난 문명을 자랑했던 메카니아가 단 하루 만에 멸망의 길로 돌아섰다.
위이이이잉.
하늘에서 노란빛이 하나 떨어졌다.
쾅!
이어 네 개의 날개를 달고 있는 천사 한 명이 도시에 내려왔다.
‘미카엘.’
그는 황금 검을 뽑아 들더니 악마무리를 향해 날아갔다.
가고일들이 그의 앞을 막았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천사가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두르자, 가고일의 몸이 두 동강이 나며 사라졌다.
가고일들이 당하자 악마무리에 숨어있던 검은 피부의 남성이 날아올랐다.
사악한 오라를 뿜어내는 뿔이 달린 남성. 그는 날개가 없었는데도 하늘을 날 수 있었다.
“오랜만이야 미카엘.”
“…… 루시퍼. 계약 위반이다.”
“계약? 나는 너와 계약한 적 없는데.”
“신께 약속하지 않았나.”
루시퍼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신과 한 약속을 지켜야 하지?”
* * * * *
하얀 안개가 내 앞을 가렸다.
다시 눈을 뜰 수 있게 되었을 때는 멸망한 땅에서 악마들에게 붙잡힌 미카엘이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루시퍼가 그의 머리를 밟더니 거인 중 한 명에게 말했다.
“어이 너, 이 녀석을 삼켜.”
거인이 두려운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알겠습니다.”
다른 거인들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미카엘을 삼키자 곧 누구보다도 더욱 큰 덩치를 가지고, 압도적인 힘이 느껴지는 존재로 변했다.
악마들이 그를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모습이 변한 거인은 자신의 힘을 믿을 수 없는지 환희의 얼굴로 포효했다.
“크하아아악!! 힘이…! 엄청난 힘이…!!!”
루시퍼가 그를 보며 웃었다.
“네 이름은 타이탄, 오늘부터 지옥의 입구인 이곳을 지키도록 해라. 절- 대로, 신이 보낸 자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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