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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공허한 방안에 시계 초침 소리가 울렸다. 기계 문명이 발달한 곳에서 전자가 아닌 아날로그식 시계를 쓴다니.

설정 오류인가?

아니면 오히려 아날로그여서 희귀한 물건이라 취급되는 건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보는 데 지장은 없었다.

똑- 딱. 똑- 딱.

멸망의 땅을 오래 해온 유저라면 모두 알고 있는 여섯 번째 라운드의 진실이 있다.

이 탑을 움직이는 AI는 새벽 4시가 되면 잠시 가동을 멈춘다. 그에 맞춰 모든 기기가 움직이지 않게 되고, 플레이어의 활동에 제한이 걸린다.

물론 이곳에서는 그 반대의 입장이다.

나를 감시하고 있는 장비들이 전부 멈추면 오히려 행동하기 쉬워지니깐 말이다.

“…… 앞으로 일 분.”

시곗바늘이 3시 59분을 가리켰다.

지금은 모두가 깊이 자고 있을 시간이다.

물론 몇몇은 일이 있어서 깨어 있겠지만 말이다.

나는 10초를 남기고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마음속으로 세었다.

1…. 2…. 3.

삐빅.

방안에 설치된 CCTV의 빨간불이 꺼졌다.

‘지금이다.’

쾅!

나는 문을 박차고 나가 복도 반대편을 향해 달렸다.

엘리베이터 앞을 지키고 있는 보초병 두 명이 나를 보며 소리쳤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NPC 주제에 졸고 있었나?

잠시 머뭇거리던 놈들이 총구를 들어 나를 겨누었다.

“멈추지 않으면 쏘겠습니다!”

그들은 총을 쏠 수 없었다.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그들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부웅-

보초병이 들은 것은 그저 바람 소리. 그 후에는 시야가 점점 기울어지며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쿵.

“간단하군.”

보초병을 처리한 나는 지나오는 곳의 CCTV를 부수며 비상계단으로 이동했다.

이곳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숨겨진 층이 있기 때문이다.

한 번에 두세 계단씩 밟으며 올라가자, 순식간에 101층에 도착했다.

총독이 머무는 곳이라 그런지 CCTV의 수가 굉장히 많았다. 어차피 불이 꺼진 상태라 녹화가 되지 않지만 말이다.

‘…… 번호 키인가.’

101층의 문은 내가 올라온 곳과 달랐다. 다른 곳은 그저 돌리는 손잡이가 달린 일반 문이었는데, 이곳은 번호 키가 달린 철문이었다.

문의 높이도 남달랐다.

거인이 지나다니게 만들어 놓은 건가?

내 키에 두 배가 넘을 정도였다.

‘이 탑 안에서 무엇이 그리 두렵길래, 저렇게까지….’

나는 나무 위에 걸린 감을 떼어내듯 천장에 붙은 CCTV를 하나씩 처리했다.

다시 돌아왔을 때 알리바이가 명확해야 하니깐 말이다.

쿵!

굉음과 함께 탑이 흔들렸다.

내부가 아니라 외부의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중심을 잡기도 힘들 정도의 흔들림이 계속 이어졌다.

-뭐, 뭐야!

철문 너머에 있는 김수현의 목소리가 비상계단까지 들려왔다.

‘제길.’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 같다.

다들 그대로 자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설마 움직임을 들킨 것인가?

‘아니지.’

내가 들켰다면 탑이 흔들릴 것이 아니라 이 안에 있는 병사들이 나를 쫓아왔을 것이다.

총독의 방안에서 병사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초, 총독님! 거인들이 기습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뭐라고?”

나는 문에 귀를 가져다 대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거인 다섯 마리가 지금 탑을 공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니, 이 시간에 거인들이 왔단 말인가?”

거인의 공격.

엄청난 운이 나를 도와주었다. AI가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놈들이 쳐들어왔다면 모든 병력이 아래층으로 몰릴 테니 말이다.

“예, 현재 방어 시스템이 가동 준비 중이라 위병 근무자들이 직접 싸우고 있습니다.”

“…… 에이도스가 다시 가동하기 전까지 시간을 끌 수 있겠나?”

보초병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그에게 대답했다.

“해보겠습니다.”

“부탁하네.”

“옙!”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위층을 향해 걸었다.

* * * * *

전속력으로 계단을 올라가자 경고판 안에 적혀 있는 빨간색 글씨가 보였다.

[플레이어 출입 금지 구역]

101층도 아니고 102층도 아니고, 그 사이에 있는 정체 모를 검은 문.

문 앞에 서자 홀로그램 메시지가 날아다녔다.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 ”

나는 검은 문을 보며 확신했다.

이 게임 안에 운영진들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왜냐고?

플레이어 출입 금지 구역이라고 적혀 있지만, 내 눈앞에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장치인 홀로그램 자판이 날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려야 할 텐데.’

나는 신중하게 홀로그램 숫자판을 눌렀다. 한 번이라도 틀리면 자동으로 문이 이중 잠금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번호 키 말고도 돌려서 여는 쇠 키가 필요하게 되니, 절대로 실수하면 안 된다.

삑. 삐빅. 삑. 삑.

[0.4.0.4]

‘제발 열려라.’

홀로그램 자판이 소리를 내었다.

삐비비빅!

“좋아….”

‘덜컹’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다행히도 이곳의 암호는 바뀌지 않았다.

PC 시절에도 이 게임의 암호는 운영진밖에 모르고 있었지만, 나와 정우는 삼촌이 알려주어 들어갈 수 있었다.

이 게임의 지형 제작 담당이었던 정우의 삼촌, 정현철.

‘역시.’

나는 방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이 메카니아의 심장이라 불리는 인공지능 시스템, 에이도스가 있는 곳이다.

이번 라운드의 모든 자료를 관리하는 AI 말이다.

“…… 에이도스”

슈퍼컴퓨터 앞에서 AI를 불렀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시스템 점검이 끝나지 않았는지, 흔히 블루 스크린이라고 부르는 화면이 홀로그램으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에이도스’ 보안 점검 중]

[게이트 1 점검 완료]

[게이트 2 점검 완료]

[게이트 3 점검 완료]

[게이트 4 점검 완료]

앞으로 보안 점검 한 개만 끝내면 다시 시스템이 가동한다.

‘얼마나 걸리려나….’

점검이 끝날 동안 나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딱히 구경할만한 물건은 없었다.

슈퍼컴퓨터 옆으로 줄지어 있는 서버 관리기기 말고는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 이건가.”

줄지어 있는 서버 기기 중 하나에 익숙한 알파벳의 나열이 보였다.

[JHC]

그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완벽해.’

우웅-. 우웅-. 우웅-.

방안에는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렸다.

[‘에이도스’ 보안 점검 완료]

[게이트 1, 2, 3, 4 점검 완료]

[여섯 번째 라운드 내에 있는 모든 게이트가 오픈됩니다.]

슈퍼컴퓨터 근처에 날아다니던 파란 홀로그램 화면들이 모여 뭉치더니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흰색 러닝셔츠에 후줄근한 반바지 차림의 남성이다.

“…… 에이도스.”

에이도스가 나를 보았다.

“음?”

“드디어 만났구나.”

“…… 당신, 이곳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야?”

내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비. 밀.”

에이도스는 내 행동이 거슬렸는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에이도스’가 당신의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합니다.]

[불법 출입자에 대한 처리 매뉴얼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신기하다.

AI 또한 인간과 다를 바 없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에이도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물론 결계에 막혀 만질 수 없었다.

“노노노노, 당신은 나를 만질 수 없어요.”

“…… 그래서 불법 출입자에 대한 매뉴얼은 전부 확인했나?”

“했습니다.”

“근데 왜 나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거지?”

에이도스가 작게 웃었다.

“보낼 방법이 없으니까요.”

나 또한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히 이 방안에서는 나를 밖으로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럴만한 장비가 단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그렇지, 나는 정당한 방법으로 이곳에 왔으니 내보낼 수 없겠지.”

“확인 결과 일반 플레이어로 나오는데, 이곳의 출입 번호는 어떻게 아셨나요?”

“네가 알려줬으니깐.”

“응?”

“네가 말해줬다고. 에이도스, 아니 정현철 맞지?”

에이도스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AI 주제에 꽤 실감 나는 얼굴이었다.

“…… 당신. 그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이것도 비밀. 내가 시간이 없으니 일을 좀 서둘러서 진행하도록 할게.”

“뭐?”

“에이도스, 코드 입력 ‘JHC35SoRa’.”

에이도스는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동자가 뒤집혀 흰자위만 보였다.

“크으으으윽! 아, 안돼. 어째서 당신이 그 코드를 알고 있는…. 거야!”

[‘김천재’ 플레이어가 ‘에이도스’로부터 시스템 명령 권한을 부여받습니다.]

끝났다.

모든 일이 내 생각대로 흘러갔다. 스토리의 흐름이 변하였어도 시스템은 그대로였다.

“에이도스, 정보 추출 작업을 시작하도록 한다. 이제부터 내가 말하는 플레이어의 모든 신상 정보를 말하도록 해라.”

“시, 싫엇!”

“마정우, 마이클, 조영기, 김연희.”

[‘에이도스’가 플레이어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합니다.]

“싫다고!”

“마지막으로 유소라, 그녀는 이 게임의 제작진 중 한 명이니 ‘상세 정보’ 확인으로 진행하도록 해라.”

* * * * *

총독은 황급히 복장을 갈아입고 아래층을 향해 자리를 이동했다.

에이도스가 다시 작동하기 전까지 병사들을 직접 진두지휘하기 위해서였다.

띵- 동.

엘리베이터가 10층에 도착했다.

이곳은 에이도스가 수집한 정보를 가지고 메카니아의 상황을 파악하는 곳이었다.

문이 열리자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병사들이 보였다.

-5분 대기조 출동 완료했나?

-예! 현재 거인들을 상대로 전투 중입니다.

-무기는 부족하지 않고?

-테이저건의 숫자가 부족하기는 했지만, 이번에 새로 제작한 고압 전기총이 있어서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알았다…. 앗! 추, 충성! 총독님 오셨습니까!

총독을 확인한 병사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어, 됐어. 모두 자리에 앉아서 일들 봐.”

총독은 병사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었는지 그저 손만 가볍게 흔들었다.

그가 지휘봉을 들자, 상황실장이라는 자가 달려와 지도를 펼쳐 들었다.

“보고드리겠습니다. 현재 다섯 마리의 거인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고, 그에 따른 조치로 5분 대기조와 특수 거인 전담반을 투입 시켰습니다.”

“특수 거인 전담반? 다섯 마리 중 비홀더 말고 다른 거인도 섞여 있었는가?”

“예! 다섯 마리 중 네 마리는 일반적인 비홀더였으나 나머지 한 마리가 그 위 등급인 트윈 비홀더입니다.”

“그 대가리 두 개 달린 놈?”

“옙.”

“트윈 비홀더라…. 에이도스가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타격이 크겠는데.”

상황실장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총독에게 대답했다.

“점검이 거의 다 끝나가니 금방 돌아올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총독은 지도를 대충 훑더니 창가로 자리를 이동했다.

거인들이 탑을 부수기 위해 커다란 나무 방망이를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막으려 덤벼드는 흰 슈트의 군인들. 턱도 없었지만,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다.

-쿠에에에엑!

총독이 두터운 시가를 입에 물더니 불을 붙였다.

쓰읍- 푸후!

하얀 담배 연기가 그의 눈앞을 가렸다.

[시스템 메시지]

[현 시간부로 ‘에이도스’의 모든 시스템이 정상 가동하기 시작합니다.]

[160초 후 메카니아 내에 있는 모든 기기의 전력이 차단되오니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전력이 차단됨과 동시에 모든 병기가 수동모드로 제한됩니다.]

총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홀로그램 창을 확인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볐다.

“전력…. 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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