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노효만의 수색대와 헤어졌다.
웬만해서는 대화를 좋게 끝내려고 했는데, 상관처럼 행세하는 그의 행동을 참을 수 없었다.
공장에서 나온 우리는 메카니아의 컨트롤 타워라고 불리는 탑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큰길로 다니면 거인과 조우할 수 있기에 좁은 골목만을 지나다니며 이동했다.
탑에 가까워질수록 매캐한 냄새가 짙어졌다. 손수건으로 가렸는데도 불구하고 코가 시큰할 정도니 말이다.
“…… 숙여.”
나는 건물에 바짝 붙어 몸을 숨겼다. 줄지어 따라오던 모두가 나와 같이 벽에 몸을 붙였다.
걸음을 멈추고 숨소리를 죽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발걸음이 들려왔다.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오우거보다 더 무거운 생명체의 발걸음이었다.
쿠웅-. 쿠웅-.
다섯 번째 라운드에서 만난 오크족 거인보다는 작은 것 같다.
그의 걸음보다 땅의 울림이 적었다.
나는 건물 밖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인 한 명…. 아니지, 몬스터니 한 마리라고 해야 하나?
인간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온몸이 백색인 외눈박이 괴물.
마른 몸에 길쭉길쭉하게 뻗은 팔과 다리가 마치 귀신같아 보였다.
‘…… 비홀더.’
거인 종족 중 제일 낮은 등급의 몬스터다.
내가 낫의 손잡이를 강하게 쥐며 모두에게 말했다.
“거인 출현. 생명력 게이지를 보니 오크 따위와는 상대가 안 돼. 모두 긴장 늦추지 말고 대기해.”
정우가 도끼에 오라를 담더니 내게 물었다.
“한 마리면 잡는 게 어때? 지금 조합도 좋아서 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 그럴까?”
쿠웅-.
나는 가까워진 비홀더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생명력 게이지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파란 색이다.
그 말인 즉슨 생명력 게이지를 총 3번 깎아내야 한다는 것.
일반적으로 몬스터의 생명력 게이지 색상은 파랑->초록->빨강 순서.
열 번째 라운드부터 생기는 생명력 게이지의 변화가 겨우 여섯 번째 라운드에 나타나다니.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쩐다.
“…… 가자.”
팟!
우리 양옆으로 갈라지며 뛰었다.
조영기가 소리쳤다.
“어쓰 스피어!”
거대한 돌창이 날아와 거인의 머리를 피격했다.
쾅!
-키에에에엑!
놈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이어 마정우가 달려가 거인의 좌측 정강이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쉬익- 팍.
얼마나 단단했는지 야만 전사의 풀 스윙 가르기가 놈의 정강이를 잘라내지 못했다.
오라를 담아서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거인의 뼈에 날붙이가 박히기만 했을 뿐이었다.
팍!
정우가 도끼를 녀석의 다리에서 빼내더니 내게 소리쳤다.
“김천재!”
나는 그대로 달려가 거인의 목을 노렸다.
부우웅-
나선형을 그리며 휘둘러진 내 낫이 거인의 목을 내리쳤다.
콰직!
‘…… 얕다.’
다른 곳에 비해 방어력이 약한 부위라 베어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턱도 없었다.
거인이 고개를 살짝 들자 목뼈가 내 낫을 강하게 조였다.
-캬아아악!
더 이상 박히지도 빠지지도 않았다. 빼어내어 보려 강하게 당겨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빠지라고!”
거인이 상체를 크게 흔들며 나를 떨어뜨리려 했다.
나는 흔들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황소 타기 게임을 하듯, 낫의 손잡이를 잡고 균형을 잡았다.
“그, 그만 이 새끼야.”
보다 못한 마이클이 권총을 쏘며 거인의 시선을 끌었다.
타앙-! 타앙-!
거인의 시선이 마이클을 향했다.
“천재 킴! 아임 어그로!”
“알았어!”
마이클이 총을 쏘며 거인을 유인하고, 조영기가 빈틈을 노려 돌창을 계속 던졌다.
모두가 총공세를 벌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홀더의 생명력 게이지가 조금밖에 줄지 않았다.
한참을 싸웠는데도 파란색 게이지의 반도 깎아내지 못했으니 말 다 했지.
“제길.”
건물 사이에 숨어있던 유소라가 튀어나와 소리쳤다.
“천재 씨! 주사기를 준비할까요?!”
나는 거인의 귀를 잡고 균형을 잡으며 대답했다.
“예! 붉은색으로 두 개, 푸른색으로 하나요!”
“알겠습니다!”
유소라가 다시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 옆에 대기하고 있던 김연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도 싸울래!”
전광석화(電光石火)
고양이처럼 날렵한 몸짓으로 순식간에 거인의 앞에 달려와 명치 높이까지 뛰어올랐다.
가볍게 날아오른 그녀는 몸을 두어 바퀴 빠르게 회전하더니 비홀더의 명치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캉!
칼날이 튕겨 나갔다.
“악!”
김연희가 맥없이 땅에 떨어졌다.
쿵.
“으…. 김천재! 저 녀석 아이언 스킨이 있다는 걸 왜 말 안 했어!”
아이언 스킨?
나는 그대로 시선을 돌려 거인의 어깨를 보았다. 피부가 내 신발에 눌려 있었다.
아이언 스킨을 사용했다면 피부가 강철 같았을 텐데.
“…… 아이언 스킨 아니야!”
“뭐?”
“아이언 스킨 아니라고. 이 녀석 방어력이 그냥 높은 거라고!”
거인이 두 손을 마주 잡아 큰 주먹을 만들더니 땅을 향해 휘둘렀다.
쾅!
지진이 난 듯 땅이 흔들렸다.
-크하악! 빌어먹을 자식들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마이크에 대고 고함을 지르듯 쩌렁쩌렁했다. 비홀더가 높게 점프를 뛰었다가 땅에 착지하자,
쿵!
마정우와 내가 튕겨 나갔다.
털썩.
“크으….”
방심하지 않았다.
분명 모두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섯 번째 라운드에 최약체 거인에게 우리들이 밀리다니.
“…… 큰일 났네.”
거인이 눈을 부릅뜨며 우리를 한 명씩 살펴보았다.
-전부 죽여주마….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여섯 번째 라운드에 출현하는 거인 중 최약체의 비홀더가 이렇게 강할 리가 없다.
곱씹어 생각하는 도중 이곳에 오기 전 시스템 메시지가 생각났다.
‘…… 아 맞다.’
시스템이 우리 그룹 이벤트 난이도를 ‘불지옥’으로 바꿨었지.
내가 ‘악몽’ 난이도까지는 해봤는데, 불지옥은 운영진 쪽에서 막아놓은 난이도라 해보지 못했다.
-크르르르르, 감히 인간 따위가!
[‘비홀더’가 대지의 분노 스킬을 사용합니다.]
거인이 고릴라처럼 두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쿵쿵 치더니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콰광! 콰광! 콰광!
주먹 한 방 한 방이 폭탄과 맘먹는 위력을 가졌다. 녀석의 주위가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모두 숨어!”
내 외침에 모두가 가까운 건물의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저 안에 들어갔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평소에 알고 있던 비홀더의 약점들이 전부 막혔다.
다리, 명치, 목.
분명 PC게임에서는 이곳만 노리면 잘 끝낼 수 있었는데 말이다.
“…… 아!”
설마 불지옥 난이도에서는 그곳을 공격해야 하는 건가?
나는 정우를 향해 소리쳤다.
“마정우!”
정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왜!”
“너 저 녀석 시선 좀 끌어줘야겠다.”
“시선? 어그로는 마이클이 끌면 되잖아.”
“아니, 단순히 어그로만 끄는 게 아니라. 녀석의 움직임을 잠깐 멈춰야 해.”
“…… 뭐? 나보고 뒤지라는 거야?”
“어! 저 녀석 앞에 가서 죽여달라고 소리쳐. 오케이?”
내 대답을 듣고 잠시 얼굴이 굳었던 정우가 좋은 생각이 난 듯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 말이었냐.”
“소라 씨! 주사기는요?”
유소라가 내 옆으로 달려왔다.
다다다다다!
“준비됐어요!”
유소라가 주사기를 빙글빙글 돌리며 달려오더니 내 갑주 사이로 주삿바늘을 찔러 넣었다.
치이이익.
몸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힘이 끓어오르며 숨이 빨라졌다.
혈관이 피부 표면을 뚫고 나올 듯 팽창해졌다.
운동을 마친 상태의 몸처럼 근육들이 부풀어 올랐다.
[‘유소라’ 플레이어로부터 붉은 피를 수혈 받았습니다.]
[화과산(花果山) 꼭대기 거석의 영기를 받은 제천대성(齊天大聖)의 힘이 활성화됩니다.]
[활성화 시간: 60분]
“준비해 조영기!”
* * * * *
마정우가 거인을 향해 달려갔다.
거인이 정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정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을 향해 달리기만 했다.
거인의 주먹이 정우에게 닿기 직전, 조영기의 돌창이 날아와 녀석의 얼굴에 명중했다.
쾅!
-크에에에엑!
조영기가 소리쳤다.
“김천재, 이렇게 하면 되는 거냐!”
나는 거인을 향해 달리며 대답했다.
“그래!”
안전하게 거인 앞에 도착한 마정우가 양손의 중지를 치켜세웠다.
“이거나 먹어라!”
[광전사의 포효]
쾅!
공기가 크게 흔들리며 거인의 몸을 흔들었다.
잠깐이지만 거인의 움직임이 완벽하게 멈추었다.
광전사의 포효를 정면으로 맞았으니, 앞으로 3초 동안은 완전한 그로기 상태다.
이 틈에 나는 거인의 척추를 뛰어 올라갔다. 이어 목에 박혀있는 낫의 손잡이를 잡아당기고.
팍!
‘이 정도 힘이면 빠지는구나.’
이어서 거인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여긴 단단할 리가 없지!”
콰직!
내 날붙이가 번쩍였다.
비홀더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정확했다.
극소수만 알고 있는 거인들의 치명적인 약점.
안구.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공격하기가 매우 어려운 위치라 명중하기 힘든 곳이다.
특히 이렇게 강력한 힘을 가진 놈을 상대로 싸울 때 말이야.
-크. 크. 크. 크……. 아아아아악!!
비홀더가 비명을 질러댔다.
공격이 정통으로 들어간 덕분인지 생명력 게이지가 단숨에 파란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녀석의 눈에 박혀있는 낫이 더욱 깊이 박히도록 주먹으로 손잡이를 내리쳤다.
팍! 팍! 팍! 팍!
칠 때마다 날붙이가 눈알을 조금씩 파고 들어갔다. 녀석의 생명력 게이지가 빠른 속도로 줄기 시작했다.
파란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뀐 게이지가 금세 빨간색까지 내려왔다.
놈이 발버둥을 치려 하자 조영기가 주문을 외웠다.
“어스필드(Earth Field).”
지면이 솟구쳐 오르더니 거인의 발과 손을 덮었다. 비홀더가 저항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아귀에 힘을 주어 녀석에 눈알에 박힌 낫을 빼내기 시작했다.
거인의 눈이 푸딩을 자르듯 천천히 갈라졌다.
거인이 거세게 호흡을 하며 죽는 소리를 내었다.
크하아아아악-!
“…… 감염체는 아니구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면 초록색 액체 또는 보라색 액체가 흘러 내렸을 텐데.
녀석의 안구에서 흐른 액체는 투명한 색이었다.
나는 낫에 묻은 액체를 손으로 만져 보았다.
달팽이의 점액처럼 끈끈하다.
생명력 게이지가 흑색에 가까워지자 모두가 비홀더의 앞으로 모였다.
마정우가 도끼로 놈의 목을 툭툭 치며 내게 물었다.
“이 새끼가 비홀더 주제에 왜 이렇게 강한 거야?”
“…… 마정우.”
“왜?”
“생각해보니 우리 그룹은 이벤트 난이도가 ‘불지옥’으로 바뀌었잖아.”
정우는 앞선 시스템 메세지가 생각난 듯 눈을 부릅떴다.
“아! 아이 X발! 그래서 이렇게 강한 거구나.”
나는 거인의 이마를 쓰다듬어주며 그에게 대답했다.
“그러니깐. 근데…. 불지옥 난이도, 별거 없네.”
15%라고 했었지?
[‘사신의 낫’ 발동.]
[비홀더의 영혼을 소멸시킵니다.]
콰직!
거인의 목이 잘려 나갔다.
[시스템 메시지]
[‘불지옥’ 난이도 최초의 거인 처치 플레이어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상승한 난이도에 맞추어 보상을 지급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보상: 거인의 정수 1개]
“…… 거인의 정수라.”
거인의 시체가 번쩍이며 사라지더니, 플라스크 병 하나가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거인의 정수가 담긴 플라스크를 잡아 그대로 마셨다.
꿀꺽, 꿀꺽.
목에 쌓인 먼지가 씻겨 내려가듯 시원했다.
[메카니아의 오염 된 공기에 신체가 적응됩니다.]
[호흡이 편안해집니다.]
[움직임이 <느림>에서 <보통>으로 돌아옵니다.]
내가 정수를 마시자 모두 따라서 마셨다.
숨쉬기가 한결 가벼워지니 모두의 얼굴이 밝아졌다.
“후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거인 사냥, 참 쉽죠?’ 칭호를 획득합니다.]
[소환 레벨이 +1 증가합니다!]
[소환 레벨 ‘9’ 달성]
[하수인의 공격력과 방어력, 체력이 소폭 증가합니다.]
짝짝짝짝짝!
갑자기 함성이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숨어서 우리의 전투를 지켜본 메카니아의 주민들이 하나둘 씩 기어 나오고 있었다.
-여…. 여는 자다. 여는 자가 왔어!
-말도 안 돼. 여는 자는 그저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었나?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드디어 저희에게 구원을….
내 앞으로 모인 주민들이 갑자기 절을 하기 시작했다.
‘…… 이 녀석들은 또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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