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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불카누스의 다크서클이 콧등까지 내려왔다. 그는 피곤한 듯 눈가를 비비며 내게 말했다.

“이틀 걸린다고 했잖아….”

알고 있다.

하지만 내일 당장 다음 라운드로 출발해야 하는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여섯 번째 라운드에서는 소환 능력을 사용할 수 없으니 말이다.

‘미리 소환해둔 놈들도 데려갈 수가 없으니….’

네크로맨서가 소환을 사용할 수 없는데 무기까지 없이 전장에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달래듯 말했다.

“끝나면 포도주 사줄게.”

“하….”

드륵. 드륵. 드르륵.

쾅! 쾅! 콰광!

썰고, 치고, 붙이고.

밤을 새우며 제작을 했다.

물론 나는 아니고 불카누스가.

피곤했는지 제작과정을 보던 내가 잠들었다.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적 속 불카누스의 외침이 들려왔다.

“하- 됐다!”

눈이 번쩍 뜨였다.

불카누스가 완성된 낫을 들어서 내게 보여주었다.

“자 어때? 네가 준 재료로 만든 무기.”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마대 걸레 끝에 날붙이를 붙여놓은 듯한 무기였다.

“이게 뭐야?”

“뭐긴. 네가 부탁한 대로 만든 낫이지.”

“…… 내가 생각한 모습이 아닌데?”

과거, 멸망의 땅에서 사용했던 나의 낫은 삼국지 속 관우가 사용했을 법한 위엄기를 뽐냈었다.

근데 이것은 무엇인가?

강화도에 사시는 우리 할매가 수확하러 나간다며 보리밭에서 휠윈드를 돌 것 같은 외관이 아닌가.

그냥 시골에서 쓰는 낫에 손잡이만 길어진 버전이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불카누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상해?”

“너 진짜 뒤지고 싶냐.”

“…… 왜?”

“내가 낫을 만들라고 했지. 마대 자루를 만들라고 했어?”

불카누스가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정해진 재료 내에서 만든 내 최선이었다. 외관은 어떨지 모르더라도 성능은 확실해.”

“…… 외관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었고?”

“자네도 알겠지만, 재료 본래의 모습은 바꿀 수 없어.”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사실 고대 유물이라고 해서 기대치가 너무 높았는지, 외관에서 실망이 컸다.

‘뭐…. 능력은 확실하니 우선 쓰도록 해야지.’

불카누스가 목에 걸쳐 있는 수건으로 낫의 손잡이를 닦아내더니 내게 넘겼다.

[고대 유물, ‘신목의 선택’ 발동.]

응?

낫을 건네어 받는 순간 새로운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처음 보는 형태의 설명 창이었다.

[‘신목’이 김천재 플레이어의 능력과 플레이 기록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자신의 주인이 될 만한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며 잠시 기다리라고 합니다.]

“…… ”

내 능력과 기록을 들여다보고 자격을 테스트한다고?

이름, 나이, 레벨, 스킬, 전투 기록, 완료 이벤트 목록.

누가 책을 읊어주듯 나에 관한 이야기가 귓가에 아련히 들려왔다.

내 정보가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낫의 생김새가 조금씩 변해갔다.

용의 송곳니는 점점 길게 늘어지더니 날붙이처럼 납작해지고.

그저 나무 막대기처럼 생겼던 낫의 손잡이는 칠흑같이 어두운 액체가 나타나 휘감았다.

“뭐, 뭐야 이게.”

순식간에 낫의 생김새가 변하였다.

마대자루 같이 생겼던 불카누스의 제작 무기가, 지옥의 사신이 사용할 것 같은 강인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 미쳤다.’

내가 PC 버전에서 사용했던 무기보다 더 높은 등급의 아이템인 것 같다.

낫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오라가 연기처럼 주위를 감싸 안았다.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둘러보자, 손잡이의 끝에 박혀 있는 역십자 마크가 눈에 들어왔다.

[죽음의 낫(네크로맨서 전용)]

-공격력 +44

-모든 그룹원의 능력치 44% 증가.

-스켈레톤 소환 시 자동으로 ‘상급’ 아이템이 착용 됩니다.

*‘사신의 낫’ 액티브 스킬 추가!

-생명력이 15% 이하인 적의 영혼을 단방에 처리합니다. (‘사신의 낫’으로 처치한 적의 영혼은 완전히 소멸됩니다.)

내가 지금까지 본 모든 아이템 중에서 제일 미친 능력을 가진 무기가 탄생했다.

일개 스켈레톤에게 플레이어도 구하기 힘든 상급 아이템을 입힌다고?

설명을 보는 내내 미소가 지어졌다.

“불카누스, 너를 의심해서 미안하다.”

불카누스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 그럴 리가. 어째서 하데스의 낫이….”

“하데스의 낫?”

[한국 서버 소속 ‘김천재’ 님이 서버 최초로 ‘신화’등급 아이템 획득에 성공하셨습니다!]

갑자기 박수 갈채가 들려왔다.

[시스템의 관리자가 당신을 보며 놀라움을 표합니다.]

[앞으로의 라운드가 기대된다며, 재미를 위해 ‘김천재’ 님 그룹의 이벤트 난이도를 조절한다고 합니다.]

[스토리의 난이도가 ‘불지옥’으로 바뀝니다.]

[일반 몬스터의 능력치가 160% 상승합니다.]

[보스의 능력치가 120% 상승합니다.]

[이벤트 및 몬스터 처치 보상이 2배로 증가합니다.]

“…… 이거 보상 맞나?”

* * * * *

날이 밝았다.

나는 우리 그룹원을 데리고 김준철 소령과 약속한 벙커 앞으로 갔다.

백여 명 정도의 군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 참여하는 군인들은 특전 쪽이 아니었는지 도깨비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무슨 우주복 같은 슈트였다.

노효만 작전 과장이 내게 다가오더니 경례를 했다.

“단결.”

“…… 안녕하세요.”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준비할 게 뭐 있나요. 그냥 마실 간다고 생각하고 나왔는걸요.”

“허허-. 게이트 너머에는 어떤 미지의 생명체가 있을지 모릅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던지, 덤벼오면 전부 죽이면 되지요.”

노효만이 눈을 부릅떴다.

“자신 있으신가 봅니다?”

나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보였다.

“예.”

이 재수 없는 새끼를 어떻게 할까. 지금 당장 죽일 수도 있지만, 최대한 많은 정보를 빼어내야 할 텐데.

‘오지명 박사와 이놈이 연결되어 있느니 원…. 김준철을 일찍 죽일 걸 그랬나.’

김준철을 일찍 죽였다면 도깨비 부대가 다른 NPC에게 넘어갔을 테고,

그렇다면 노효만 작전 과장의 계획은 전부 틀어졌을 텐데.

“…… 뭐, 지나간 일을 어떻게 하나.”

노효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나간 일?”

“아, 아닙니다. 그나저나 저기 있는 기계들은 뭡니까?”

“아! 이건 오지명 박사님께서 만드신 기동 병기 ‘메카 X’입니다.”

X 바이러스를 제작하더니 이번에는 메카 X. 누구의 작명 실력인지는 모르겠지만 X만 가져다 붙이면 그럴듯해 보이는 줄 아는가 보다.

‘으이고….’

유소라가 입을 떡하니 벌리고 메카 X를 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좌측에서 우측으로 기계를 살피며 ‘말도 안 돼….’ 라고 독백했다.

‘…… 역시.’

아니…. 근데 멸망의 땅에 이런 게 있었던가?

다섯 기의 로봇이 줄지어 서 있었다.

탱크 위에 비행기를 얹어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마정우를 보았다. 그도 모르겠다는 듯한 모션을 취했다.

“메카 X? 완전 로봇인데요.”

“하하하하,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요. 현재 메카 X에 탑승한 자들은 전부 공군 파일럿 출신의 우수 인재들입니다.”

듣고 싶지 않은 설명이다.

하지만 노효만은 대화를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설명했다.

“이 기계로 말하자면 나날이 늘어가는 개조 좀비들을 사냥하기 위해 만들어진 병기로써 자동차만큼 조작이 쉬워 국방 보호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러니깐 조작이 쉬운 로봇이라는 말이잖아.

노효만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한 번 타보시겠습니까?”

“아니요.”

너무 단호했나?

하지만 나의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어렸을 적부터 로봇을 싫어한데다가 컴퓨터와 자동차 외에는 기계 만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에 도전하고 싶지 않았다.

노효만이 쓰게 입맛을 다셨다.

“그러시군요…. 나중에라도 원하신다면 태워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예. 그럼 이제 출발하도록 하지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같이 출발하기로 한 분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같이 출발하기로 한 분들? 저희 말고 게이트를 넘어가기로 한 사람이 또 있어요?”

“예. 아! 때마침 저기 오고 있네요.”

노효만이 우리의 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고개를 돌려 보니 조영기와 그의 아이들이 같이 오고 있었다.

말끔하게 다려 입은 꽃무늬 셔츠와는 다르게 구깃구깃한 티셔츠에 몸보다 큰 배낭을 메고 있는 김연희와 김리아.

김리아도 저 그룹에 들어간 건가?

“어이! 김천재.”

“…… 우리랑 같은 스토리 흐름을 탔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나 보고만.”

“후우…. 뭔가 일진이 안 좋은데.”

“내가 학창 시절 일진이기는 했지.”

미친 아재개그.

내 뒤에서 큭큭하고 웃는 유소라가 미웠다.

“허허 소라 씨도 푹 주무셨나?”

“…… 네.”

유소라가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조영기만 보면 내 뒤로 숨으며 낯을 가렸었는데,

마정우의 특훈이 대단했는지 이제는 완전히 딴 사람 같았다.

“김천재.”

“왜? 형이라고 부르라고 하지 않았나.”

“…… 형. 너는 어디 농촌 체험하러 가는가 봐?”

나는 낫을 허공에 붕붕 휘두르며 대답했다.

“허허…. 헛소리하는 대머리 목따기 참 좋은 날씨네.”

조영기가 내 표정을 보더니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장난이야. 장난이라고.”

모두가 모이자 노효만이 군부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갑 부대가 전방에서 움직이도록 하고, 보병 부대가 그 뒤를 따르도록 해라. 천재 씨. 천재 씨는 다른 분들을 통솔하여 주십시오.”

쿠르르르르릉.

탱크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기동 병기 ‘메카 X’가 움직였다. 조종석에 타고 있는 파일럿이 엄지를 척 들어 보이더니 빠른 속도로 마을 밖을 향해 달렸다.

우리는 군인들을 따라 움직이며 마을 밖으로 이동했다.

* * * * *

서쪽 게이트에 도착했다.

노효만이 군인들에게 대기 명령을 내리더니 내게 말했다.

“게이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전부 비밀로 해주셔야 합니다. 작전내용 유출 시 엄벌에 처할 수 있습니다.”

“…… 예.”

“그리고 이 안에서 사망자가 발생하더라도 저희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희는 수색하러 가는 것이지 거인을 소탕하러 가는 것이 아님을 인지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대화가 끝나자 노효만과 그의 부대원들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2층 버스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게이트가 높았다. 그 말인 즉슨 게이트 건너편에서도 저 정도 크기의 생명체 또는 물건이 이곳으로 넘어올 수 있다는 말.

나는 군인들이 전부 들어가기를 기다린 후, 마지막으로 플레이어들을 이끌고 안으로 향했다.

“이번 라운드에 참여한 플레이어는 우리가 전부야. 인원이 많이 부족하니 모두 조심하도록 해.”

내 그룹원들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영기와 그의 그룹원들은 겁을 먹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김연희가 속삭였다.

“나는 여기 가기 싫은데…. 무서워….”

김리아가 대답했다.

“저는 어차피 못 들어가요. 다들 잘 다녀오세요.”

조영기가 호통을 쳤다.

“너는 왜 안 가는데!?”

“안 간다뇨?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못 간다고.”

“왜 못 가는데?”

“저는 다섯 번째 라운드를 클리어하지 않았어요.”

“……”

“그래서 입장이 불가능합니다.”

김리아가 방긋 웃었다.

김연희가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조영기가 혀를 차며 짜증 섞인 소리를 내었다.

“망할…. 김리아! 너 지금 당장 다섯 번째 라운드로 출발해. 늦더라도 끝내고 와.”

“아뇨, 저는 라운드를 진행할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아저씨랑 그룹원도 아니잖아요!”

그룹원이 아니었어?

아닌데 저 큰 가방은 왜 들고 온 거야 헷갈리게.

김리아가 힘 빠진 걸음으로 사막의 남쪽을 향해 걸었다.

나는 그녀에 등을 향해 소리쳤다.

“김리아! 어디로 갈 예정이지?”

“경성으로 돌아간 후에, 리 커우러나 씨랑 움직이려고요.”

“…… 시간이 된다면 조영기가 말한 대로 다섯 번째 라운드에도 다녀오도록 해. 후에라도 우리와 함께 움직이려면 말이야.”

김리아가 방긋 웃었다.

“부탁인가요, 명령인가요?”

“부탁이다.”

“…… 거절한다면요?”

“거절해도 상관없어. 다만 이 게임의 끝을 같이 보려면 내 말을 따라줬으면 좋겠군.”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등을 돌리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알았어요…. 다섯 번째 라운드. 리 커우러나 씨와 같이 클리어하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녀가 나를 향해 경례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막을 향해 걸어갔다.

조영기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조영기를 보며 던지듯 말했다.

“조영기.”

“…… 왜?”

“여섯 번째 라운드를 같이하게 되면, 일곱 번째 라운드도 같이하게 되는 거 알고 있지?”

조영기가 귀를 후벼파며 대답했다.

“알고 있지.”

“그럼 이 중에 누군가는 죽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겠네?”

내 질문에 모두가 굳었다.

조영기와 김연희뿐만이 아닌 마정우, 마이클, 유소라.

전부 말이다.

유소라와 마이클에게는 여섯 번째 라운드와 일곱 번째 라운드에 대한 설명을 모두 마쳤다.

그들은 전부 다음 라운드로 넘어가기로 동의했고.

그 결과 여기에 모인 거다.

조영기 그룹의 의견은 생각지 않은 채 말이다.

“그것도 알고 있다.”

“김연희도?”

“그래.”

“그럼 둘 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조영기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손가락을 흔들며 대답했다.

“후회라는 건 남자가 쓰는 단어가 아니지.”

“…… 알았다.”

모두의 얼굴을 한 번씩 훑은 나는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뗐다. 차가운 물을 지나가는 것처럼 몸이 시원해졌다.

청량감.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게이트를 넘어오는 순간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피부가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이…. 붉네.”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불에 타오르듯 붉었다. 잿빛 가루가 눈처럼 계속해서 떨어져 내렸다.

가루들이 눈송이처럼 내 갑주 위에 내려앉았다.

우리들이 온 것을 환영이라도 하듯 붉은 눈의 까마귀들이 날아와 신호등 위에 줄지어 앉았다.

피부가 갈변한 것으로 보아 Z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 확실했다.

‘스토리의 중반부터 시작하라는 건가.’

거인의 습격 때문에 건물 대부분이 무너지고, 도로에는 지붕이 박살 난 차들만이 보였다.

‘…… 생각보다 위험하겠는데.’

정말로.

[‘메카니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주의 사항]

-모든 소환 스킬이 제한됩니다.

-회복 계열 주문이 제한됩니다.

-플레이어 간의 PK가 제한됩니다.

-휴식 외에는 회복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플레이어 전원 생명력 관리를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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