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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정비를 마친 우리는 김준철 소령이 대기하고 있는 부대로 이동했다.

‘폐허가 된 마을’ 북쪽 끝에 새로 생긴 지휘 통제실은 눈에 익숙한 국방 무늬로 만들어진 벙커 형태의 건물이었다.

[‘김준철’소령의 병사들이 김천재 플레이어 그룹을 반깁니다.]

‘앞서 쌓아온 신뢰가 빛을 발하는구나.’

도깨비 마스크를 쓴 군인이 나를 향해 크게 경례했다.

-단! 결!

“그래, 김준철 소령은 안에 계신가?”

“예, 안쪽에서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군인들이 길을 열어주었다.

그중 한 명이 쇠문을 밀자 경첩 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끼이이이익.

캄캄하고 길게 늘어진 좁은 길목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한 치 앞도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지만 길이 넓지 않아 그대로 걸을 수 있었다.

빛에 민감한 좀비들의 침입 시 이동을 막는 장치 중 하나.

후각이 예민한 상급 좀비나 개조 좀비에게는 통용되지 않지만 말이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복도에 우리의 걸음이 울렸다.

우리를 안내해주는 군인이 앞에서 소리쳤다.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나는 작게 대답했다.

“예.”

복도의 끝에 자그마한 빛이 보였다. 저곳을 기준으로 우리에게 도착할 것이라 암시해주는 것인가.

빛이 보이는 곳에 도착하자 살짝 열려있는 쇠문이 보였다.

캉! 캉! 캉!

군인이 문을 두드렸다.

“김준철 소령님. 김천재 일행이 도착했습니다.”

[‘김준철’ 소령의 방]

[입장하시겠습니까? Y/N]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나.

“YES.”

문이 저절로 열리며 방의 안쪽이 보였다. 핵폭탄도 견디는 미스릴 벙커의 안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허술한 시설이었다.

비상 식품이나 약 같은 건 없고 그저 서재처럼 보이는 장소였다.

작전회의를 하던 김준철 소령이 일어나 우리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그를 따라 간부들이 다 같이 일어났다.

-단결-.

부사관들이라서 그런지 전부 결의에 찬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지도 위에 쓰여 있는 ‘필사즉생, 필생즉사.’

과거 이순신 장군님이 명량해전에서 하신 말씀이시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흐음.’

생각해보니 이 게임을 만든 제작자 중 한 명은 과거 역사학자였다고 하던데, 이 게임의 스토리를 만든 사람 중 한 명 아닐까 싶다.

‘멸망의 땅’ 안에서 흘러가는 모든 이야기의 흐름은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것처럼 진행되게 해놓았으니 말이다.

김준철 소령이 내 앞으로 다가와 손을 잡고 흔들었다.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는요.”

“이곳까지 오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천재 씨에게 꼭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요.”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척을 했다.

“제게 말씀해주실 것이요?”

[시스템 메시지.]

[여섯 번째 라운드를 시작합니다.]

김준철이 눈짓하자 벙커 안에 있는 모든 간부가 밖으로 나갔다.

김준철의 오른팔인 작전 과장을 제외하고 말이다.

‘노효만….’

오 박사와 함께 개조 좀비를 만들어낸 쓰레기다.

아직 김준철은 모르고 있겠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군인 외에 다른 인물을 보았다.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소년 한 명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꼿꼿이 앉아 있었다.

그가 우리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삑.

[‘김천재’ 님의 그룹]

[앞으로 진행될 ‘멸망의 땅’ 여섯 번째 라운드의 스토리 흐름을 선택해주세요.]

A. 적을 섬멸한다. (난이도 A)

-모든 적을 처치한다.

B. 도시를 지킨다. (난이도 A)

-라운드 종료까지 주민을 삼백 명 이상 생존시킨다.

처음으로 여섯 번째 라운드에 도착하는 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지다.

적을 섬멸하면 당연히 도시를 지키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절로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라운드는 적을 섬멸하더라도 도시를 지킬 수 없다.

도시를 지킨다고 하더라도 적을 섬멸할 수 없고.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제일 고민이 되는 때이다.

동일한 보상에 같은 등급의 난이도.

“…… B를 선택한다.”

[시스템 메시지]

[김천재 그룹의 모든 플레이어가 스토리 흐름의 선택을 마쳤습니다.]

[선택지- B]

선택을 마치자 김준철이 입을 열었다.

“천재 씨, 혹시 정복자의 무덤 근처에 있는 게이트 수색은 마치셨습니까?”

“예.”

“그곳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김준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에게 대답했다.

“게이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물어보시는 건가요?”

“예.”

“엘프, 드워프, 오크가 있었습니다.”

김준철이 눈썹을 찌푸렸다.

“…… 농담하시는 건가요?”

농담으로 받아들여지겠지. 게임 또는 판타지 소설에서나 들어볼 법한 이름들이 줄지어 나왔으니 말이다.

“농담 아니에요.”

무덤덤한 내 대답에 김준철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하긴. 천재 씨가 농담하실 분은 아니죠.”

“…… 근데 게이트는 왜요?”

“게이트가….”

김준철이 내 뒤에 서 있는 일행을 보더니 손뼉을 탁! 하고 치며 말을 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우선 안으로 들어와서 앉으시지요.”

“…… 옙.”

* * * * *

타원형의 탁자 앞에 앉은 김준철 소령과 작전 과장, 그리고 우리 그룹.

김준철 소령이 지도 한 장을 탁자 위에 펼치더니 내게 말했다.

“이 근처에서 천재 씨가 들어갔던 게이트 외에 또 다른 게이트가 발견되었습니다.”

“…… 그런가요.”

“반응이 미적지근하시군요.”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긴 여행을 했더니 조금 피곤해서요.”

“아! 죄송합니다. 천재 씨가 오늘 돌아오신 것을 제가 깜빡했군요. 근래 바쁜 일들이 자꾸 생기다 보니….”

“아닙니다. 그럼 이어서 말씀해주시겠어요?”

“…… 피곤하시니 간추려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새로운 게이트가 이 마을의 서쪽에 생겨났습니다. 그 게이트로 인해 사건들이 발생했는데…. 작전 과장, 브리핑해보게나.”

노효만이 안경을 치켜세우며 지도 위를 지휘봉으로 가리켰다.

“보고드리겠습니다. 우선 새로운 게이트가 발견된 곳은 마을의 서쪽‘페르아 사막’의 초입. 남쪽 페르아 사막과 연결된 곳입니다.”

나는 지도를 보며 그에게 물었다.

“페르아 사막의 남서쪽 이라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발생했다는 사건이 뭐지요?”

“그건…. 그 게이트 안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게 바로 저 아이고요.”

꼬마 아이가 우리를 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누런이가 빛에 반짝여 매끄러워 보였다.

노효만이 꼬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말을 이었다.

“이 아이는 게이트 안에서 나온 자로서 그쪽의 소식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에게 물었다.

“무슨 소식인데요?”

“…… 저 아이가 살던 도시가. 멸망한 소식입니다.”

[시스템 메시지]

[‘멸망의 땅’ 두 번째 파트, 서쪽으로 가는 문이 열립니다.]

‘좋아….’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남쪽에서의 모든 메인 이벤트를 마쳐야만 발동하는 ‘서쪽’ 파트.

지금까지 메인 이벤트를 전부 잘 진행했다는 뜻이다.

이제 게임의 중반에 들어섰다.

나는 인위적으로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시가 멸망했다고요?”

“예. 아이 말로는 몇 년 전 도시 한 가운데에 게이트가 열리며 거대한 괴물들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꼬마 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괴물이 아니라 거인이요! 거인!”

“아, 그래 거인. 거인이 나타나서 도시를 휩쓸었다고 합니다.”

아이는 신나는 이야기를 하듯 나를 보며 말했다.

“맞아요. 거인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쿵쾅쿵쾅! 하면서 건물을 때려 부수고. 사람들을 잡아갔어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들을 잡아가?”

“네! 산 채로 잡아가야 한다면서 도망가지 못하게 다리를 부러뜨려서 잡아갔어요.”

“…… 너 근데 왜 그렇게 해맑아? 너도 그곳에서 왔다면서.”

“남자가 조금 힘들다고 풀 죽어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운영진 측에서 NPC 프로그래밍을 잘못한 건가?

내가 아는 ‘거인을 목격한 꼬마 아이’와 너무나도 다른 반응이었다.

시무룩한 얼굴로 도시에 대해서 암울한 이야기만 뱉어내야 하는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아이는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다.

‘NPC의 성향이 바뀌었다라….’

나는 꼬마 쪽으로 의자를 틀었다.

“꼬마야. 너는 여기로 어떻게 넘어왔니?”

“어…. 그냥 길을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게이트가 제 눈앞에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그 게이트를 타고 왔다?”

“네!”

오케이.

이건 내가 아는 스토리랑 똑같다.

“그럼 그 게이트를 타고 와서, 처음 만난 사람이 누구지?”

“처음 만난 사람? 이 아저씨요. 노효만 아저씨.”

나는 노효만을 보았다.

“노효만 아저씨? 작전 과장님. 서쪽 사막에는 왜 가셨던 거죠?”

잠깐이지만 그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반응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어, 그, 그게. 아! 오지명 박사님의 심부름을 할 겸 들렀습니다. 그곳에서 날뛰는 좀비의…. 발톱을 구해달라고 하셔서요.”

“좀비의 발톱을요?”

“…… 예.”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 그렇군요.”

꼬마 아이를 제일 먼저 발견한 군인이 여섯 번째 라운드에 같이 투입된다.

그 말인 즉슨 작전 과장이 여섯 번째 라운드에 우리와 함께 간다는 뜻.

한숨이 절로 나왔다.

후우-.

김준철 소령이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더니 내게 물었다.

“천재 씨.”

드디어 선택의 순간이다.

“예.”

“제가 시간이 없어서 그런데 단도직입적으로 묻도록 하겠습니다.”

“…… 말씀하세요.”

“내일 아침, 저희는 수색대를 서쪽 게이트로 보내어 그곳에 대해 알아볼 생각입니다.”

“…… 그래서요?”

김준철은 두 주먹을 꽉 쥐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작전에 같이 투입해주시기를 정중히 요청합니다. 아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작전 과장은 초조한 듯 다리를 떨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앞서 PC판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작전 과장, 노효만의 행동.

그가 조심스럽게 말에 끼어들었다.

“여, 여단장님. 이번 작전은 수색 정찰이기에 저희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알고 있다. 다만 게이트의 경험자인 천재 씨가 같이 간다면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겠나?”

“그건….”

노효만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왜 저렇게까지 내가 같이 게이트로 넘어가는 것을 경계하는 걸까?

김준철이 단호한 표정으로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노효만이 더는 말을 잇지 않고 고개를 푹 떨구었다.

내 대답이 앞으로 진행될 스토리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대화였다.

스토리의 흐름을 선택한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확실하게 해야 하니 말이다.

나는 밝게 웃으며 김준철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예, 가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제게도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작전권을 주세요.”

* * * * *

대화를 마친 우리는 김준철 소령의 뒤를 따라 벙커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열자 밝은 빛이 우리를 내리쬐었다. 눈이 부신 나는 손을 눈썹 위로 들어 태양을 가렸다.

“…… 소령님, 질문 한 가지만 더 해도 되겠습니까?”

김준철이 주변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하십시오.”

“정부 측에서는 왜 남쪽 게이트를 수색하지 않으신 거죠?”

이 질문.

내가 ‘멸망의 땅’ 운영진에게도 Q&A 게시판에 물어보았다.

어째서 남쪽 게이트 사건에만 군인들이 나서지 않는 것인가?

그 당시 홈페이지에서 운영진에게 받은 답변은 짧고 굵었다.

[스토리 작가님이 퇴사하셔서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모른단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물었다.

김준철은 시스템이 정해놓은 메인 NPC니깐. 이 정도 질문에 대한 답은 준비해 놓았겠지.

김준철은 어렵지 않은 질문에 대답하듯 가볍게 말했다.

“상부에서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상부? 어디를 말씀하시는 거죠?”

“수도방위 사령부.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사령부의 상황실장이 저희에게 허가를 내려주지 않았습니다.”

“…… 허가를 받고 움직여야 하나요?”

“예, 불분명한 장소에 대한 작전 명령은 전부 상황실에 보고한 후 움직이도록 하는 게 저희 원칙입니다.”

상황실이라면 결국 이 게임의 운영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후우….

결국, 이번에도 정확한 답은 듣지 못했다. 아니, 답이 없는 질문일지도 모르지.

스토리 작가가 없으니 말이야.

“이번에는 상황실에서 게이트 수색 허가가 나왔나요?”

“그렇습니다. 삼 일 동안 수색을 한 후 위험도를 측정하여 다시 보고 달라고 하더군요.”

“아….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뵙도록 하지요.”

“옙! 내일 아침, 이곳으로 오시면 노효만 대위와 함께 수색대가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그들을 이끌고 가주시기 바랍니다.”

작전 과장이 건들거리며 내게 경례를 했다.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경례를 받으며 김준철에게 말했다.

“예. 그럼…. 오늘 하루도 수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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