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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유소라에게 저 곰 인형을 주려고 했다고?

그럼 처음부터 유소라를 찾아갈 것이지 왜 나한테 온 것인가?

그것도 내가 샤워하는 것을 기다리며 말이다.

-으아아앙!

스펙터의 울음소리가 저택에 울리자 다른 이들이 내 방으로 모여들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자는 마정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이 새끼 왜 여기 있어?”

“…… 모르겠네.”

이어 팬티만 입고 허겁지겁 달려온 마이클이 보였다.

“천재 쒸! 무슨 일이에요우?”

급하게 오느라 그런 것 같은데, 같은 남자지만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아, 아무 일도 아니니깐 그 덜렁거리는 거 치워 이.”

“응? 뭐가요우.”

“뭐긴, 그…… 아 됐고 여기서 나가. 정우야, 마이클 데리고 여기서 나가 있어. 그리고 이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

정우가 스펙터를 슬쩍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가 빠르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줄 단번에 알아차렸다.

네 명밖에 없는 저택에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말은,

곧 유소라를 이곳으로 보내지 말라는 뜻.

쿵.

나는 방문을 닫고 스펙터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인형을 왜 유소라에게 준다는 거지?”

“…… 그 누나 거니까요.”

“소라 씨 거라고? 그 인형이?”

“네!”

‘멸망의 땅’ 무적의 존재이자 압도적인 공포감을 주는 괴물이 겨우 유소라에게 인형을 주기 위해 울다니.

‘……’

설마 정우와 나의 추리가 맞는 건가.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을 이었다.

“근데 왜 나를 찾아온 거냐고. 소라 씨를 안 찾아가고.”

“어디 있는 줄 모른다니까요.”

표정으로 보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의 추론을 할 수 있었다.

한 가지는 녀석이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고 있다는 것.

이 경우에는 내게 목적이 있겠지.

또 한 가지는 녀석이 정말로 모른다는 것.

이 경우에는 유소라에게 특수한 장치가 되어 있거나 스펙터의 능력이 제한되었다는 건데….

내 생각에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경우가 맞을 확률이 높다.

시스템이 직접 움직이는 NPC인 스펙터가 유소라의 위치를 알면서도 모른 척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녀석이 왜 유소라의 위치를 모르는 걸까.

시스템의 한계 또는 유소라가 특별한 힘.

‘……’

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녀석에게 말했다.

“…… 그 인형을 내게 넘겨. 유소라에게 가져다줄게.”

“안 돼요. 그 누나한테 직접 줘야 한다고 했어요.”

“줘야 한다고 했다고? 누가?”

“…… 저희 삼촌이요.”

“삼촌이 누군데?”

스펙터가 말할 듯 말 듯 입을 벌렸다 떼었다를 반복하더니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나는 얼굴을 최대한 부드럽게 만든 후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삼촌이 누군지 알려줄 수 있니? 알아야지 소라 누나도 그 인형을 받을 거 아니야?”

“삼촌이 자기 이름은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럼 소라 누나한테는 뭐라고 하면서 그 인형을 주게?”

“…… ”

“괜찮으니까 말해봐. 이름이 아니어도 괜찮으니까 소라 누나한테 뭐라고 하려고 했어? 응?”

스펙터의 몸이 갑자기 부르르 떨렸다. 이어 내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허공을 응시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형, 저 이제 일하러 가봐야 해요.”

“그 인형은?”

“하…. 삼촌이 인형을 빨리 주라고 했는데….”

“그럼 됐네, 너는 인형을 빨리 줘야 하고. 너는 인형을 줄 시간이 없고. 내가 넘겨주면 딱 이잖아?”

“……”

“그 인형만 나한테 주고 가.”

“……”

“…… 달라고!”

나는 강제로 스펙터 손에 있는 곰 인형을 빼앗았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더라도 크게 반항하지 않을 것이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시스템 메시지]

[스펙터로부터 ‘정체불명의 인형’이 김천재 플레이어에게 넘어옵니다.]

나는 곰 인형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투명하던 곰 인형의 색상이 천천히 돌아오며 갈색의 귀여운 새끼 곰이 되었다.

“어? 어?! 어!! 아니 형! 어떻게 제 인형을 만졌어요?”

“어떻게라니?”

“허가하지 않은 플레이어는 만지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 그럼 나는 허가 된 플레이어네?”

스펙터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그…. 그럴 리가….”

나는 곰 인형을 들고 싱긋 웃어 보였다.

가볍다.

사람의 머리가 들어있을 만한 무게는 아니었다.

“도, 돌려줘요, 인형!”

“됐어. 소라 씨한테 준다면서? 안전하게 건네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내게 맡겨.”

“거짓말! 형이 가질 거잖아요?”

“내가 곰 인형을 어디다 쓰겠냐.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스펙터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안 돌려주면 형을 죽일 거예요.”

무력을 과시하는 협박.

나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죽여 보던가.”

“…… 네?”

“할 수 있으면 죽여 보라고.”

“……”

나 말고는 아무도 스펙터에게 이런 행동을 하지 못할 것이다.

녀석의 약점을 정확하게 간파한 자가 없으니 말이야.

“나는 알고 있어, 너는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

“정해진 플레이어 외에는 터치할 수 없다. 맞지?”

내 도발에도 스펙터가 발끈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팩트만 말했으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지.

일반적인 플레이어의 머릿속에는 스펙터가 하위 랭커만 공격하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또 다른 사실 중 하나는, 스펙터의 공격 능력은 상위 랭커에게 반응하지 않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여섯 번째 라운드에 도달한 자가 네 그룹에서 그쳤으면, 나는 확실하게 상위 랭커라는 말.

나는 씨익 웃었다.

“꼬마야, 이건 나를 협박한 벌이다.”

“벌?”

나는 손바닥으로 스펙터의 머리를 내리쳤다.

부웅-

팍!

무적의 존재이지만 만질 수 있었다.

영혼을 만질 수 있는 네크로맨서만 가능한 공격.

스펙터가 머리를 움켜쥐었다.

나는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어때?”

“악! 머리통 깨질 뻔했잖아요!”

“안 깨졌어, 임마.”

“으…. 제가 누군지 알고 있군요.”

“그래. 내가 말은 안 했지만 네 삼촌도 알고 있을 걸?”

“……?!”

깜짝 놀란듯한 표정.

플레이어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그의 능력이었지만, 스펙터는 그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 당연한 건가?’

나는 생각을 하는 척 턱을 괴고 말을 이었다.

“이름을 말해볼까?”

스펙터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 말해봐요.”

“네 삼촌의 이름은…. 아니다! 됐다. 너랑 이런 이야기해서 뭐하냐.”

“말해보라고요. 모르죠?”

“그냥 모른다고 쳐라. 네 삼촌이 누구든지 이제 신경 쓰고 싶지 않으니깐.”

천천히 멘탈을 붕괴시켜 스스로 말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스펙터 놈도 시스템에서 관리하는 NPC.

간단히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잠깐 생각하는 표정만을 했을 뿐 신속하게 말을 돌렸다.

“그거 소라 누나한테 안 전해주면 저 진짜 큰일나요!”

“큰일 안 나게 잘 할 테니깐 걱정하지 말라고 이 녀석아.”

“아 진짜….”

스펙터는 나와 비어있는 허공을 번갈아 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바쁜 것이 확실했다.

내 얼굴은 환하게 미소가 지어졌고.

녀석의 얼굴에는 어둠이 드리웠다.

스펙터가 손을 붕붕 흔들었다.

“형, 그럼 진짜…. 소라 누나한테 그 인형 꼭 전해 주셔야 해요! 알겠죠?”

“알았다고. 알았다고. 알았다고! 똑같은 말 여러 번 하게 하지 말고 이제 가! 소라 씨한테 전해줄 테니까.”

“…… 알았어요.”

스펙터가 등을 돌렸다.

이렇게 쉽게 포기할 줄은 몰랐는데 다행이다. 생긴 것만 아이가 아니라 진짜 아이 같았다.

삐빅.

빨간색의 홀로그램 메시지가 나타났다.

[*주의: 인형을 주인에게 돌려줄 것을 권장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경고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는 했지만 딱히 걱정되지는 않았다.

진짜 큰 페널티에 대해서는 미리 내용을 말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어 봤자 가벼운 벌칙 정도로 끝나겠지.’

곰을 넘겨준 스펙터는 얼굴을 부벼 눈물을 닦아내더니 저택 밖으로 날아갔다.

나는 놈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거울에 곰 인형을 다시 비추어 보았다.

“…… 흐음.”

유소라의 얼굴이 사라졌다.

그냥 곰 인형 본래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아까 보았던 유소라의 머리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전에 펍에서 처음 만날 때 스펙터 녀석이 했던 말.

‘유소라는 누군가와 똑같이 생겼다.’

스펙터가 그런 말을 했을 정도면 유소라가 보통 인물은 아니라는 말인데.

“과연….”

나는 바닥에 앉아 곰 인형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눈, 코, 입, 배 버튼같이 생긴 것들을 전부 한 번씩 눌러보고. 아무 반응이 없어 주먹으로도 때려 보았다.

그냥 곰 인형이었다.

근데,

그냥 곰 인형을 스펙터 녀석이 들고 있을 리가 없다.

“…… 되려나.”

곰 인형의 양팔을 잡아 뜯었다. 안에서 솜이 터져 나왔다. 이어 양쪽 발과 몸을 잡아 뜯고 안을 뒤적거렸다.

솜만 한가득 나왔다.

마지막으로 곰 인형의 머리를 확인했다. 솜 한 뭉텅이가 쏟아져 나왔다. 아무것도 없었다.

진짜 그냥 곰 인형이었나?

싶어서 솜을 뒤적거리는데, 내 눈앞에 검은색 자그마한 물체가 눈에 띄었다.

“유에스비?”

누가 보아도 유에스비였다.

검은색 유에스비에 하얀색 글씨가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From. 관리자]

[To. 유소라]

보낸 이와 받는 이만 적혀 있다.

관리자가 유소라에게.

“…… 역시.”

* * * * *

똑. 똑. 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김천재, 이제 들어가도 되냐?”

“…… 어.”

마정우가 스펙터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며 들어왔다.

“스펙터는 갔냐?”

“오 분 전에.”

“뭐라디?”

나는 정우에게 한 걸음 다가가 작게 말했다.

“…… 잠깐 우리 둘이 이야기 좀 하자.”

“…… 스펙터에 관한 거냐?”

“그렇지. 소라 씨랑 마이클은?”

“문밖에.”

“그럼 잠깐 방에 가서 쉬고 있으라고 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가 방문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소라 씨! 마이클! 둘 다 방으로 돌아가서 쉬고 있어요. 이야기 끝나면 부르겠습니다!”

유소라와 마이클이 동시에 대답했다.

-네!

-오케이!

터벅. 터벅. 터벅. 터벅.

그들의 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스펙터한테서 곰 인형을 빼앗았어.”

“…… 뭐?! 그 새끼가 껴안고 있던 거?”

“어.”

정우가 오만상을 다 지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하…. 너 진짜 겁도 없냐? 녀석이 덤비면 어쩌려고….”

역시, 스펙터가 상위 랭커를 공격하지 못한다는 것을 정우도 모르고 있구나.

나는 싱긋 웃어보였다.

“덤비면 받아주지 뭐.”

“아 됐고. 곰 인형은 어떻게 빼앗았냐? 영체라서 못 만지잖아.”

“그건….”

스펙터가 이곳에 온 이후에 일어난 일들, 그에게 넘겨받은 곰 인형 안에서 나온 유에스비.

그리고 내 주관적인 견해를 섞어 유소라에 대해 말했다.

마정우가 모든 이야기를 경청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라면 스펙터 놈을 이용해서 이 게임의 내막을 알 수 있겠네. 우리가 왜 여기에 모였는지, 이유가 무엇인지.”

“아마도.”

“그럼 스펙터와 유소라를 만나게 한 다음 둘을 심문하는 거 어때?”

“…… 힘들 거야. 가끔 나타나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아 누군가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거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멋쩍은 미소로 정우를 향해 윙크했다.

정우 녀석이 토하는 시늉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 그나저나 그 유에스비는 어디에 가서 열어보지? 컴퓨터가 필요한데.”

“김준철 소령의 사무실이 제일 안전하지 않을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장소 중 안전한 곳은 경성 시청에 있는 시장실과

특전 도깨비 부대의 김준철 소령의 사무실이 적격이었다.

나머지는 공용 컴퓨터인 데다가 누군가 심어놓은 바이러스가 모든 자료를 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김준철 소령이라…. 그럼 바로 이동하도록 할까?”

“아니. 이 유에스비가 열리는 날은 우리가 일곱 번째 라운드를 마무리 지은 후로 하자,”

정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곱 번째 라운드? 왜?”

“이 안에 있는 내용이 밖으로 나가면 안 되니깐. 보안이 완벽하고 철저한 곳에서 작업해야 해.”

“…… 일곱 번째 라운드가 끝난 후라면 설마 거기를 말하는 거냐?”

“맞아. 김준철 소령의 비밀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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