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이량훈과 한조는 저항하지 못했다.
백발노인과 척준경이 있었지만 둘이서 우리 전부를 막기에는 불가능이었다.
나는 남아있는 로브 사내를 향해 걸어갔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
내가 다가가자 그가 뒤로 물러났다.
“김천재,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뭐?”
“내가 너를 너무 얕봤다. 설마 저 녀석이 너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을 줄 몰랐군.”
“…… 너, 누구냐.”
로브를 걸치고 있는 사나이가 양팔을 벌리더니 주문을 외웠다.
주문이 짧고 억양이 강한 것으로 보아 전투 계열의 직종을 가진 자인 것이 확실한데.
놈에게 기회를 주면 안 될 것 같다.
“놈을 막아라.”
내 수하에 있는 스켈레톤 마법사가 로브 사나이를 향해 마법을 사용했다.
불, 얼음, 대지 마법을 동시에 날렸다.
붉게 타오르는 화염구, 단단하게 얼어붙은 고드름, 뾰족한 가시가 많이 달린 돌덩이.
주문을 마친 로브의 사나이가 짧은 단검을 뽑아 들더니 허공에 휘둘렀다.
샥- 샥.샥.
세 개의 마법이 놈의 몸에 닿기도 전에 썰려서 땅에 떨어졌다.
고드름과 돌덩이는 고체이기에 잘리는 게 이해되지만, 그저 원소 중 하나인 화염이 잘려서 땅에 떨어지다니?
화르르륵!
로브 사나이의 후드가 흔들리며 입술이 살짝 보였다.
웃고 있었다.
이어 단검을 머리 위로 들고 외쳤다.
“다음에 다시 보자. 그룹 워프! 장소는 ‘폐허가 된 마을.’”
놈의 몸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감옥에 갇혀있는 이량훈과 박규환을 상대하는 백발노인의 몸에서도 빛이 났다.
“제길!”
한 장에 오천 제니나 하는 최고급 주문서 중 하나.
[그룹 순간이동]
반경 100M 안에 있는 모든 그룹원을 데리고 기억해놓은 장소로 단번에 날아가는 기술이다.
너무 비싸서 게임의 후반부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다는 아이템.
쾅!
하늘에서 빛기둥이 떨어져 내리더니 이량훈과 그의 패거리를 데리고 사라졌다.
단 한 놈을 두고 말이다.
“…… 한조.”
* * * * *
같은 그룹원이 아니었나? 한조만이 이곳에 남게 되었다.
나는 놈이 갇혀있는 감옥 앞에 앉아 ‘목구멍 포도청’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스킬이 시전된 이상 스켈레톤 대장도 멈출 수 없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조영기. 김연희랑 김리아는 어디 있지?”
“마정우와 그 검둥이 친구를 보호하고 있어.”
“…… 그렇군. 소라 씨는?”
“소라 씨? 아-. 그 여자?”
조영기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여자는 없던데?”
“…… 뭐?”
“네가 말해준 장소에는 둘 밖에 없었어. 전부 아지트에 대기하고 있고.”
“아지트가 어딘데?”
“광장 근처. 여기서 멀지 않아.”
“광장 근처라…… ”
-우워어어어!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들이 태세를 정비하더니 동시에 덤벼들었다.
오우거 다음으로 나온 켈베로스와 가고일까지. 한 개의 소대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숫자였다.
대략 서른에서 마흔 마리 정도.
“…… 가라.”
가웨인과 박규환이 미궁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을 휩쓸었다. 박규환 녀석도 언제부터인가 오라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개 군인이라 생각했는데 특전사는 다르다는 건가.
광란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미칠 듯이 날뛰었다.
조영기가 전투 중인 내 수하들을 보더니 손뼉을 쳤다.
짝!
“와- 미궁 게이트는 경성에 있는 플레이어 전원이 나서서 깨는 이벤트가 아니었나? 몬스터들이 왜 저렇게 약하지.”
“몬스터가 약한 게 아니야.”
“…… 그럼. 네가 강하다는 건가?”
“당연하지.”
조영기가 반박하지 않았다.
앞서 내가 보여준 전투를 생각하면 실력을 알 수 있으니깐.
“김천재,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너와 함께 간다면 이 게임의 끝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
“예전에도 이런 느낌을 받았던 플레이어가 한 명 있었는데, 그때는 게임이 망해버렸거든.”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조영기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마정우 아니면 나, 둘 중 한 명일 텐데,
이제라도 정체를 밝힐까?
투득. 투드드득.
한조를 가두고 있는 감옥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놈이 도망갈 준비를 하는지 그림자 쪽으로 은근슬쩍 누웠다.
“한조,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라. 네 능력은 이미 간파하고 있어.”
“나를 잡아도 이량훈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 새끼는 필요 없어. 어차피 ‘폐허가 된 마을’로 갔다면 다시 만나게 돼 있거든.”
스켈레톤 대장의 감옥이 풀리는 동시에 나는 아이언 메이든 스킬을 사용했다.
투명한 가시가 놈의 몸을 감싸 안았다.
“…… 이게 뭐지?”
“피해 반사 주문. 이제 너는 그 누구도 공격하지 못해.”
“피해 반사?”
“그래. 네가 누군가를 공격한 만큼 대미지가 너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게 돼 있다는 거지.”
“……”
“나를 죽이면, 너도 죽는다. 나는 너를 죽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한조가 이빨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를 내었다.
쓰읍-.
녀석의 미간 사이가 좁아지며 주름이 졌다.
“엿 같은 스킬을 배웠군.”
“칭찬해줘서 고마워. 자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
“…… 뭘?”
“복수, 이 새끼야.”
나는 한조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인간의 몸이 아니라 쇠를 걷어찼다고 생각될 만큼 단단했다.
데스나이트의 부츠를 신고 있는 내 발가락이 저릴 정도였다.
“…… 완전히 괴물이 됐군.”
한조 녀석이 어설프게 미소를 지었다.
“칭찬인가?”
“칭찬이지. 네 몸과 마음이 일치됐잖아.”
대화를 끝낸 나는 놈을 계속해서 때렸다. 주먹을 힘껏 휘둘러 코뼈를 부러뜨리고, 팔꿈치를 뒤틀어 손을 못 쓰게 만들었다.
어차피 X 바이러스는 대악마라 불리는 놈 중 한 명의 DNA를 심어 근섬유와 뇌세포를 조작하는 독.
뼈는 그대로다.
한조가 피범벅인 얼굴로 숨을 거세게 몰아쉬었다.
“아직 안 끝났어.”
나는 이어 갈비뼈를 걷어차 숨을 제대로 못 쉬게 만든 후, 명치를 발꿈치로 내려찍었다.
“크어억!”
“몸이 아무리 단단하더라도 관절과 급소는 어쩔 수 없지.”
“크윽….”
“아까는 나를 죽이려고 신이 나서 발광을 하던데 어째 반응이 심심하네?”
한조가 비굴한 포즈로 나의 모든 공격을 그대로 맞았다.
반항할 생각이 없나 보다.
나였으면 덤벼들었을 것이다. 어차피 죽게 될 거 복수라도 확실하게 해야 하지 않은가?
양팔이 부러졌으면 일어나서 발차기를 날리던지, 입으로 깨물어서라도 말이다.
나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한조에게 말했다.
“남자 맞냐? 이런 상황에서는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덤벼야 하는 거 아니냐.”
한조가 몸을 웅크린 채 고개만 살짝 들었다.
“후우……. 끝인가?”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던지듯 말했다.
“끝일 것 같아?”
“……”
“너는 곱게 죽지 못 할 거야. 네 손에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한두 명이 아니니깐.”
“마음대로 해라. 다만 네게 살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살려줄 생각 없으니 그런 생각은 하덜랑 마세요.”
피투성이의 한조가 비열한 웃음을 내뱉었다.
크하하하-!
피에 젖은 입이 역겹게 느껴졌다.
곧 죽을 놈이 웃다니, 정말 이름값을 하는 사이코인가?
나는 놈을 뺨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물었다.
“…… 웃겨?”
“웃기지. 어차피 너는 나를 절대로 죽이지 못할걸.”
“뭐?”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로 콧방귀가 나왔다. 뭘 믿고 이렇게 까부는지 모르겠다.
한조 녀석이 상체를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내가 죽으면 일본과 한국의 플레이어는 앞으로 모든 라운드에서 등을 지게 된다.”
“…… 그래서?”
“그럼 동아시아 서버의 플레이어 전원, 일곱 번째 라운드의 한계를 넘지 못할 거야. 결국 이 게임 밖으로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되는 거지.”
대 악마라 불리는 놈 중 한 명을 잡아야 하는 마의 일곱 번째 라운드.
동아시아 서버의 모든 플레이어가 모여 보스 레이드를 하는 곳이다.
“…… 필요 없다. 너희가 없어도 일곱 번째 라운드를 클리어할 방법 정도는 알고 있어.”
“뭐?”
“내가 누군지는 이량훈에게 들어서 알고 있을 텐데?”
한조가 표정을 굳혔다.
그건 그렇고 놈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라운드를 클리어하지 못하면 이 게임 밖으로 아무도 나갈 수 없다.’
게임에서 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
흐음.
“어이 미이라. 너는 마치 이 게임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아는 것처럼 말하네?”
한조가 씨익 웃었다.
“……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
“백 프로 나갈 수 있다고 장담하기는 힘들지만 말이야.”
이야기를 듣던 조영기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김천재. 이 녀석은 데려가서 이야기 좀 길게 나눠봐야 할 것 같은데?”
“……”
“우선 자리를 이동하도록 하자. 여기는 글로벌 서버라 다른 놈들이 오면 골치 아파질 거야.”
나는 한조와 조영기의 얼굴을 번갈아 본 후 생각에 잠겼다.
녀석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 일수도 있지 않은가?
지금 이 녀석을 처리하지 않으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모르는데….
띠링-!
“응?”
갑자기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돌발 이벤트, 평화를 지켜라! <나이트메어> (완료)]
[미궁 게이트의 모든 몬스터를 처치하셨습니다.]
[몬스터 처치율 100%, 모든 몬스터를 독식하신 ‘김천재’ 플레이어님께 특별 보상이 지급됩니다!]
뒤로 돌아보니 게이트에서 넘어오던 몬스터들이 전부 쓰러져 있었다.
쾅!
게이트가 터졌다.
이어 그 자리에 남은 나무 상자 하나가 보였다.
“…… 뭐야 저건 또.”
삐빅. 삐빅. 삐빅.
고대유물이 레이더가 울렸다. 맵 위에 표시된 위치를 보니 방금 보상으로 받은 상자다.
조영기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시스템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나이트메어?! 네가 잡고 있던 몬스터들이 나이트메어 난이도였어?”
“…… 어.”
한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쓰러진 몬스터들을 쳐다보았다.
“김천재…. 왜 하필 한국에 저런 놈이….”
나는 시스템 메시지를 전부 확인한 후 당수로 한조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팍!
놈이 정신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조영기, 이동한다.”
* * * * *
이량훈과 그의 패거리. 빛기둥과 함께 폐허가 된 마을 어딘가로 이동되었다.
콰강!
주변을 둘러보니 십자가가 보였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성당이 틀림없었다.
이량훈이 목을 좌우로 꺾어 스트레칭을 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으…. 다들 괜찮나?”
로브의 사나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십자가를 올려보며 대답했다.
“그래. 너희 둘은?”
“나는 괜찮아. 영감! 동팔 할배!”
백발의 노인이 허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났다.
“아이고…. 나 같은 노인은 워프 주문서를 사용 안 한다고.”
“죽는 것보다는 낫지.”
이량훈이 로브 사내를 보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어이, 고티. 네 덕분에 살았어.”
태양이 성당을 비추었는지 십자가 모양 그대로 빛이 들어왔다.
어둡던 성당 안이 환해지며 로브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목까지 내려오는 헝클어진 파마머리. 날렵한 턱선에 깊은 눈동자와 끝이 날카로운 눈매.
수십, 아니 수백 개의 길고 짧은 상처가 그어져 있는 얼굴.
고티라 불리는 자가 후드를 벗었다.
펄럭.
“이량훈, 다음 계획을 실행하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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