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잠깐이지만 당황했다.
녀석이 내 정체를 알고 있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만나서 반갑군, 고인물.”
“…… 고인물?”
“아닌 척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 지금 네가 입고 있는 갑주. 데스나이트 세트가 그 증거다.”
나는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시치미를 떼었다.
“이걸 입으면 고인물이 되는 건가?”
“아니-. 그 갑주를 고인물만이 입을 수 있는 거지. 획득 경로를 아는 자는 고인물이 유일하니깐.”
“…… 네 맘대로 생각해라. 나야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랑 비교해주면 고맙지.”
이미 녀석의 머리에는 내가 닉네임 ‘고인물’ 캐릭터의 주인으로 확정되어 버렸다.
‘뭐…. 맞긴 하지.’
언젠가는 다른 플레이어에게 들키리라 생각했지만, 이놈에게 제일 먼저 밝혀질 줄이야.
나는 씨익 웃은 후 녀석에게 대답했다.
“근데 내가 고인물이면 뭐가 바뀌는 거지?”
“변하는 것은 없어. 곧 쏟아질 몬스터들을 상대해야 한다.”
“전부 잡으면 나를 살려줄 건가?”
“아니. 몬스터한테 죽던가, 내게 죽던가. 둘 중 하나다.”
“어떻게 해도 죽는 거네?”
이량훈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언제 죽는지가 달라질 뿐.”
정신 나간 사이코패스 새끼.
제 3자의 시선에서는 내가 위험한 상황에 부닥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이곳으로 온다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나는 경성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 두었고.
어떻게 움직일지까지 계산을 마쳤다.
현재 네 명의 랭커 플레이어를 등 뒤에 두고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 최선책은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시간을 끄는 것이다.
조영기가 일을 마무리할 때까지.
‘여차하면 박규환과 가웨인이 있으니….’
쿠웨에에엑!
미궁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이 하나둘 씩 나오기 시작했다.
슬라임, 고블린, 코볼트 따위의 하급 몬스터들이 순서대로 나왔다.
한 주먹도 안 되는 것들이 기세 좋게 덤벼들었다.
“와라.”
-쿠웩!
코볼트 녀석이 미식축구 선수처럼 내 하체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어린아이와 놀아주듯 손을 마주 잡고 빙글빙글 돌린 후 게이트를 향해 던졌다.
놈이 게이트 밖으로 나오는 다른 몬스터와 출동했다.
쿵!
‘아차차!’
시간을 끌려면 천천히 상대해야 하는데 실수다.
팔짱을 끼고 내 전투를 보던 한조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김천재. 놀지 말고 빨리 처리해라.”
“…… 노는 중이니 방해하지 말아 줄래?”
“뭐?”
“나는 바쁠 게 없어서 말이야. 어차피 죽을 거 이놈들이랑 좀 놀다가 죽으려고.”
“…… 이 자식이.”
한조가 내게 다가오려 하자, 이량훈이 손을 뻗어 말렸다.
“가지 마라. 어차피 이곳에서는 네 공격이 녀석에게 닿지 않아.”
“제길….”
“게다가 네크로맨서의 범위 능력은 이 안에서 적용된다. 녀석이 마력을 소모할 때까지 기다려.”
“…… ”
“계획대로 움직여라. 네크로맨서는 마력만 빠지면 허수아비가 되니, 그때까지 지켜보도록 해.”
맞는 말이다.
네크로맨서는 마력 관리를 하지 않는다면 저주는 물론이요. 주요 능력인 소환마저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내가 그럴 리는 없지만.
이량훈이 웃음기 가득 한 얼굴로 비꼬듯 내게 말했다.
“김천재, 혼자 싸우기 힘들지 않나? 스켈레톤이라도 몇 마리 만들지 그래?”
나는 머리 위에 있는 생명력 게이지를 힐끔 보았다.
퍼센테이지로 치면 5프로 정도가 내려가 있었다.
“나는 직접 싸우는 걸 좋아해서 말이야.”
“네크로맨서가? 하하…. 뭐, 마음대로 해라. 어떻게 죽던 네 마음이니 말이야.”
“죽음에 대한 선택지를 줘서 고맙군.”
“지난번의 빚을 갚는 거지, 뭐.”
얄미운 새끼.
코볼트 타임이 끝나자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의 등급이 올라갔다.
오크, 트롤, 오우거.
녀석들이 내 생명력 게이지를 깎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오크와 트롤까지는 상대할 만했는데, 오우거부터는 주문 없이 싸우기에 벅찼다.
“우워어어!”
놈이 나무 방망이를 휘두르며 나를 쫓아 왔다.
“꺼져!”
팍!
나는 오우거의 급소를 걷어찼다. 놈이 신음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용의 송곳니로 마무리를 하려는데, 또 다른 오우거 녀석이 전투에 끼어들었다.
“우워!”
쿠궁!
방망이가 땅을 내리쳤다. 바닥이 갈라질 정도로 강한 일격이었다.
“하…. 참.”
움직임이 큰 몬스터라서 일대일 대결은 상대하기는 쉬웠지만, 하나둘 씩 모이다 보니 처리하기가 힘들어졌다.
‘조영기, 이 거북이 새끼….’
내 싸움을 지켜보던 이량훈 패거리가 크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중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자는 무엇이 그리 기쁜지 손뼉까지 쳤다.
-푸하하하!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 같은데.
‘…… 누구지?’
부웅-
오우거의 방망이가 내 머리 위로 스쳐 갔다. 하마터면 생명력을 크게 손실할 뻔했다.
벌써 생명력 게이지가 반이나 내려갔는데, 어쩔 수 없이 플랜 B를 사용해야 하는가.
나는 독백했다.
“…… 전투 준비.”
* * * * *
한조 녀석이 귀를 쫑긋거리더니 이량훈에게 속삭였다.
“저 녀석, 싸울 준비를 하는 것 같군.”
“뭐?”
“방금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했다. ‘전투 준비’라고.”
“…… 그게 들렸나?”
“독순술(讀脣術). 놈의 입을 읽었다. 김천재의 소환수가 어디 있는지 파악했나?”
“아니. 이 마을에 들어올 때까지는 봤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더군.”
“…… 빨리 찾아라. 내 부대도 놈의 기습 공격에 한 번에 무너졌어.”
이량훈이 무언가를 생각하듯 잠깐 눈알을 굴리더니 한조에게 대답했다.
“알았다. 혹시 모르니 내 아이들도 전부 이곳으로 부르도록 하지.”
“그래. 청사 앞에도 병력을 대기 시켜놓도록 해.”
이량훈이 뼈로 만든 벽에 기대어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오우거의 공격을 피하며 천천히 이량훈 패거리와 거리를 좁혔다.
사실 피하는 척을 하며 움직이는 것이었다.
부웅- 부웅-
“맞춰보라고!”
오우거가 열을 내며 속도를 높였다. 덕분에 나도 더욱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내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이량훈이 소리쳤다.
“한조! 놈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아!”
한조가 검을 뽑아 들더니 나를 향해 휘둘렀다.
샥-
일부러 피해 보라는 듯 느리게 말이다.
“어어! 나를 죽이려고?”
“이 안에서는 플레이어 간의 공격이 불가능하다. 그저 밀어낼 수만 있을 뿐.”
미이라 같이 붕대나 칭칭 감고 있는 주제에 말은 잘하는구나.
후우-.
어떻게 해서든 놈들에게 저주를 걸어야 할 텐데. 방심하게 만들 틈이 생기지를 않아서 문제다.
위이이이이잉.
응?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드릴 소리가 들려왔다. 일반적인 가정에서 쓰는 드릴이 아니라. 공사 현장에서 쓰는 중장비, 유압 드릴이 떠오를 만큼 굉음이었다.
키기기기기기긱-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이량훈과 그의 패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몸을 틀었다.
심상치 않은 것이 오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 왔나.’
쿠궁!
이량훈이 뼈로 만든 벽에 금이 생겼다.
쿠구궁!
금이 크게 벌어지더니 흙이 흘러들어왔다
쿠구- 우우우웅.
콰광!
굉음과 함께 흙더미가 파도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지면 파도를 타고 날아온 조영기가 환한 미소로 소리쳤다.
“늦었지!”
“조온나 늦었어. 이 대머리 새끼야!”
“뭐 죽기 전에 도착했으니 약속은 지켰다.”
“하…. 정우는?”
“마정우는 구출했다.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 놨어.”
“…… 오케이.”
무방비 상태의 오우거들이 흙 파도에 정면으로 맞으며 파묻혔다.
이량훈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 이게 뭐야!”
한조가 대답했다.
“제길, 저 새끼는 김천재의 동료다!”
“김천재의 동료? 녀석과 친한 자들은 우리가 전부 감금시키지 않았나?”
“…… 내 실수다. 정복자의 무덤에 병력을 남겨놨어야 했는데….”
다다다다다다-!
조영기가 만든 구멍으로 내 소환 수들이 달려 들어왔다.
전투 준비를 마친 가웨인과 박규환. 그리고 스켈레톤 대장이 적을 향해 동시에 덤벼들었다.
나는 이량훈과 한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목구멍 포도청 시전!”
스켈레톤 대장 둘이 한 명씩 맡아 흩어지며 스킬을 사용했다.
[목구멍 포도청 시전]
▶목구멍 포도청 (마나 소모: 0)
-소환주가 지목한 적을 상대로 강제 수사를 진행합니다. (강제 수사가 진행 중인 적은 움직임이 봉쇄됩니다.)
스켈레톤 대장의 양팔이 감옥 모양으로 변하더니 한조와 이량훈을 가두었다.
쾅!
적들이 방심하지 않았다면 절대 성공시키지 못할 능력.
전제조건이 ‘스킬을 사용하는 동안 적이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여서 굉장히 까다로우니 말이다.
[스켈레톤 대장이 적군을 대상으로 강제 수사를 진행합니다.]
한조와 이량훈이 감옥 안에서 발버둥을 쳤다. 모든 움직임이 결계에 막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강제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내부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즉- 갇히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소리. 적을 공격할 수도 없고, 적에게 공격받지도 않는다.
나는 둘은 보며 배를 잡고 크게 웃었다.
“푸하하! 꼴 보기 좋군.”
한조가 감옥을 붙잡고 소리쳤다.
“뭐야! 건물 안에서는 플레이어 간의 전투가 불가능한 것 아니었나.”
“맞아, 아까까지는.”
“아까까지는?”
나는 조영기가 이곳으로 오며 뚫어놓은 구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저 구멍 보여?”
“…… ”
“내 친구가 만든 저 구멍을 통해 지상과 지하가 연결되었다.”
“아…… ”
“즉, 이제 이곳은 내부가 아닌 외부의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스윽-
검집에서 날이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상체를 납작하게 내려 공격을 피했다.
샥.
누구지?
캉!
투구 끝이 날붙이에 부딪혔다.
미리 피한 나보다 더 빠른 검술을 가진 자가 있던가?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백발의 노인이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젊은이. 저번에 목을 떨어뜨렸어야 했는데, 내가 늦었구만.”
“…… 당신 목이나 조심해.”
박규환이 백발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짧은 순간에 날붙이 튀는 소리가 연속으로 들려왔다.
캉! 카강! 캉!
갑자기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쿠궁!
쏟아지는 벽돌 사이로 검은 갑주를 입은 거구의 사나이가 나타났다.
소드 마스터 척준경[拓俊京].
청사 입구를 지키러 갔던 그가 빠르게 복귀했다.
상황 파악을 끝낸 척준경이 몸에서 오라를 뿜어냈다.
“또 네놈이냐.”
역시 고려 최고의 무신이라 불릴 만하구나.
다시 보아도 척준경의 신체와 오라가 너무나 훌륭했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오라와 공격적인 자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매서운 살기.
적의를 둔 자에게 보내는 타오르는 눈빛이 일품이다.
“…… 척준경. 내 밑으로 올 생각은 없나?”
“뭣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내 계약자는 이량훈이다.”
“…… 계약자?”
잠깐만.
소환수가 자신의 주인을 계약자라고 표현하는 일이 있던가?
나는 이량훈을 힐끔 보았다.
놈이 웃고 있었다.
“……”
나도 같이 웃었다.
척준경을 믿고 저런 표정을 짓는 것 같은데.
내게는 이놈이 있으니깐.
두두두두두두-
“주군!”
가웨인의 외침이 공기를 터트리는 것처럼 큰 파동을 만들었다.
잠깐이지만 척준경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본다.
둘은 서로를 보는 순간 검을 꺼내 들었다.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적인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바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쾅!
검과 검이 부딪치는 것이라고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폭발음이 났다.
눈을 깜빡였을 때는 이미 둘이 서로의 검을 밀어내며 힘 대결을 하고 있었다.
전설과 전설의 대결.
“…… 끝을 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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