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일촉즉발의 상황.
우리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한조가 검을 뽑아 들자 그의 부하들이 원을 만들 듯 주위를 감싸 안았다.
내가 도망갈 길을 미리 차단하겠다는 뜻이었다.
“김천재. 이곳은 멸망의 땅이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힘으로 빼앗아 보아라.”
“…… 후회하지 않겠어?”
“전혀. 그나저나…. 죽기 싫으면 네 부하를 빨리 부르는 게 좋을 텐데?”
“내 부하?”
“그래, 내게서 성을 빼앗을 때 사용했던 놈들 말이야.”
나는 의아했다.
혼자 있는 나를 공격하는 편이 이기기 더욱더 쉬울 텐데, 내 소환수들을 부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녀석과 함께 움직이는 자들을 차례대로 생각해보니 답이 절로 나왔기 때문이다.
“…… 그렇구나.”
“뭐?”
“여기 있지? 그 녀석.”
이상하다고 생각된 나는 시선을 멀리 돌려 주변을 확인했다.
‘…… 역시.’
한조의 부대 뒤편, 경성 청사 앞에 로브를 쓴 플레이어 여럿이 보였다.
남다른 기운이 느껴지는 세 명의 남성. 분명 저 중 한 명이 이량훈이 틀림없었다.
자기 몸집보다 큰 낫을 들고 있으니 내가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지.
‘뒤를 쳐서 내 소환수를 빼앗아가려는 계획이군.’
내 시선이 이량훈을 향하자, 한조 녀석이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부웅-.
“어딜 보는 거냐.”
“…… 저놈이 내 소환수를 빼앗아가려는 계획이었군.”
“눈치가 빠르군.”
“허허…. 너는 연기가 너무 서툴러. 나를 속이려면 좀 더 연습하고 와야겠어.”
한조가 이빨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를 내었다.
“후우- 쓰읍. 그럼 계획을 변경하도록 하지. 네 친구들을 살리고 싶다면 순순히 나를 따라오도록 해라.”
“…… 뭐?”
“네가 허튼짓하는 즉시 친구의 목이 떨어지도록 부하에게 명령했다. 반항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한조 녀석이 비열한 표정을 지었다.
야비한 방법을 사용할 줄 알고 있었고, 인질을 이용해 협박해오리라는 것도 예상하였다.
그런데도 몸속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듯, 화가 치밀어 올랐다.
“…… 비겁한 새끼.”
“비겁? 크하하하…. 그래. 나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비겁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상대하기 껄끄러운 놈이다.
비겁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악한 마음을 가진 자.
“이렇게까지 나를 잡으려는 이유가 뭐냐? 혹시 네 번째 라운드에서 내게 패배한 것 때문인가?”
“…… 이유는 나중에 알려주도록 하지. 우선 따라오도록 해라, 친구를 죽이고 싶지 않다면.”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따라가면 친구들을 살려주나?”
“글쎄,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따라오지 않는다면 네 친구는 지금 죽어.”
단호한 대답과 표정.
한조와 이량훈.
둘 다 상대방을 죽이는데 망설임이 없는 놈들이다.
한다면 하는 놈들이라 정우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한조를 따라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 조영기를 믿을 수밖에.’
* * * * *
한조가 안내해주는 방향에는 로브를 쓴 플레이어 세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청사에 가까워지자 여러 나라에서 경매에 참여하러 온 외국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아시아인뿐만 아니라 유럽부터 아메리카 서버의 플레이어까지.
이렇게 외국인들이 많은 곳에 내 현상 수배서를 붙여 놓다니, 갑자기 창피해졌다.
‘으…. 직접 나서지 않았다면 전 세계의 플레이어가 나를 노릴 뻔했다.’
빌어먹을 이량훈 새끼.
한조의 안내를 따라 청사 앞에 도착하자 이량훈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스톱, 거기까지. 더 이상 다가오지 마.”
그의 한 마디에 모든 병력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뭐지?’
한조가 석연찮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왜? 네가 말한 김천재를 잡아왔는데.”
“놈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니 서로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게 좋아.”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역시 얕봐서는 안 될 놈이다.
사실 내 ‘아이언 메이든’ 사정거리 안에 핵심 멤버들이 전부 들어오면 저주를 사용하려 했는데.
정확하게 간파당했다.
이곳에 오기 전 준비해 온 수많은 작전 중 하나.
‘그래…. 이 정도는 돼야 내 라이벌이라고 불리던 놈이지.’
한 수 정도는 읽어야 상대할 맛이 나지 않겠는가.
한조가 미간을 찌푸렸다.
“위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미리 나를 공격하지 않았겠나?”
“아니, 네크로맨서의 스킬은 대부분 범위 능력이다. 우리 전부가 모였을 때 사용하려 했을 수도 있어.”
“…… 그래?”
“그래, 한 번의 기회로 우리 전부를 몰살시킬 수 있는 놈이니 더욱 조심하도록 해.”
한조가 멋쩍은 듯 콧잔등을 긁었다.
나는 이량훈을 향해 박수를 쳐주었다.
일반 네크로맨서는 이런 상황이 오더라도 일이 벌어질 때까지 전혀 생각 못 할 부분인데 말이야.
이량훈이 나를 보더니 뒤로 한 발자국 더 물러났다.
“김천재, 오랜만이야?”
“오랜만이군.”
“대호 사건 이후 너를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다섯 번째 라운드로 도망갔다면서?”
“도망은 무슨. 그냥 앞으로 나아간 것뿐이지.”
나는 한숨을 푹푹 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를 피해 다음 라운드로 이동한 것 아닌가?”
“착각은 자유. 마음대로 생각해라.”
“…… 그래. 그래서 대호는 어디 있지?”
나는 이량훈의 눈을 회피했다.
“모르겠네.”
“…… 놈을 내게 넘겨라. 그럼 이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해주지.”
“나도 어디 있는지 모른다니깐? 뭐 어디 똥이라도 싸러 갔나 보지.”
“……”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자고. 내가 저 안으로 들어가면 친구들을 풀어준다면서?”
이량훈이 입고 있는 로브의 후드 사이로 그의 입술이 살짝 보였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있나?”
“알면 내가 따라왔겠냐.”
“지옥을 보게 될 거야.”
“지옥이라, 여기랑 똑같네?”
“…… 얄미운 자식.”
조영기 해결의 실마리는 네게 넘어갔다.
늦지 않도록 해라.
* * * * *
청사로 들어가는 입구, 김준철의 부하들이 우리의 앞길을 막았다.
“신분증을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샥-
백발노인의 검날이 번쩍였다. 보통 실력자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일격이었다.
경비병의 머리가 떨어졌다.
털썩.
나는 땅에 쓰러진 군인을 보았다.
“이렇게 막 나가도 되나?”
이량훈이 대답했다.
“어차피 녀석들과 친하게 지낼 생각은 없었어.”
“…… 정부 쪽 NPC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을 텐데. 라운드 진행이 힘들어질 거야.”
“내 목적은 강한 힘을 얻는 것. 그리고 이 게임에서 나가는 거다. 라운드는 진행할 생각이 없어.”
“…… 이 게임에서 나가는 방법은 알고 있나?”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아마도.”
세 번째 라운드에만 머무는 놈이 이 게임에서 나가는 방법을 찾았다고?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다섯 번째 라운드까지 오면서 내가 발견한 실마리는 단 하나 ‘사자의 서’ 뿐이었는데.
“거짓말.”
“…… 거짓말일 수도.”
두루뭉술한 답변.
이야기가 길어지자 한조가 등을 떠밀었다.
“나는 이곳에서 오래 머물지 못한다. 빨리 일을 처리하도록 하지.”
이량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고급 호텔의 로비만큼 화려한 청사의 1층. 각국에서 모인 플레이어들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경성 청사에 입장하셨습니다.]
[본 건물 내에서는 플레이어 간의 전투가 금지됩니다.]
모든 스킬과 공격적인 움직임이 허용되지 않는 장소.
왜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모르겠다.
지옥을 보여준다는데 공격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려는 거지?
로비 끝에 있는 화분을 치우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비밀 계단이지만 웬만한 플레이어들은 전부 알고 있는 그 장소.
[미궁 입구]
청사 밑으로 내려가자 지하 미궁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이 던지듯 말했다.
“이곳은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지역입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량훈이 귀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병 둘이 엑스자로 막고 있는 창을 치워 길을 열어주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아는 미궁과 길이 다르거나 다른 점이 있나 확인했다.
‘똑같네.’
이곳으로 오는 내내 이량훈과 그의 그룹원들이 나와 거리를 유지했다.
한 치도 방심하지 않겠다는 건가.
‘하긴 저번 전투에서 그 꼴을 당했으니….’
미궁의 끝에 도착하자 빠르게 소용돌이치는 게이트가 보였다. 이량훈의 소환수인 ‘척준경’이 게이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수고했다.”
척준경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나를 보는 표정이 심상치 않다. 금방이라도 나를 죽이려 들 것 같은 눈빛.
나는 비아냥대듯 척준경에게 말했다.
“수고했다.”
이량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따라 하지 마라.”
“예예. 그래서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가 뭐지? 지옥을 보여준다면서.”
“…… 이곳은 플레이어 간의 전투가 금지되어 있다.”
“나도 알고 있어.”
“그럼, 플레이어가 아닌 몬스터와의 싸움은 가능하다는 말이거든.”
“…… 응?”
[‘이량훈’ 플레이어에 의해 미궁의 게이트 난이도 <나이트메어>의 돌발 이벤트가 발동합니다.]
[돌발 이벤트, 평화를 지켜라!]
[일정 시간 동안 게이트에서 몰려오는 몬스터를 막으십시오.]
[지속 시간: 30분]
콰지지지지직!
갑자기 뼈로 만든 벽이 사방을 가로막았다. 아무도 이곳에서 도망갈 수 없게 말이다.
이량훈이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김천재, 내가 아까 말했지? 지옥을 보여준다고.”
“…… ”
“어때? 대호를 넘겨주면 살려줄 수도 있는데.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떤가?”
놈의 얼굴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대호를 넘겨주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을 테고. 그렇다면 저 이벤트가 놈의 진짜 목적이겠군.
나는 담배 한 개피를 꺼내어 물며 놈에게 물었다.
“나를 속박하지 않고 데려온 이유도 이것 때문인가?”
“…… 그래. 진짜 네 실력을 보고 싶었거든. 어차피 대호는 줄 생각도 없을 테니 말이야.”
“…… 빙고. 근데 시체도 없고. 소환수도 없는 이곳에서 내 실력을 본다고? 너무 어불성설 아니냐.”
이량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불성설이라…. 맞아. 나를 이긴 플레이어에게 주는 핸디캡 정도로 생각하도록 해라.”
“핸디캡? 핸디캡은 보통 대결에 유리한 사람한테 주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네게 준 거야, 김천재. 아니! 이제는 이렇게 불러야 하나? 어둠의 힘으로 이 세계의 필멸자라 불리던 플레이어!”
“……”
이량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가 숨을 크게 몰아쉬더니 날 선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부동의 랭킹 1위, 최강의 네크로맨서 ‘고인물’. 다시 만나서 반갑다, 내 라이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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