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게이트를 넘어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왔다.
이제 모두를 데리고 다시 '폐허가 된 마을'로 이동하면, 게임의 중반부인 여섯 번째 라운드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게이트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 나오니 조영기와 김연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같이 가기로 했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를 기다렸어?”
조영기가 대답 없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김연희가 토라진 아이처럼 투덜거리며 내게 말했다.
“그럼 따로 가려고? 어차피 가는 길 같이 가는 게 좋지 않아?”
“뭐…. 그런가?”
나는 괜스레 김연희와 조영기의 허리춤을 밀며 환하게 웃어 주었다.
앞서 나 때문에 고생한 일도 몇 있기에 미안한 것도 있었고, 앞으로 이 두 명에게 부탁할 일이 좀 많을 것 같아서 거리를 좁히면 좋을 테니.
“응? 왜 보초가 없지.”
성문을 지키는 군사가 없었다.
우리가 엘프 헬름에서 지낸 시간이 한 달이 채 안 되니 항전은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전투가 있었다고 해봤자 결국 플레이어 간의 싸움.
NPC가 전멸할 정도로 큰 전투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텐데 왜 성 앞이 비어 있는 것일까?
나는 성 안으로 들어가 도시를 둘러보았다.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에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시장조차 텅 비어 있었고, 하늘은 어두운 먹구름이 끼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맑게 개어 푸르고 환했다. 네 번째 라운드의 컨셉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처럼 보였다.
‘…… 뭐지.’
조영기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김연희가 나무 위로 올라가 먼 곳을 확인하더니 우리에게 소리쳤다.
“아무것도 안 보여!”
“…… 조영기, 김연희. 흩어져서 사람들을 찾아보도록 하자.”
갑자기 등골이 싸늘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먼저 도착한 마정우와 유소라, 마이클은 잘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돌려 그룹 상태 창을 확인했다.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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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재’ 님의 플레이어 그룹」
-김천재: 양호(파랑)
-마정우: 최악(빨강)
-유소라: 나쁨(노랑)
-마이클 비치: 나쁨(노랑)
[양호(파랑): 생명력 90% 이상]
[보통(초록): 생명력 75% 이상]
[나쁨(노랑): 생명력 50% 이하]
[최악(빨강): 생명력 15%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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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의 생명력 게이지가 바닥을 기고 있었다.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유소라와 마이클도 큰 상처를 입은 것 같다.
누군가와 붙게 된 것 같은데 이곳에서 황금 세트를 입고 있는 마정우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제길.”
나는 ‘정복자의 무덤’ 안을 쥐 잡듯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조영기가 마법을 사용해 지면에 파도를 만들어 빠르게 이동했다. 김연희가 암살자 전용 스킬인 은신술을 이용해 건물 이곳저곳을 뒤져 보았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도시 내에 있는 성. 얼마 전에 큰 전투를 치렀던 곳이다. 성 외부와 내부 전부 수리를 마쳤는지 큰 이상은 없었다.
그 말인즉슨 또 다른 큰 전투가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것.
어떻게 된 것일까.
전투의 흔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사라지고 내 그룹원들이 전부 보이지 않았다.
NPC 또한 전멸 상태. 상점을 운영하는 자들과 성을 지키는 군인이 전부 보이지 않았다.
“…… 설마 성 밑에서?”
성의 개구멍을 이용해 빠르게 협곡 밑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오래 자동 사냥을 돌려놨는데도 불구하고 몬스터들이 바글거렸다.
X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피부가 보라색으로 변한 고블린부터 트롤과 오우거까지, 전부 내 앞길을 막았다.
박규환과 가웨인이 쥐 잡듯이 협곡을 뒤졌는데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헛웃음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이건 마치 유령 도시가 된 것이지 않은가?
“…… 대체 어딜 간 거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담배를 하나 꺼내어 무는데 조영기가 지면 파도를 타고 서핑하듯 밀려왔다.
쿠구구구구구-!
“김천재!”
나는 손을 저으며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어어-. 왜?”
조영기의 파도가 천천히 수그러들며 내 앞으로 도착했다.
“다른 사람들은 찾았나?”
“아니.”
“내가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 자를 찾았어. 너도 이 여자애 기억하지?”
양갈래 머리에 수수한 복장을 하고 있는 드루이드.
“…… 김리아?”
내 그룹으로 들어오라는 제안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남은 고구마 소녀였다.
“맞아 김리아.”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몰라. 피투성이의 상태로 남쪽 문 앞에 쓰러져 있더라고.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절한 상태로 나무 뒤에 숨겨져 있었어.”
“숨겨져 있어?”
나는 그녀의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어 숨을 확인한 후 목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빠른 숨에 비해 맥박이 천천히 뛰고 있었다.
맥박이 불규칙한 건 물론이요.
그녀의 안색이 초록색으로 변한 것으로 보아, Z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은데.
여기까지 도착한 플레이어가 백신이 없었나? 아니지, 그건 말이 안 되는데 말이야.
백신을 맞지 않았다면 감염체에 대항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준이다.
게다가 Z 바이러스의 백신은 상점에서 저렴하게 판매하기에 구하기도 쉬웠을 텐데….
“조영기, 백신 가지고 있어?”
“제트? 엑스?”
“제트. 엑스는 어차피 비말 전파가 아니라서 감염될 일도 없잖아.”
“뭐…. 감염체의 피를 뒤집어쓰면 감염될 수도 있지.”
“그럴 일이 없으니깐 하는 말이지. 시끄럽고 백신 있어, 없어?”
“…… 있다.”
“줘 봐. 지금 백신을 놓으면 치료가 가능할 거야.”
조영기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얼마 줄 건데?”
“뭐?”
“얼마 줄 거냐고. 이거 나도 비상용으로 하나만 사놓은 거야.”
“어차피 너는 백신 맞았을 거 아니야?”
“그렇지. 하지만 너도 비상용 백신은 어디에 쓰는지 알고 있을 거 아니야? 돌발 임무로 NPC 구출이 나오면 성공 시 못해도 오천 제니는 받는데-”
“아 알았어! 오 천 제니 줄 테니까 빨리 백신 내놔.”
“육천 제니. 어때?”
이 빌어먹을 새끼가 급한 상황에 나랑 말장난을 치려 한다.
스으윽-
박규환이 조영기의 목에 검날을 들이밀었다.
조영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뭐야 이거?”
“조영기, 시간이 없어. 빨리 백신 내놔.”
“나랑 등을 지겠다는 건가?”
“그 반대지. 내가 네게 묻고 싶은데, 나랑 등을 지겠다는 거야?”
“…… 그 여자는 네 그룹원도 아니잖아.”
조영기가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지켜보았다.
어릴 적 친구끼리 의견이 맞지 않았을 때처럼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내가 손짓하자 박규환이 검날을 치웠다.
“무의미한 싸움 하지 말자고. 백신은 여기서 나가면 몇 개든지 살 수 있잖아?”
“…… 알았다. 오천 제니에 백신을 주도록 하지. 대신 일곱 번째 라운드에는 우리 둘을 같이 데려가도록 해.”
“…… 콜. 여덟 번째 라운드까지 데려다줄게.”
조영기가 백신 주사기를 내게 넘겼다.
* * * * *
김리아가 정신을 차렸다.
“어…. 여기가….”
시야가 흐릿했는지 그녀가 눈살을 찡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건가? 갸우뚱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김리아,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나?”
“…… 누구시죠?”
“나 몰라? 김천재.”
김천재라는 말을 하자마자 그녀가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천재 씨!”
“이제야 정신이 드나 보군.”
“아니….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그녀가 반가운 표정으로 나를 껴안았다.
“왜, 왜 이래.”
“너무…. 늦었잖아요.”
“뭐가 늦어?”
“정우 씨가…. 정우 씨가….”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떼어내며 물었다.
“정우가 왜?”
“정우 씨가…. 끌려갔어요.”
“…… 뭐?”
“이 성 안에 있던 사람들 전부…. 끌려갔어요.”
너무 얼토당토않은 말이어서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 성 안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와 NPC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인가?
“누구한테 끌려갔는데?”
“그…. 한조….”
“한조? 그 일본 플레이어?”
“예….”
“한조가 어떻게 정우를 끌고 가? 그놈은 정우보다 약할 텐데.”
“…… 아니었어요. 한조 그 자식이 어떻게 그렇게 강해졌는지는 모르겠는데, 정우 씨와 동등하게 싸웠어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섯 번째 라운드에는 우리가 먼저 도달한데다가 내 자동 사냥 덕분에 레벨의 차이가 굉장히 클 텐데, 겨우 삼십, 사십 레벨 근처의 한조가 육십에 달하는 정우를 잡았다는 말인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우가 한조한테 졌다는 말이야?”
“아뇨. 그건 아닌데…. 다른 플레이어들이 다 같이 모여 정우 씨를 공격했어요.”
“다른 플레이어?”
“예. 그…. 천재 씨가 이 성의 주인이 되기 전에 저희를 배신했던 정하균. 기억나시나요?”
기억이 나지 않을 리가 있나.
그놈은 몬스터의 먹이로 던져 주어도 시원치 않을 자식이었다.
“그 새끼…. 성에서 싸울 때 죽은 줄만 알았는데. 살아 있었어?”
“네. 그 자식이…. 이상한 네크로맨서를 끌고 와서….”
“이상한 네크로맨서?”
“해골 갑옷에 사신 낫을 들고 있는 한국 플레이어였어요.”
머리를 크게 맞은 것처럼 띵해졌다.
해골 갑옷에 사신 낫을 들고 있는 자라면 앞서 내가 상대한 ‘이량훈’이 아닌가?
아니, 한국 플레이어가 왜 일본 플레이어인 한조랑 손을 잡은 건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조영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이, 그럼 다른 사람들은 전부 어디로 잡혀간 거지?”
“…… 경성. 그곳으로 전부 이동한다고 들었어요.”
“경성?”
“네. 이곳은 이벤트가 시작하기 전까지 비워두고 일본에 넘겨준다고….”
“일본한테 성을 넘겨줘?! 이거 완전 미친놈들 아니야!!”
조영기가 땅을 쳤다.
김리아가 쿨럭거리며 피 섞인 가래를 뱉어내더니 내게 말했다.
“정우 씨랑 다른 분들도 전부 잡혀갔어요.”
“경성으로?”
“예…. 이틀 뒤에 공개 처형을 진행한다고 하던데, 빨리 경성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이틀 뒤에 공개 처형? 아니 왜 굳이 거기서 공개 처형을 하는데?”
“한조와 그 네크로맨서가 한참 동안 천재 씨를 찾았었는데 보이지가 않아서…. 동료들을 미끼로 경성으로 유인한다고 했어요.”
“아니 X발. 다 잡아가 놓고 나를 어떻게 유인하려고 했대? 네가 여기 남아있지 않았더라면-.”
잠깐만.
김리아는 어떻게 해서 이 성 안에 남아있던 거지?
그것도 경성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남쪽 문 앞에 말이야.
나는 대화를 끊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생긴 깊은 상처들을 보아 진짜 전투에 참여했던 것은 맞고. 겨우 나한테 이 정보를 넘겨주려 목숨을 걸고 바이러스를 맞았을 확률은 없을 테니. 내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녀석들이 내 도착 시각을 알고 일부러 김리아를 이곳에 남겨둔 것.
‘…… 그래서 이틀이라는 시간을 내게 준 건가.’
빌어먹을 새끼들.
아무리 나라도 혼자의 힘으로는 랭커 둘을 상대할 수는 없을 텐데.
곤란한 상황이 벌어졌다.
김리아는 드루이드라서 플레이어 간의 전투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할 테고. 박규환과 가웨인 만으로는 그곳에 모인 수많은 강적을 전부 상대할 수 없다.
‘하아-.’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담배를 뻐끔뻐끔 피며 골똘히 생각했다.
나를 도울 만한 강한 플레이어가 어디 없을까?
터벅. 터벅. 터벅. 터벅.
고민에 빠진 내 옆으로 대머리 마법사 한 명이 붙었다.
“김천재, 나는 이만 여기서 떠나도록 하지. 이곳에서 볼 일은 없는 것 같아.”
“…… 잠깐만.”
“묻기 전에 미리 대답하지. 우리는 경성으로 가지 않는다. 앞서 말한 한조라는 녀석은 너무 위험한데다가, 거기 가면 너를 죽이려고 작정한 놈들이 진을 치고 기다릴 텐데. 괜한 싸움에 끼어들어서 죽고 싶지 않아.”
조영기가 망설임 없이 내게 등을 보였다.
김연희가 눈치를 보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나는 멀어지는 그를 향해 넌지시 말을 던졌다.
“진짜 안 갈 거지? 경성에 가면 네가 좋아하는 돈이 쏟아질 텐데 말이야.”
돈이 쏟아진다는 말에 조영기가 귀를 움찔거리며 걸음이 멈추었다.
“…… 돈이 쏟아진다고?”
“그래. 거기 모인 국제 플레이어를 전부 쓰러뜨리고 장비를 상점에 되팔면…. 제니가 얼마나 나올까? 십만? 이십만? 아니지, 족히 삼십만은 넘을걸.”
“……”
“김리아가 말한 네크로맨서. 내가 아는 놈인데, 그 자식 장비만 팔더라도 십만 제니는 나올 거야.”
“그럼 총 사십만?”
“사십만? 작전만 성공하면 그 이상의 제니가 전부 너한테 떨어질 거야.”
조영기가 어깨 위로 손을 들더니 손가락을 말아 동그라미 표시를 만들었다.
“…… 보수는?”
“보수?”
“그래. 결국 나는 네 친구를 구하는 작전에 참가하는 거잖아. 성공 시 보수가 따로 있나?”
나는 활짝 웃었다.
도와만 준다면 돈은 얼마든지 구해줄 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제니를 주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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