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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다섯 번째 라운드의 메인 이벤트가 끝났다.

요새 안에 남은 오크 전사들이 술렁였다.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리 그룹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이벤트가 끝난 상황에서 이제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던지 크게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성문 밖으로 나오자 대기 중인 드워프와 엘프들이 보였다.

실비아의 사망 때문에 충격으로 기절했던 엘프 여왕도 정신을 차렸다. 드니로에게 기대어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처량해 보였다.

드니로가 소리쳤다.

“끝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오르쿠스가 쓰러지는 것은 보았다.”

“그래.”

“확실하게 처리했는가?”

“카바타와 오르쿠스, 둘 다 깔끔하게 처리했어.”

마정우가 카바타의 목을 들고 나와 그에게 드니로에게 보여 주었다.

드니로의 얼굴에 미소가 환하게 떠올랐다. 그에 반해 실비아는 웃지 못했다. 이 싸움으로 얻은 것이라고는 상처밖에 없으니 말이다. 딸의 죽음과 함께 그토록 믿고 따르던 블란트의 배신까지. 게임 NPC여서 망정이지, 진짜 사람이었다면 그녀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전투의 승리했음에 모두가 함성을 질렀다. 요새 앞에 모인 전부가 너나 할 것 없이 행복한 표정이었다.

-드디어 오크와의 긴 전쟁이 끝나는구나….

-평화다! 평화야! 저 인간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어!

-신이시여. 계신다면 저분에게 축복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드니로가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수고했네. 그리고 정말 고맙네.”

나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뭘. 어차피 하려고 한 일이었는데.”

초췌한 얼굴의 샬로트가 천천히 걸어와 내게 말했다.

“수고하셨어요.”

“…… 괜찮아요?”

“딸이 죽었는데 괜찮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요.”

유소라가 실비아의 머리를,

마이클이 돈 비토의 머리를 챙겨서 요새 밖으로 나왔다.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는 실비아의 모습이 샬로트를 다시 한 번 울렸다.

그녀가 눈물을 떨어뜨리자 모두가 숙연해졌다.

전장에 참여했던 다른 드워프와 엘프 병사들도 슬퍼했다.

나는 그들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상황을 그리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NPC라고 생각하기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저 모두가 숙연해지는 이런 분위기를 싫어하는 것뿐이다.

유소라가 눈물을 흘리며 실비아의 머리를 샬로트에게 건네어 주었다.

“지,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샬로트가 실비아의 머리를 받았다.

“……”

그녀는 말없이 흐느끼기만 했다.

정우가 내게 담배를 건네어 주었다.

“여기.”

“고맙다. 딱 맞춰서 줬네.”

“네가 제일 싫어하는 순간이잖아. 징징 짜는 장면이 펼쳐지는 상황.”

나는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그렇지. 역시 너는 나를 잘 알고 있네.”

“근데 머리는 왜 가져온 거야? 설마 둘 다 리바이브로 살리려는 건 아니지? 만나게 해주려고.”

“…… 실비아는 시체가 있어서 리바이브가 가능하지만, 돈 비토는 뼈밖에 없어서 살려낼 수 없어.”

마정우가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쳤다.

캉!

황금 투구가 흔들렸다.

“아…. 맞네.”

“그나저나 너 방어구는 잘 만들어졌냐?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 고수의 모습인데.”

“황금 세트니깐 뭐-. 갑옷 빼고 전부 '희귀'등급으로 만들어졌어. 이 정도면 선방한 것 같은데.”

황금 세트는 초보 플레이어들이 절대 얻을 수 없는 장비 중 하나.

많은 양의 금이 들어가는데다가 드워프의 망치가 아니면 제련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섯 번째 라운드에서 얻은 황금 전사 세트인데, '희귀'등급만 하더라도 굉장한 거 아니냐….”

“그런가?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나저나…. 다음 라운드로는 언제 갈 거야?”

“치료 끝나면. 쇄골이 부러진 것 같은데 엘프 헬름에서 뼈 좀 붙이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마정우가 얄미운 표정으로 내 쇄골을 건드렸다.

“다쳤냐?”

“악! 이 미친놈아! 그렇게 세게 누르면 어떻게 해?”

“진짜네. 뭐…. 여기까지 왔으면 서두를 것도 없으니 천천히 가자.”

“후우-. 다음 라운드는 다시 유토피아여서 다행이네.”

“…… 어. 다른 플레이어한테는 이제 유토피아라고 부르기 힘들겠지만.”

* * * * *

오크 요새 안에 남은 오크들은 드워프의 왕, 드니로를 따라서 협곡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전부 죽일 생각으로 무기를 겨누었지만, 과거 드워프와 사이가 좋았던 오크의 사정을 들은 드니로가 마음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생긴 것만 봐서는 투박해 보이는데 마음이 왜 저렇게 여린지 모르겠다.

나였으면 전부 죽였을 텐데 말이야.

마정우와 유소라, 마이클은 삼 일 전에 이곳에서 떠났다.

내가 회복하는 동안 다른 장소로 먼저 이동한다고 했다.

드워프 협곡은 먼지바람 때문에 호흡기에 좋지 않은데다가 향기로운 엘프들과는 다르게 냄새나는 오크와는 함께 있고 싶지 않다나 뭐라나.

여튼 세계수 밖으로 나가봤자 다시 네 번째 라운드를 진행했던 ‘정복자의 무덤’을 지나가야 하니, 그곳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다.

동틀 녘, 엘프 헬름에서 빠져나온 나는 개구리가 나오는 폭포로 출발했다.

얼마 걷지 않아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 숲의 냄새가 점점 옅어지며 습한 기운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폭포 앞에 도착한 나는 통나무 위에 앉아 담뱃불을 붙였다.

치직. 치지직.

쓰읍. 푸후-

“…… 개구리는 잠도 안 자나.”

-개굴! 개굴!

담배를 깊게 마신 후 강하게 뿜자 개구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얀 연기가 내 눈 앞을 가렸다.

조영기가 슬그머니 나타나 옆에 앉았다.

“김천재. 다음 라운드로 언제 출발할 거지?”

“형이라고 불러.”

“…… 이제 와서?”

“부르라고.”

“…… 형, 다음 라운드로 언제 출발할 거지?”

나는 부러진 쇄골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조영기에게 대답했다.

“뼈도 다 나은 것 같은데. 오늘 밤 출발하면 딱 맞을 것 같아.”

“오늘 밤이라…. 그럼 지금 가서 빨리 생명의 가루를 봉투 안에 가득 채워 놔야겠네.”

“생명의 가루는 어차피 하루 지나면 못 쓰게 되는데, 뭐 하러 가득 채워 가?”

“상점에 팔면 돈이잖아. 전부 팔아먹어야지.”

“…… 돈이 그렇게 좋냐.”

조영기가 땅을 보며 낄낄댔다.

“당연하지. 돈보다 좋은 건 이 세상에 없어.”

“목숨은?”

“목숨, 중요하지. 내가 말하는 건 중요한 게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말한 거야.”

“…… 그래. 마음대로 해라.”

나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 폭포 앞으로 갔다.

개구리들이 폭포수를 쳐다보며 크게 울어댔다. 전에도 느꼈던 이 신비로운 기운과 전신을 감싸는 전율. 누구의 것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 보아도 굉장했다.

조영기가 내 등 뒤에서 소리쳤다.

“뭐 해? 아침부터 수영하게?”

“아니, 나는 물 싫어해.”

“근데 왜 호수 안으로 들어가? 아니지. 호수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작은가.”

“…… 너 이 안에 뭐가 있는 줄 알고 있냐?”

“호수 안에?”

“아니 폭포 너머에.”

“폭포 너머?”

언뜻 보면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고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곳의 물은 절대로 고여 있지 않았다.

저렇게나 많은 물이 떨어지는데 이렇게 작게 고여 있을 수 있다고?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이곳의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폭포에서 떨어진 물은 지하를 통해서 분명 계곡으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철벅. 철벅. 철벅.

나는 천천히 폭포 앞으로 걸어갔다. 고여 있는 물의 깊이가 점점 높아져 정강이까지 오던 수위는 금세 가슴까지 차올랐다. 멈추지 않고 전진했다.

조영기가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가자 목 위까지 물이 올라왔다.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벌써 얼굴까지 물이 잠겼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폭포를 향해 걸었다.

푸두두두두두-.

폭포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소리가 정수리에서 뒤통수로 넘어오는 순간 나는 땅을 박차고 수면 위로 올라갔다.

“푸아!”

검은 공간이 나왔다.

동굴? 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안이 깊어 보였다.

안에서 한(恨)이 느껴졌다.

누구의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를 따라온 가웨인이 물에서 솟구쳤다.

푸수수!

물을 뚫고 나온 그가 내게 말했다.

“주군, 도착했습니다.”

“잘했어. 이 안에 좀 비춰 볼래?”

“예.”

가웨인이 검날을 머리 위로 들더니 주문을 외웠다.

[인챈트 파이어]

그의 검날이 타올랐다.

불꽃이 동굴 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 역시.”

내 눈앞에 영혼 하나와 새하얗게 백색으로 변한 뼈 뭉치가 보였다.

동굴의 끝에 겨우 걸쳐져 있는 남성의 유해. 이곳이라면 물살에 떠밀려왔을 일은 없고.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누군가가 숨겨 놓은 자다.

나는 유골 앞까지 헤엄쳐갔다.

그리고 그 주변을 날아다니는 영혼에게 말을 걸었다.

“가자, 돈 비토. 실비아가 기다린다.”

* * * * *

엘프 헬름에서 떠나는 날 밤, 여왕과 따로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다시 보게 될 일은 없겠지만, 잘 지냈다는 말은 하고 가려고 왔어.”

“…… 그렇군요.”

“실비아가 나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지?”

그녀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애써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를 원망해. 그럼 좀 괜찮아질 거야.”

“아뇨. 천재 씨를 원망하지 않아요. 엘프 헬름에 평화를 가져다 주셨으니까요.”

“뭐…. 마음대로 생각해. 그럼 나는 간다?”

샬로트에게 인사를 하러 온 이유는 단 한 가지 때문이었다. 내가 그녀의 시선을 끄는 동안, 김연희가 몰래 움직여 실비아의 머리가 들어 있는 상자를 빼내었다. 재빨리 엘프 여왕의 집에서 나온 우리는 세계수로 향했다.

다다다다-!

김연희가 상자를 들고 뛰며 숨을 헐떡였다.

“기, 김천재! 이거 무겁다고!”

조영기가 머리를 낚아채더니 내게 소리쳤다.

“이건 대체 왜 들고 가자는 거야? 숨겨진 임무 같은 게 있는 거냐?”

나는 대답 없이 계속해서 별이 지는 언덕을 향해 달렸다. 평화의 망루를 넘어 세계수 앞에 도착한 나는 조영기에게 실비아의 머리를 건네어 받았다.

“후우-. 계속 뛰었더니 땀이 다 나네.”

“하아…. 하아…. 땀만 나냐? 죽겠네.”

“이제 둘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있어. 나도 곧 따라갈게.”

“왜? 혼자 숨겨진 임무 하려고? 돈 되는 거면 나도 끼워줘.”

“아니, 돈 되는 일 아니니깐 빨리 꺼져.”

조영기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왜 욕을 하고 그래?”

“그러니깐 욕 더 처먹기 전에 빨리 가라고.”

“하…. 도와줘도 지랄이네. 야, 김연희. 가자.”

조영기가 투덜거리며 세계수 앞에 있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김연희가 내게 혀를 내밀어 메롱을 날리더니 땅을 걷어찼다.

팍!

“다음에는 안 도와줘!”

“…… 마음대로 해.”

김연희도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상자를 열어 실비아의 머리를 땅에 내려놓았다.

“…… 리바이브.”

[리바이브]

몸이 없는 상태의 실비아가 눈을 떴다.

우선 머리를 이쁘게 정리한 후, 음소거 모드를 풀어주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실비아.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나?”

“…… 아저씨!”

그녀가 해맑게 웃었다.

머리만 남아 있는 엘프와 대화를 하다니.

어떻게 보면 섬뜩할 수도 있는 장면이다.

“그래. 지옥에서는 잘 있었냐?”

“지옥…? 저는 계속 엘프 헬름에 있었는데요.”

“엘프 헬름? 그럴 리가. 네 영혼을 본 적이 없는데.”

“에이! 저는 계속 이 머리 안에 들어있었어요. 상자 안에 갇혀서 답답했지만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

뭐 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이 맞겠지.

“나를 원망하니?”

“아뇨? 제가 아저씨를 왜요.”

“내가 돈 비토의 머리를 줘서 네가 죽었잖아.”

“…… 그건 그거고, 저건 저거고. 아저씨가 저를 죽인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고.”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너를 불러온 이유는 단 하나. 만나게 해줄 놈이 있어서야.”

“만나게 해줄 놈?”

“너 다시 혼으로 변하기 전에 만나고 싶은 자가 있니?”

실비아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 그래?”

내 주변을 날아다니는 두 개의 영혼.

나는 그중 하나를 잡아 내 머리에 집어넣었다.

[발동]

돈 비토의 정신이 내 몸을 지배하게 되었다.

눈꼬리가 올라가고, 입술이 미소를 띠었다.

갑자기 언덕 위로 유성우가 쏟아져 내렸다. 밤하늘이 밝아지며 드워프 협곡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투구를 벗은 돈 비토가 무릎을 꿇고 실비아에게 말했다.

“…… 실비아?”

“네? 말해요. 아저씨.”

“…… 미안해. 그날, 내가 너무 늦었지?”

“응? 언제요?”

실비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돈 비토가 손을 올려 왼쪽 눈썹을 긁었다.

눈썹을 긁자 실비아가 입술을 떨었다.

“…… 비토?”

돈 비토가 실비아의 머리를 안았다.

실비아가 눈동자를 돌려 내 얼굴을 보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조금 늦었네. 많이 기다렸잖아.”

“약속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 약속은 지켰지.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거니깐.”

박규환이 그날과 같은 꽃을 한 다발 들고 나타나, 돈 비토에게 넘겨주었다.

돈 비토는 그녀의 옆에 꽃을 놓아 주었고, 둘은 별이 쏟아지는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준 후, 실비아를 되살려낸 리바이브 주문을 취소시켰다.

그리곤 둘의 영혼을 세계수에 놓아주었다.

“다들 잘 살아라. 아니지, 죽은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닌가?”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돈 비토의 영혼이 내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는 사람이 아니라 드워프예요.”

“아, 그러세요….”

실비아가 그의 옆에 딱 붙어 같이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다음에 또 봐요!”

“이제 다시 볼 일은 없을 거야. 죽어서 만큼은 둘이 행복해라. 징그러운 개구리 같은 거 키우지 말고.”

“아, 뭐래요!”

나는 그대로 뒤돌아 게이트 안으로 향했다.

드디어 첫 번째 라운드부터 생겼던 의심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장소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유토피아의 중반부이자 유소라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이벤트가 있는 곳.

이 세계의 신 중 한 명인 미카엘이 잡혀 있는 '헬 게이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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