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스토리 영상이 끝남과 동시에 오크 요새 앞으로 돌아왔다.
이곳에 모인 플레이어 전원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했다.
다른 자들이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블란트의 행동이 그저 단순한 복수심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짧게 보이는 스토리 영상 사이 카바타와 또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도 적이기는 하지만.
나는 오크 요새 쪽으로 걸어가며 블란트에게 물었다.
“블란트, 오늘 실비아를 잡아간 것도 너였냐?”
“…… 그래. 어떻게 알았지?”
“마을로 돌아왔을 때 네 몸에서 실비아의 향기가 났었다.”
“오호라…. 그런데 왜 모른 척을 하셨을까?”
“확실하지 않았으니깐.”
블란트가 비아냥거리듯 입을 쭉 내밀고 말했다.
“확실하지 않았다라. 크하하! 네놈의 신중한 판단이 나를 도왔구나. 사실 네 입에서 돈 비토의 이름이 나왔을 때 들킨 줄 알고 깜짝 놀랐었어. 혹시나 해서 말이야.”
“그래서 세계수로 달려간 거였냐?”
“그래…. 이 긴 여정의 마침표를 네 덕분에 찍게 되었다. 여왕을 설득해줘서 고맙다.”
지금까지 해온 나의 모든 행동이 블란트의 손에서 놀아난 것처럼 되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짜인 스토리대로 흘러가는 것이지만 내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짜증이 차올랐다.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블란트에게 말했다.
“…… 고맙긴. 근데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뭐지? 정예병을 전부 네 아래 모았다면 굳이 이곳에 오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저들에게 확실한 절망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까지 신의 대리인처럼 행세하며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던-”
드니로가 소리쳤다.
“노예처럼 부리다니!”
듀발이 따지듯 대답했다.
“노예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일 년 내내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당신의 명령에 움직이는데 말이야.”
“그 모든 것은 너희들을 위한 일들이었다.”
“아, 그러셔? 그래서 돈 비토는 종일 띵까띵까 놀고 우리는 얼굴이 녹을 정도로 뜨거운 용광로 앞에서 제련을 시켰다?”
“그…. 그건.”
“변명하지 마라. 우리 아버지는 숨이 멎을 때까지 쇠를 두드리다 돌아가셨어. 이 빌어먹을 새끼야!”
듀발의 외침이 메아리치며 오크 요새에 퍼졌다. 블란트가 머리를 긁적이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오더니 내게 말했다.
“김천재, 너 또한 이곳에서 죽어줘야겠다.”
[‘대격전! 오크 요새 함락 작전’이 시작됩니다.]
[플레이어 전원 전투에 돌입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피우던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빤 후 땅에 던졌다.
팍.
후우-
“정우야, 이 앞으로는 나만 간다.”
“…… 알았다.”
마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전방에 선 드니로가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뛰쳐나가려 했다.
그의 뒤를 따라 드워프 전사와 엘프 기사들이 움직였다.
마정우가 그들 앞을 막아섰다.
“잠깐, 우리 리더가 일을 마칠 때까지 이 앞으로 아무도 못 가.”
드니로가 화를 억누르며 마정우에게 말했다.
“비켜라.”
“아니. 지나가려면 나를 쓰러뜨리고 가던가, 우리 리더의 용무가 끝나길 기다리도록 해.”
“…… 그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글쎄, 그건 두고 봐야겠지.”
“더 이상의 무고한 죽음을 만들지 마라.”
“죽음? 뭐…. 천재 녀석하고 가장 가까운 단어이긴 한데. 놈이 직접 경험할 일은 아니어서 말이야.”
마정우가 싱긋 웃으며 드니로의 어깨를 쳤다.
드니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조용히 내 수하에 있는 모든 소환 수를 불러 모았다.
숲에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박규환이 보라색 피부의 X 트롤 부대를 데리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 기세만으로 요새 안에 있는 오크들이 술렁였다. 또한 블란트와 듀발의 정예 부대가 바싹 긴장했다.
블란트가 기에 밀리지 않기 위해 소리쳤다.
“트롤은 겨우 수십이다. 겁먹지 마라!”
겨우 수십.
맞는 말이다.
박규환이 트롤을 데려와 내 뒤에 일렬로 섰다. 정렬을 맞추자 대호가 살기를 뿜으며 숲에서 나왔다.
나는 호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검집에서 엑스칼리버를 뽑아 들었다.
은빛의 날이 반짝였다.
내 주위에서 날아다니는 검성 가웨인의 혼령이 신난 듯 춤을 추었다.
나는 가웨인의 영혼을 손으로 잡아 대호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이제 네 차례다.”
스킬란에는 쓰여 있지 않은 또 하나의 이스터에그. 진짜 네크로맨서라고 불리는 자만이 알고 있는 비기.
망령을 내 소환수에게 빙의시키는 ‘강령술(降靈術)’.
‘뭐…. 서버 종료 직전에는 팬 사이트에 정보고 공유되긴 했지만. 그래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몇 없지.’
“깨어나라, 태양의 기사 가웨인.”
부웅-
팍!
영혼이 흡수되는 순간 대호의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사족 보행 동물 중 하나인 호랑이가 두 발로 일어섰다.
신체의 변형이 생겼다.
인류가 영장류에서 인간으로 변하기까지 진화와 퇴화를 반복해온 것처럼.
호랑이의 몸이 인간과 비슷하게 변형되었다. 마치 호랑이의 가죽을 뒤집어쓴 인간처럼 말이다.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날 정도이니, 보통 인간이라고 부르기는 힘든가?
[가웨인(검성)의 영혼이 대호(동물)에게 주입되었습니다.]
[신규 소환 영입 ‘태양의 기사 가웨인 (검성)’]
※ 신규 영입: 태양의 기사 가웨인(검성, 劍聖)-비스트 모드
레벨: 60
생명력: 5500/5500
마나: 100/100
체력: 55(+0) 공격: 99(+0)
방어: 86(+0) 속도: 99(+0)
▶인챈트 파이어(마나 소모: 15)
-자신의 무기에 화(火)속성 마력을 부여합니다.
-지속시간 동안 꺼지지 않는 불꽃이 무기에 타오릅니다. (지속시간: 60분)
▶태양 흡수 (마나 소모: 0)
-가웨인은 태양의 위치에 따라 추가적인 능력치를 부여받습니다.
.
.
.
.
.
.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냥 서 있을 뿐인데 가웨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오라가 주위의 기운을 바꾸었다.
검성의 패기와 야수의 살기를 합치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구나.
“와라.”
가웨인이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군.”
성대의 울림통이 엄청나다.
그저 한마디 했을 뿐인데 내 몸이 찌릿했다. 같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 가웨인.”
“예.”
“네 무기다.”
가웨인이 고개를 들어 엑스칼리버를 건네어 받았다. 기분이 좋았는지 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감사합니다.”
그가 검의 손잡이를 쥐자 검날이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태양의 기사 가웨인.
호랑이 기사로 거듭 태어났다.
* * * * *
우리의 모습을 확인한 오르쿠스가 어깨 위에 있는 카바타를 손에 올려 내 쪽으로 뻗었다.
놈이 지팡이를 꽉 쥐더니 나를 향해 소리쳤다.
“네가 김천재인가?”
“그래. 죽고 싶어서 온 건가?”
“아니, 네가 어떤 놈인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말이야.”
“위에서 봐도 됐을 텐데?”
카바타가 눈을 찡끗거렸다.
“내가 눈이 안 좋아서.”
“…… 그래서. 나를 보려는 이유는?”
“어제 우리 요새를 공격한 놈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크흐흐흐-. 오늘 아침에 먹은 아이가 네 이름을 부르짖더군.”
“먹어?”
놈이 고개를 들어 실비아의 머리를 보았다. 내게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겠다.
“…… 실비아가 내 이름을 불렀다고?”
“그래. 내 침실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갈 정도로 목청 터지라 소리치더군.”
“……”
“이러던데? 김 천재 님! 제발 살려주세요! 꺄아아악!”
카바타가 실비아의 비명을 흉내 내며 배를 잡고 웃었다. 나를 도발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눈을 감았다. 천천히 숨을 마신 후 길게 호흡을 내뱉었다.
흙냄새와 바람에 섞여 풍겨오는 피 냄새가 나를 진정시켰다.
죽음에 가까운 자들이 좋아하는 냄새. 전장의 바람이 마치 향기처럼 느껴졌다.
‘그래, 어차피 정해진 스토리 안에서 실비아는 죽을 운명이었어.’
내 잘못은 없다.
카바타가 흘리듯 말을 이었다.
“저년, 마치 네가 자신을 구해줄 것처럼 믿고 있었는데. 못 구해서 어쩌나?”
실비아는 그저 NPC다.
어차피 만남과 헤어짐이 정해져 있던 인연에다가 다섯 번째 라운드가 끝나면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존재다.
나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카바타에게 말했다.
“어쩌긴. 지나간 일을 뭐 어떻게 하나, 잊어야지.”
“…… 뭐?”
“잊으면 된다고. 어제 죽은 네 형제처럼.”
카바타의 표정이 바뀌었다.
“내 동생을 죽인 놈이 너였나.”
“어, 제발 살려달라고 빌더군. 기회를 준다고 하니깐 내 가랑이 사이로 지나간 후에 신발을 핥았었어.”
“거, 거짓말하지 마라. 내 동생은 그렇게 비굴한 짓을 하지 않는다.”
“더 한 것도 하던데? 네 침실에서 비명을 지르며 ‘살려줘, 카바타!’라고 소리치더군.”
모두 거짓이다.
그저 카바타의 분노를 끌어내기 위한.
“이…. 개자식이….”
역시 단순 무식한 오크답다.
족장이라고 해서 멘탈적인 부분이 강할 줄 알았는데, 단 한방에 무너졌다.
조금 전 자신이 내게 했던 말을 돌려주었을 뿐인데 말이다.
카바타의 분노를 감지한 대호와 박규환이 내 옆으로 붙었다.
카바타가 둘을 의식하는 듯 다시 오르쿠스에게 돌아갔다. 다시 봐도 엄청난 크기의 몬스터다.
아파트만한 덩치가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쿠워어어.
오르쿠스 어깨 위에 도착한 카바타가 크게 소리쳤다.
“우리에게 덤비는 자는 절망만이 남을 것이다.”
나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어차피 희망 따위는 없었는데, 절망만이 남게 된다니. 다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잖아?”
“…… 빌어먹을 인간 자식.”
카바타가 뒤로 물러나자 블란트와 듀발의 정예병이 오크 요새의 성문을 막았다.
우리와 함께 소환된 다른 플레이어들이 수군거렸다.
-아니 그냥 엘프 여왕하고 드워프 왕을 넘겨주고 다시 도전하는 게 낫지 않아?
-스토리가 전부 바뀌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랑 같이 다시 도전할 사람? 나는 이번 게임 기권!
-야 솔직히 이걸 어떻게 이기냐. 적은 만 명이 넘는데 우리는 고작 이 천 명 정도야.
-저 김천재라는 새끼는 왜 자꾸 앞에서 나대는 거야? 고속으로 뒤지고 싶은 건가?
나는 그들의 대화를 못 들은 척 고개를 흔들었다.
“가웨인, 박규환. 저기 앞에 적들이 보이나?”
내 질문을 받은 두 명의 소환 수가 고개를 들어 오크 요새를 바라보았다.
“보입니다.”
“보고 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적과 아군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 긴장감이 가슴을 뛰게 하는 이 순간이 제일 흥분되는 시간이다.
나는 천천히 적진의 군사들을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죽음을 각오한 얼굴.
나는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치직. 치지직.
쓰읍. 푸후-.
담뱃불을 붙이는 동안 서로의 진영이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않았다.
누가 먼저 공격할지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
카바타 또한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 뚫는 자와 막는 자. 창과 방패의 싸움인가.’
당연히 먼저 움직이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뚫는 자다. 막는 쪽에서는 급한 것이 없으니.
정적이 지속되자 플레이어 중 한 명이 마정우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삐쩍 마른, 번개 머리 남성.
“어이! 너희들 공략법이 없으면 그냥 게임을 포기하도록 해. 우리 전부 아무것도 못 하고 기다리고 있잖아!”
마정우가 그를 내려보며 속삭였다.
“지금 네 눈앞에 있는 저 남자. 멸망의 땅 후반부의 모든 최초 공략법을 만들어낸 플레이어다.”
“…… 뭐?”
“지금 네 눈앞에 있는 자가 곧 공략법이라고. 입 냄새나니깐 닥치고 꺼져!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틀니 끼고 딱딱거리며 살게 될 줄 알아.”
번개 머리 남성이 쭈뼛쭈뼛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저 정도 폭언을 들었으면 대들만도 한데,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인지한 것 같다.
담배를 다 태운 나는 필터를 손가락으로 튕겨 오크 진영 쪽으로 날렸다.
마지막 한 모금의 담배 연기가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모든 한숨이 연기가 되어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 실비아.’
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오크 요새를 바라보았다.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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