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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왔다. 대륙 전역에 어둠이 내려왔지만 쏟아지는 별들이 하늘을 밝게 비추었다.

비가 내리지도 않았는데 습한 흙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드워프와 엘프 병사들이 들고 있는 횃불에서 기름과 나무가 섞여 타는 냄새가 퍼졌다.

오크 요새로 향하는 동안 고요한 긴장감이 숲에 맴돌았다.

우리는 전술적인 움직임을 위해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다.

마정우가 마이클에게 물었다.

“오크 위치는 전부 파악했어?”

“예스, 이 근처에는 오크가 한 마리도 안 보여요우. 전부 요새 안에 대기 중.”

“오크들이 안 보인다고…?”

미리 잠복하고 있는 오크들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요새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없었다.

치고 빠지는 전술에 강력한 오크들이 숲에서의 전투를 포기한다고?

의외다.

우리가 오크 요새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크들이 전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성문은 열어놓고 그 안에 오크들이 대기하고 있다. 마치 대놓고 함정을 파놨다고 말하는 것처럼.

드워프와 엘프들이 요새 앞에 멈춰 섰다.

전사들이 전방으로 나오고 궁수와 마법사들이 후방으로 빠졌다.

드니로가 엘프 여왕에게 말했다.

“우리가 먼저 진입하도록 하지.”

샬로트가 손을 저었다.

“아뇨, 입구를 비워 둔 것으로 보아 함정임이 확실한데, 진입 없이 공격하도록 하지요.”

“…… 어떻게?”

샬로트가 기도를 하듯 두 손을 모았다.

숲에서 하얀 연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녀의 뒤로 거대한 기체가 모이는 것처럼 보이더니 샬로트와 똑같이 생긴 모습으로 바뀌었다.

마치 램프의 요정처럼 거대한 크기로 말이다.

기체로 변한 샬로트가 오크 요새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 오크 족의 거인 오르쿠스가 입구 쪽으로 걸어왔다.

쿠웅- 쿠웅-.

놈이 걸을 때마다 땅이 울렸다.

오크 병사들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다.

입구 앞에 도착한 오르쿠스가 샬로트에게 물었다.

“여기까지 온 이유는?”

“끝을 보러 왔습니다 ”

“끝을? 우리에게?”

“…… 예.”

오르쿠스가 박장대소를 했다. 무엇이 그리 웃긴 지 걸걸한 웃음소리를 계속해서 내뱉었다.

클클클클-.

“그래, 끝을 보도록 하지.”

오르쿠스가 주먹을 크게 휘둘러 샬로트의 얼굴을 때렸다. 기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뭉쳐졌다.

“그런 단순한 공격은 제게 안 통합니다.”

오르쿠스의 어깨 위에 서 있는 로브를 쓴 오크가 대답했다.

“…… 그렇지. 이런 공격은 네게 통하지 않겠지.”

“당신이 카바타군요. 저희 딸은 어디 있는지요?”

“네 딸?”

카바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가 웃자 샬로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실비아, 지금 어디 있습니까?”

“…… 딸을 구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병력을 데려온 것인가?”

샬로트가 단호한 표정을 보였다.

“예, 그녀가 잘못되었다면 전쟁도 불사할 생각입니다.”

“…… 어쩌지? 그녀는 잘 못 되었는데.”

“…… 예?”

카바타가 지팡이를 흔들었다. 신호를 받은 오크 병사 중 몇이 기다란 통나무를 일으켜 세웠다.

첫 번째 통나무의 끝에 돈 비토의 목이 걸려 있었다.

드니로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도끼를 꽉 쥐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샬로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두 번째 통나무가 전봇대처럼 세워졌을 때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 시, 실비아?”

두 눈을 감고 있는 실비아의 머리가 뾰족한 통나무 끝에 걸려 있었다.

충격이 컸는지 샬로트의 기체가 담배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이어 본체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카바타가 엘프 진영을 보며 폭소했다.

“푸하하하! 나약한 엘프 여왕, 전쟁터에서 겨우 딸내미가 죽은 것 가지고 정신을 잃다니.”

분노를 참지 못한 드니로가 도끼를 던졌다.

“용서하지 않겠다!”

백색의 오라로 감싸 있는 양날 도끼, 카바타를 향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부웅- 부웅- 부웅-

팍!

오르쿠스가 손을 뻗어 가볍게 막아냈다. 머리 위에 있는 생명력 게이지를 보니 눈곱만큼 달아 있었다.

카바타가 코웃음을 쳤다.

“겨우 이 정도인가?”

드니로가 샬로트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직접 병력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듀발! 블란트! 전군 진격하도록 한다!”

함정으로 보이는데 그냥 쳐들어 간다고?

‘흐음…… ’

듀발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예병을 이끌고 오크 요새 쪽으로 움직였다.

“오늘 우리는, 협곡의 대전사. 드워프의 영광을 다시 찾는다!”

블란트 또한 그의 명령에 정예병을 이끌고 출발했다.

“착검! 전원 나를 따라 이동하도록 한다!”

천여 명에 가까운 병력이 동시에 움직였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쇠 갑주 흔들리는 소리가 매섭게 들려왔다.

엘프 정예병이 타고 있는 늑대들이 크게 울었다.

아오오오-!

개개인이 일반 병사보다 배 이상 강하다는 정예병들이 오크 요새 앞에 도착했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

최전방에서 걷던 듀발과 블란트, 요새 앞에 도착하는 순간 크게 소리쳤다.

“전원 뒤로- 돌아!”

철컹-. 철컹-. 쿵!

응?

갑자기 엘프와 드워프 정예 병사들이 요새를 등지고 섰다.

어떻게 된 일인가.

오크 요새 안에 있는 오크 병사들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마치 코메디 프로그램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푸하하하! 저 녀석들 표정 좀 봐!

-어떻게 된 일인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으이구, 저렇게 눈치가 없으니 배신당한 줄도 모르고 있지.

배신?

엘프 헬름, 기사 단장이자 샬로트의 부관인 블란트의 표정이 바뀌었다.

아주 비열하게.

“크하하하! 드디어 이날이 왔구나.”

듀발이 따라서 웃었다.

“아이고! 우리 드니로 폐하께서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시네.”

드니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다른 병사들도 당황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블란트가 앞으로 한 걸음 나오더니 드니로를 향해 소리쳤다.

“드니로,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 설마 배신인가.”

“배신이라…. 쿠데타라고 불러라. 맞지, 듀발?”

듀발이 투구를 벗어 던지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드니로를 보았다.

“맞지, 병사들을 일개미처럼 생각하는 폭군에 대한 쿠데타.”

“…… 듀발, 네놈이 감히….”

“감히? 감히라니, 말조심 하도록 해. 지금 나를 따르는 정예병들이 몇인 줄 알고 있는 건가?”

드워프와 엘프의 정예병 전부가 오크와 손을 잡게 되다니.

나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입에 담배를 물었다.

마정우가 내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쓰읍. 푸후-.

“정우야, 일이 좀 꼬였는데?”

“조금 꼬인 게 아닌 것 같은데. 저놈들을 전부 상대해야 하냐?”

“…… 어.”

배신자가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각 진영의 부관이라 불리는 놈들이 전부 악마의 꼬임에 넘어갔을 줄은 몰랐다.

내가 아는 배신자는 그저 엘프 헬름의 ‘이름 모를 병사’였으니깐.

‘틀이 박살 난 스토리가 이곳저곳으로 흘러가는구나.’

드니로가 분노하자 갑자기 시간이 멈추었다.

[시스템 메시지]

[‘블란트’의 기억 속에 있는 파편을 발동시켜 스토리 영상을 재현합니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 이거 보기 싫어!”

마정우가 같이 짜증을 냈다.

“아 저 새끼 기억을 왜 보라는 거야. 그냥 진행하라고.”

여기저기서 다른 플레이어의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아 이 X발! 왜 저 새끼 스토리 영상을 트는 건데!

-그냥 진행해라 미친 운영자야.

-아 X 같네…. 그냥 싸우자고!

우리의 의견은 당연히 반영되지 않았다. 몸이 단단하게 굳더니 새하얀 안개 커튼이 눈앞에 쳐졌다.

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화면이 넘어가기를 기다렸다.

‘왜 하필 저 빌어먹을 배신자의 기억을 보라는 거야?’

안개 커튼이 양옆으로 펼쳐졌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엘프 헬름의 과거가 보였다.

어린 시절의 블란트인가? 똑같이 생긴 아이가 아버지로 보이는 자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일 끝나고 검술 알려주실 거죠?”

“그래. 공주님 경호가 끝나면 바로 올 테니 그때까지 어머니를 돕고 있도록 해라.”

“네!”

꼬마 블란트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의 아버지는 기사단장이었는지 어깨에 견장을 착용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어 허리춤에 검을 차고 집 밖으로 나갔다.

두 명의 병사들이 목례를 하며 그를 맞이했다.

“단장님, 공주님께서 또 숲에….”

“뭐? 혼자 가셨나?”

“예. 아마도 그 드워프 왕자를 만나러 간 것 같습니다.”

“숲은 위험하다고 그렇게나 말씀을 드렸는데…. 여왕님께 보고는 했고?”

“아직 안 했습니다. 단장님께 먼저 보고드려야 할 것 같아서….”

블란트의 아버지가 입술을 굳게 다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는 생략한다. 가자, 공주님을 찾으러.”

이후에 시스템이 내게 보여주는 장면은 처참했다. 공주를 찾으러 세계수로 출발한 블란트의 아버지는 오크들과 마주했고.

“공주님 도망가십시오!”

“어, 어떻게-”

“뒤돌아보지 말고 헬름까지 달리세요! 빨리!”

그의 부대는 전멸했다.

오직 공주만이 그 자리에서 살아남았다. 오크 한 마리가 쓰러진 블란트의 아버지를 도끼로 내려찍었다.

콰직!

“제길, 공주는 놓쳤나?”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돈 비토의 머리. 앞서 본 적이 있는 익숙한 얼굴의 오크였다.

카바타.

‘…… 그렇게 된 건가.’

엘프 헬름으로 도망쳐온 공주가 여왕에게 오크의 존재를 알렸다.

이어 평화의 망루에 불이 붙었고, 드워프 전사와 엘프 기사가 모여 세계수 근처의 오크들을 사냥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날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블란트의 가슴에는 악한 마음이 새겨져 버렸기 때문이다.

안개 커튼이 쳐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장면이 나왔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2년 후, 엘프 헬름>

시스템 메시지가 표시하는 시간은 겨우 ‘2년’인데.

어린아이로 보이던 블란트는 벌써 성인의 모습이 되어 엘프 헬름을 거닐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지?’

기사단 배지를 달고 있는 젊은 블란트가 세계수 앞에서 풀피리를 불고 있는 공주의 앞으로 다가갔다.

“공주님, 한참을 찾았습니다.”

“어? 블란트!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왔어?”

“별이 쏟아지는 밤에는 항상 이곳에 오시니까요.”

“아….”

“밤이 깊었습니다. 이 근방에 망루가 생겼더라도 숲이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 돌아가도록 하시지요.”

“알았어….”

공주가 일어서자 그가 망토를 걸쳐 주었다. 블란트를 따라온 기사들의 호위 아래 안전하게 엘프 헬름으로 이동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엘프 헬름의 모두가 블란트를 영웅적인 존재로 보았다.

앞선 그의 아버지의 행동이 가문의 영광을 높이 세워주었기 때문이다.

공주를 안전하게 돌려보낸 블란트가 다시 어두운 숲으로 나왔다.

“너희들은 돌아가 있어라. 나는 산책을 좀 하다가 가도록 하지.”

-예.

블란트 혼자 숲속을 거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폭포가 나왔다.

그는 호수처럼 고여 있는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왔나.”

“…… 늦었군.”

“미안, 공주가 또 사라져서.”

나무 뒤에서 로브를 쓴 오크 한 마리가 나왔다. 하얀 눈썹이 굉장히 긴 늙은 오크.

“내가 준 영약은 들던가?”

“…… 그래. 덕분에 서른 살 정도의 몸이 된 것 같아.”

“좋아, 그럼 다음 계획을 진행하도록 하지.”

블란트가 오크의 앞으로 다가갔다.

“카바타, 나는 네가 왜 이렇게까지 나를 도와주는지 모르겠군.”

“…… 실수로 너희 아버지를 죽였으니깐. 속죄라고 생각해라.”

“어차피 너희는 우리와 적이지 않나?”

카바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우리의 적은 엘프 여왕과 드워프의 왕이다. 그저 한낱 병사들인 너희가 아니라고.”

“…… 왜 우리 여왕을 싫어하는 거지?”

“당연한 것 아닌가. 우리는 그저 세계수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뿐인데. 그 길을 막으니 그런 것 아닌가.”

블란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왜 들어가려는데?”

“…… 우리는 인간 세계로 이동하려 한다. 이곳에서는 내가 만든 힘을 사용할 수 없으니깐.”

“네가 만든 힘?”

카바타가 의미심장한 미소로 블란트를 쳐다보았다.

“그래. 아- 주 강력하지만, 이곳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힘이지.”

“…… 뭐. 이곳에서 사용할 수 없다니 나와 상관은 없네.”

“그래! 그러니깐 우리를 세계수 안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줘. 나는 공주 때문에 죽은 너희 아버지의 한을 풀 수 있도록 도와주마.”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블란트가 등을 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유가 공주 때문이라는 건가?”

“당연하지. 그날 공주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지만 않았어도. 너희 아버지는 살아 있었어.”

“죽인 건 너희 오크들인데?”

“먼저 공격한 건 엘프 쪽이었지. 정당방위였다.”

“……”

블란트의 고개가 떨궈졌다.

카바타가 사악한 미소로 그의 등 뒤로 다가가 어깨를 주물렀다.

“드워프 진형의 부관인 듀발도 우리와 함께하기로 했어. 약속하마, 모든 일이 끝나면 이 엘프 헬름은 너에게 주기로.”

“……”

“그때가 되면 무의미하게 죽은 네 아비의 한을 풀 수 있을 거야. 공주와 여왕이 사라질 테니까.”

[스토리 영상이 종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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