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엘프 헬름은 난리가 났다.
오크와의 싸움에 전력을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기사단 대부분이 숲에 정찰을 나갔다.
플레이어들이 이곳을 지켜주리라 생각하는 건가? 본진이 너무나 무방비한 상태다.
스토리가 깨진 유리컵 같다.
깨져서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 되는 상황이다.
물론 나 같은 이 게임의 고수의 경우에는 처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머리가 좀 복잡해지겠지만.’
새로 판을 짜거나, 컵의 회생을 포기하고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결국, 이번 이벤트를 포기하고 같은 스토리를 반복해서 진행하던가.
이대로 가는 대신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 누군가의 희생이 따르겠군.’
사실 스토리의 흐름을 조금 정도는 바꿀 생각이 있었다.
조영기가 사랑하는 엘프 헬름을 살리면서 마지막 메인 이벤트가 시작할 때까지 대기 중인 것으로.
‘…… 뭐.’
결국 엘프 헬름이 무너지지 않았으니 성공이라고 해야 하나?
두두두두-.
세계수로 정찰을 나갔던 블란트가 황급히 엘프 헬름으로 복귀했다.
샬로트가 그들을 마중 나왔다.
“실비아는 찾았나요?”
“…… 죄송합니다.”
“하아-”
아주 약간이지만 블란트의 몸에서 실비아의 향기가 느껴졌다.
거짓말을 하는 건가?
블란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실비아 님의 흔적은 찾았습니다. 이 풀피리, 세계수 밑에 떨어져 있더군요.”
“……!”
샬로트가 풀피리를 건네어 받았다.
“실비아는 없었고요?”
“…… 예. 현재 늑대 부대의 우두머리인 치랑(馳狼)이 세계수에서 시작되는 실비아 님의 냄새를 추적 중입니다.”
초조해 보이는 샬로트에 비해 블란트의 얼굴은 미동이 없었다.
처음 엘프 헬름에서 뛰어나갈 때는 허겁지겁 움직이더니, 금세 자기 페이스를 찾아왔다는 건가.
“블란트, 드워프 협곡에 도움을 요청해주실 수 있나요?”
“가능은 하지만 부탁을 하게 되면 그들의 요구 사항을 어쩔 수 없이 이행해야 할 겁니다.”
“요구 사항이라면 오크 요새 공격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블란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 그 조건이라면 응하도록 하지요. 어차피 결정했으니깐.”
“…… 알겠습니다. 드워프 쪽에서도 저희의 상황과 행동을 알고 있으니 여왕님의 답변을 반갑게 맞이할 겁니다.”
샬로트는 블란트의 어깨를 지팡이로 툭툭 치며 말했다.
“…… 최대한 실례가 되지 않도록 잘 말해주세요. 실비아에 관한 이야기는 신속히 진행될 수 있도록 말씀해주시고요.”
“옙. 그럼 저는 바로 드워프 협곡으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심히, 조심히 다녀오세요.”
블란트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발등을 보았다.
“제가 없는 동안은 제 2 기사단의 블론소가 엘프 헬름을 방어할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그를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여차하면 제가 직접 움직이면 됩니다.”
블란트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그녀의 눈동자를 읽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인사를 마친 그가 기사단을 이끌고 엘프 헬름 밖으로 나갔다.
역시 상황 판단이 빠르고 감정에 끌려다니지 않는다는 엘프족의 전사, ‘호수의 기사’ 블란트 다웠다.
삐빅. 삐빅. 삐빅. 삐빅.
이번에 새로 얻은 내 레이더가 발동했다.
고대 유물?
빨간색 점 하나가 내 위치에서 멀어지고 있다. 움직이는 속도로 봐서는 블란트의 기사단인 것 같은데.
저 중 누군가가 고대 유물급 아이템을 들고 있는 건가.
‘…… 협곡에서 돌아오면 확인하도록 해야지.’
* * * * *
“아오….”
숲을 넘어 언덕 위로 올라오는 동안 관절들이 전부 삐걱거리는 것 같다.
엘프 헬름에서 좀 더 쉬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내 몸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실비아….’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왔다. 숲을 보니 엘프들이 늑대와 함께 이곳저곳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화르르르륵!
평화의 망루에 불이 붙었다.
엘프 쪽과 드워프 쪽.
둘 다 붙었다.
서로 간의 만남을 추진하는 신호, 이제 모든 병력이 세계수 앞에 모여 오크 요새로 출발할 것이다.
‘실비아를 찾지 못한 채 이벤트가 진행되는 건가.’
메인 이벤트의 핵심이라 불리는 실비아와 돈 비토가 없이 진행되다니.
어떻게 되려는 걸까.
나는 세계수를 한 바퀴 돌며 실비아의 흔적을 찾았다.
혹시나 블란트가 놓치고 간 것이 있을까 해서였다.
“응?”
실비아의 옷이 조금 찢겨 있었다. 세계수의 뿌리에 걸려 말이다. 나는 그곳으로 달려가 주위를 살폈다.
“……”
저항의 흔적.
누군가와 실랑이를 한 것인가. 대체 누구와? 설마 또 풀피리를 부르러 이곳에 혼자 왔다가 오크에게 잡혔나?
나는 자세를 낮추어 땅을 유심히 보았다.
뿌리 주위의 단단한 땅이 파일 정도로 격렬한 다툼이 있었나 보다.
‘그 가녀린 몸으로.’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주위 나무뿌리에 핏방울이 묻어 있다.
“이건….”
땅에 익숙한 모양의 발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블란트와 그의 부하들이 다녀와서 생긴 자국인가? 라고 잠깐 생각했는데,
유심히 보니 아니다.
이건 엘프의 발자국이 아니라 오크의 것이다. 지면을 밟는 발바닥의 문양과 크기부터 벌써 달랐다.
나는 발자국을 따라갔다.
방향을 보니 오크 요새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 그런 건가.”
실비아가 오크 요새로 끌려갔다. 늑대가 그녀를 추격 중이라면 금세 밝혀질 사실. 블란트 또한 곧 알게 될 것이다.
-쿠워어어.
세계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오크 한 마리가 보였다. 놈이 개처럼 킁킁거리며 숲을 수색하는 것 같았다.
나는 기척을 줄이고 다가가 오크의 명치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팍!
“커허억.”
놈의 갑주가 찌그러졌다. 이어 놈이 픽 하고 쓰러졌다.
오크가 방심한 틈을 타 도끼를 빼앗은 후 목에 가져다 대었다.
“쉿. 움직이는 순간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
양손 도끼라 꽤나 무거웠지만, 내가 들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인간?”
“내가 지금 심기가 매우 안 좋아. 이제부터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대답뿐. 쓸데없는 말을 하면 바로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
긴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실비아의 행방만을 알고 싶었을 뿐.
“크르르….”
“질문 시작한다. 실비아 공주는 어디에 있지?”
눈알을 굴릴 뿐 대답이 없다. 목에 날붙이를 가져다 대자 오크 녀석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시, 실비아가 누군지를 알아야 대답하지!”
“엘프족 공주.”
“엘프족 공주? 그걸 왜 우리에게 물어봐.”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알고 있는 오크라면 조그마한 일에도 성공의 기쁨을 느끼는 단세포 생명체.
엘프 납치에 성공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말할 것인데 모르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 모르는 척하지 말고.”
“모르는 척이라니. 너야말로 왜 엘프족 공주를 오크에게 물어보는 거지? 그건 엘프들에게 가서 물어봐!”
“…… 오크들이 공주를 데려갔으니깐, 네게 묻는 거다.”
오크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 공주를 우리가 데려갔다고?”
이건 진짜 모른다는 표정이다.
“내가 질문은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부웅-
콰직!
도끼가 오크 놈의 오른쪽 팔을 잘라냈다. 놈이 비명을 지르며 뒹굴었다. 나는 놈의 복부를 발로 지그시 눌러 밟으며 말했다.
“미…. 미친 새끼.”
“다음 질문, 카바타는 형제가 있는가?”
“뭐?”
“너희 족장인 카바타. 형제가 있냐고 물어봤다.”
내가 죽인 놈이 카바타가 아니라면, 분명 똑같이 생긴 존재가 더 있을 것이다.
오크 놈이 무언가를 말하려 입술을 떼었다 붙였다 몇 번 반복하더니 내게 말했다.
“죽여라.”
“…… 뭐?”
“나를 죽이라고. 이런 수치를 겪을 바에는 죽는 게 낫다.”
“…… 내가 대답만 하라고 했을 텐데.”
부웅-
콰직!
왼쪽 팔이 날아갔다. 이번에는 오크 놈이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숨만 빠르게 헐떡거릴 뿐.
나는 오크의 갈비뼈를 걷어찬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어차피 죽는다. 어떻게 죽는지가 다를 뿐.”
“허억…. 허…. 억….”
“다시 한 번 물어보마. 카바타는 형제가 있는가?”
“……”
“내 말이 우습나? 대답이 없네.”
“죽…. 여라.”
어렵지 않은 질문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건가.
굉장한 충성심이다.
앞서 폭포에서 만난 오크들과는 전혀 다르다.
다른 오크들도 그를 향한 충성심이 이렇게 높으면 안 될 텐데 말이야.
놈을 향한 고문은 계속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카바타 놈의 약점을 알아내야 이번 전투를 쉽게 풀어나갈 수 있을 텐데.
부웅-
콰직!
놈이 입을 열지 않는다.
“후우-.”
놈의 자백을 받아내는 사이 벌써 드워프와 엘프들이 세계수 위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드워프의 왕, 드니로와 엘프의 여왕 샬로트. 두 진영 전부 엄청난 기세를 내뿜으며 평화의 망루까지 올라왔다.
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하얀 연기가 내 눈앞을 스쳐 날아갔다. 결국 오크 놈은 살아있는 동안 끝까지 실토하지 않았다.
“…… 리바이브.”
생전에 입을 열지 않는다면.
생후에 입을 열도록 해주지.
* * * * *
엘프 헬름과 드워프 협곡의 중앙에 있는 언덕, 그곳에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별이 쏟아지는 언덕’의 메인 이벤트가 진행됩니다.]
[참가하시겠습니까?]
[YES/NO]
당연히 참가한다.
“YES.”
[선택을 마친 엘프 헬름과 드워프 협곡에 있는 참가 플레이어가 소환됩니다.]
팟!
눈이 번쩍이더니 세계수 앞으로 메인 이벤트에 참가하는 플레이어가 모이게 되었다.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그들을 불러보려 했지만 입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전원 전투 준비는 완료되었고.’
우리 외에 플레이어들을 둘러보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부적응자는 없을 테고, 겉모습만 봐서는 전부 이제 막 초보 티를 벗어낸 플레이어였다.
그래도 네 번째 라운드를 마치고 왔으니 보통 놈들은 아니겠지.
[메인 이벤트 시작]
[‘대격전! 오크 요새를 함락시켜라.’ 작전에 투입되신 모든 플레이어에게 전합니다.]
[보상: 10,000 제니]
[*경고: 이 이벤트는 실패 시 다시 진행할 수 있으니 무리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플레이어를 이 정도 키워놨으면 운영진 쪽에서도 잃기 싫다는 건가.
쿵! 쿵! 쿵! 쿵!
갑주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우렁찬 함성이 들렸다.
“부대- 차렷!!”
세계수를 중심에 두고 양옆으로 모인 드워프와 엘프 대군.
오크 요새 공략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나눠왔던 이야기라 딱히 작전 회의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부관인 블란트와 듀발이 잠깐의 대화를 나누었을 뿐.
드니로가 여왕에게 말했다.
“오래 걸렸구려.”
“…… 백년전쟁이 저희의 마지막 싸움이 될 줄 알았는데, 또다시 이렇게 되는군요.”
“인간들이 말하길 역사는 되풀이된다더군. 이 또한 신께서 정한 인과율의 흐름에 따른 것이겠지.”
샬로트가 인자한 얼굴을 보였다.
“인과율의 흐름이라. 어찌 되었건 이제야 당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크에게서 실비아를 되찾아 올 수 있을 거니 걱정하지 마시게.”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움직여야 할 때.”
드니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지. 듀발! 준비되었나!”
듀발이 드워프의 마크가 새겨져 있는 커다란 깃발을 흔들었다.
“예!”
샬로트가 블란트에게 물었다.
“저희도 준비되었나요?”
블란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 또한 깃발을 크게 흔들어 준비 신호를 보냈다.
드워프 전사들이 밀집 형태로 앞장을 섰다. 그 뒤로 엘프 궁수들이 넓게 펼쳐진 대형을 이루었다.
드니로가 커다란 멧돼지에 타더니 그들 진형의 앞으로 달려 나갔다.
“모두 들리나!”
-예!
“과거 드워프와 엘프, 우리는 악마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했었다. 오늘 상대하는 오크는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맞는가, 아닌가?”
-맞습니다!
드니로가 하늘을 가르듯 도끼를 휘둘렀다.
부웅-
“밤이 무서운 자는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도록 해라. 붙잡지 않겠다.”
일말의 술렁임도 없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정적만이 흐를 뿐.
드니로가 고개를 좌측에서 우측으로 크게 둘러보며 병력을 보더니, 말을 이었다.
“오늘! 우리는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찾아온다. 나와 함께하는 자들이여, 별이 되려 하지 마라.”
-예!
“여기 있는 모든 드워프와 엘프는. 내일 뜨는 태양을 맞이하며 아침을 먹도록 한다. 알겠나!”
-예!
드니로가 작게 웃음을 띠더니 도끼로 오크 요새 방향을 가리켰다.
“가즈아!!!!”
-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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