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카바타를 내 밑으로 데려오려 했지만 다가갈 수 없는 결계가 막았다.
‘…… 녀석의 비중이 남아있는 건가.’
천막 수색을 마친 나는 스켈레톤 병사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난장판이 된 오크 요새가 천천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차카니가 입구를 확실히 막아 놓은 덕분에 오르쿠스와 정예 병사들이 전부 요새의 앞쪽으로 몰렸다.
[오르쿠스]
이번 라운드의 보스 몬스터이기는 하지만 다혈질에 눈앞에 보이는 적만을 생각하는 단순 무식한 캐릭터.
능력치로만 따지자면 열 번째 라운드에 나와도 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전투 센스가 없고 단순한 움직임만을 보여 다섯 번째 라운드의 보스로 채택된 놈이다.
나는 스켈레톤 병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흩어져라.”
내 스켈레톤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놈들이 주변의 시선을 끌어주는 사이 나는 안전하게 밖까지 나갈 수 있었다.
통나무로 만들어진 벽을 부수고 나가자, 차카니와 포로들이 보였다.
왜 아직 도망가지 않은 거지?
“뭐해 조영기!”
“어? 벌써 일을 처리했나.”
“장난치냐. 한참을 걸렸는데 아직도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
“…… 응?”
조영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안쪽으로 들어간 지 십오 분 정도밖에 안 됐는데?”
그가 손목시계를 보여주었다.
“내가 몇 시에 출발했는데?”
“십오 분. 지금 삼십 분이니깐 십오 분밖에 안 지났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바로 나왔다.
내가 카바타 천막에 도전하는 동안 시간의 흐름이 멈춰 있었나 보다.
“…… 카바타는 처리했다. 빨리 엘프 헬름으로 복귀하도록 하자.”
“카바타를 처리했다고?”
“그래.”
“…… 그럼 저건 뭔데?”
나를 못 믿겠다는 표정.
나는 조영기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거인족 오크, 오르쿠스의 어깨 위로 로브를 쓰고 있는 오크 한 명이 서 있었다.
“…… 저게 뭐야?”
오르쿠스의 어깨 위에 카바타가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처리한 놈보다 조금 더 젊어 보이는 오크였다.
돈 비토의 기억의 파편이 보여 준 그 날과 똑같이 생긴 오크.
‘내가 처리한 건 카바타가 아니었던 건가.’
하긴 카바타의 천막이라고만 했지, 놈이 자신을 카바타라고 하지는 않았다.
내 질문에 대답하지도 않았고.
나 혼자 착각한 것인가.
조영기가 포로들을 한 곳에 응집시키더니 숲을 향해 달렸다.
“됐고! 나머지는 돌아가서 이야기하자고.”
“…… 그래.”
나는 아쉬운 표정으로 놈들을 보았다. 하긴, 이렇게 쉽게 메인 스토리를 끝낼 수 있을 리는 없겠지.
‘……’
근데.
내가 아는 멸망의 땅에는 저런 캐릭터가 없었다. 아까 내가 처리한 카바타와 비슷하게 생긴 오크 말이다.
* * * * *
엘프 헬름으로 돌아온 우리는 포로를 기사단에게 인도했다.
블란트가 감사 인사와 함께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켰다.
나는 곧장 엘프 여왕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내 말을 믿기 싫은 것인지 악마의 존재를 믿지 않는 건지,
루시퍼의 존재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 놈이 이 모든 일을 꾸민 범인이에요. 저희 인간 쪽에서도 놈 때문에 큰일이 벌어졌습니다.”
“천재 씨의 말대로라면 그 악마라는 자가 이곳에도 똑같은 바이러스를 퍼트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곳의 종족들은 면역력을 가지고 있어 퍼트려 봤자 소용이 없어요.”
“…… 예?”
“세계수가 계속해서 뿜어내는 ‘생명의 가루’. 악마가 만든 바이러스의 면역력을 키워주는 힘을 가졌습니다.”
거짓말이 아니다.
루시퍼가 이 대륙을 노리지 못하는 제일 큰 이유가 저 세계수 때문이다.
바이러스를 사용하여 공격하지 못하니, 오크를 이용해서 세계수를 처리하려는 계획.
어차피 플레이어에 의해 저지되지만 여기서 만큼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스토리가 틀어진 정도가 아니라, 완전 새로운 길을 걷고 있으니.
엘프 여왕이 내게 물었다.
“그럼…. 오크와 전쟁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오늘 아침에 말씀드렸듯 선택은 여왕님이 하시는 겁니다. 기한은 오늘 저녁까지. 결정은 되도록 빨리해주시기 바랍니다.”
“…… 알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여왕이 매끄럽게 빠진 검집 하나를 내게 들고 왔다.
“여기요.”
“이건…?”
“드워프 협곡에 있는 천재 씨 친구가 전해달라고 했다더군요.”
“아!”
완성되었구나.
[엑스칼리버(모조)]
-공격력 +66
-사용자의 공격 속도 증가, 치명타 확률 증가, 방어력 무시가 적용됩니다.
*‘무기 깨기’ 스킬이 패시브로 적용됩니다.
검성 가웨인이 아더왕에게 건네어 받았다는 전설의 검. 비록 모조품이지만 능력치만큼은 대단했다.
나는 손뼉을 쳤다.
짝!
“감사합니다. 꼭 필요한 물건이었는데 때마침 왔네요.”
“보통 검이 아닌 것 같은데, 천재 씨는 검술도 쓰시나 봐요?”
“…… 아뇨. 저는 사용할 줄 모릅니다.”
“그럼 누가…?”
“있습니다. 이 검의 주인이.”
나는 고개를 돌려 갑주 근처에 날아다니는 영혼을 보았다. 귀신처럼 머리만 둥실둥실 떠다니는 노란 머리의 사나이.
젊디젊은 그가 검을 보며 방긋 웃었다.
[‘가웨인의 영혼’이 검을 보며 즐거워합니다.]
‘이제 네 차례다.’
할 말을 모두 마친 나는 여왕의 집에서 나왔다.
이어 조영기와 김연희가 그녀를 찾아 들어갔다.
내가 뼈를 세워둔 말에 살을 보태러 말이다.
“…… 박규환.”
풀잎 몇 개가 나풀거리며 떨어지더니 박규환이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신속히 드워프 협곡으로 이동하도록 한다. 이 종이를 마정우에게 전달하도록 해.”
“…… 알겠습니다.”
나는 오늘 일을 적은 종이를 박규환에게 넘겨주었다.
결전의 날은 드워프가 정한 것보다 하루 일찍, 바로 오늘 밤 시작돼야 한다.
악마를 부르는 의식이 다시 거행될 수 없도록.
* * * * *
박규환에게 쪽지를 건네어 받은 마정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소라와 마이클이 양옆으로 붙었다. 김천재의 메시지를 전부 읽은 그들은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워프들이 빠르게 전투를 준비할 수 있도록 말이다.
마정우가 소리쳤다.
“마이클! 지금 당장 세계수로 이동해서 협곡과 숲의 시야를 확보하도록 해. 근처에 있는 오크의 위치를 전부 파악해야 해.”
마이클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케이, 나 먼저 출발합니다요!”
마정우가 그를 보내더니 유소라에게 말했다.
“소라 씨, 소라 씨는 박규환과 함께 듀발을 찾아가도록 하세요.”
“알겠어요. 앞서 알려주신 대로 움직이면 되는 거죠?”
“예. 실수하셔도 큰 문제는 없으니 긴장하지 마시고요.”
유소라가 눈을 부릅떴다.
“절대로, 실수하지 않을게요.”
둘을 보낸 마정우가 드워프의 왕을 찾아갔다.
협곡 중앙에 있는 절벽, 그곳에 파여있는 수백 개의 구멍 중 드워프의 왕을 만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플레이어만이 입장을 허가받을 수 있는 장소.
[드워프 왕의 침소]
수많은 구멍 중 빛을 내는 구멍은 하나였다. 그 안으로 마정우가 들어갔다.
허리를 세우면 머리가 닿을 정도로 좁은 구멍이었다.
구멍의 끝에 도착하자 왕의 침소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초라한 방이 나왔다.
코를 골며 졸고 있던 드니로가 깜짝 놀라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누, 누구야.”
“나다, 마정우.”
드니로가 눈을 부빈 후 마정우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환하게 웃었다.
“아니, 이 시간에는 무슨 일이지? 밤이 되기 전까지 휴식하라고 했는데 말이야.”
“…… 지금 밤이야. 그리고 엘프 진영 쪽에서 연락이 왔어.”
엘프 진영이라는 말이 나오자 왕의 얼굴이 굳었다.
“표정을 보아 좋은 연락은 아니었나 보군.”
“오크 진영에서 적과 한판 붙었다고 한다.”
“엘프가 오크와?! 그럴 리가. 요새에서 붙었다면 엘프들이 출동했다는 이야기인데.”
“엘프들이 붙었다고는 말 안 했어.”
“그럼?”
마정우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 김천재, 내 친구가 인간들을 데리고 가서 요새를 습격했어. 그 안에 있는 포로들을 풀어주고.”
치직. 치지직.
쓰읍. 푸후-.
하얀 담배 연기가 드니로의 방안에 퍼져갔다.
“자네 친구는 정말 겁이 없나 보군. 엘프 헬름에 있는 인간이라고 해봤자 몇 안 될 텐데, 오크 요새를 칠 생각을 하다니.”
“보통 놈이 아니야. 아니, 그보다 당신 빨리 움직여야겠어.”
드니로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으며 대답했다.
“…… 왜지?”
“곧, 이 대륙 전체가 전장이 될 거야.”
* * * * *
“공주님! 공주니임!!”
실비아의 시녀가 엘프 헬름 곳곳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댔다. 다른 엘프들 눈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라지는 그녀를 찾으러 다니는 게 시녀의 임무였으니깐.
쿵.
시녀가 누군가와 부딪혔다.
고개를 들어 보니 블란트가 그녀를 내려보고 있었다.
“오늘도 공주님이 사라지셨나?”
“예! 큰일 났어요. 공주님이 점심 이후로 보이지를 않아요.”
“뭐? 그럼 굉장히 오래 됐다는 말이잖아.”
“그러니까요!”
블란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지막으로 본 곳은?”
“그게…. 김천재 플레이어의 숙소 앞인데. 그 후로는 보이지를 않네요.”
“김천재?”
잠깐 멈칫했던 블란트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툭툭 치더니 김천재의 집으로 향했다.
시녀가 그의 뒤를 따랐다.
쿵. 쿵. 쿵.
“김천재 씨 계십니까? 블란트입니다. 잠시 여쭈어볼 것이 있어 왔습니다.”
침대에 누워 체력을 회복 중이던 나는 귀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들어와요.”
끼이이익.
블란트와 엘프족 시녀가 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불안해하는 둘의 얼굴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지?
블란트가 물었다.
“혹시 실비아 님을 보셨습니까?”
“…… 아까 점심에.”
“점심?”
“어. 같이 밥 먹고 잠깐 이야기 좀 나누다가, 어딜 가야 한다고 나가던데.”
“……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아니.”
예상되는 곳은 있지만, 놈에게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왜? 무슨 일 있어?”
“이 친구가 공주님의 행방을 찾지 못해서 초조해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점심부터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다며….”
시녀가 앞으로 한 발자국 나왔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번에도 한 번 뵈었던 것 같네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공주님이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는 보셨나요?”
“오른쪽으로. 엘프 헬름의 입구가 있는 쪽으로 가더라고.”
“공주님이요?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것도 없을 수는 없다. 그저 공주가 갈 만한 이유를 가진 것이 없을 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건 아무도 모르지요.”
내 대답을 들은 블란트가 눈썹을 찡끗거렸다.
“김천재 님.”
“예.”
“공주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지 모르겠네. 나도 못 들었다니까요.”
“…… 유추되는 곳이라도 말씀해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블란트는 내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마지막 대답에서 단서를 잡은 것 같은데.
‘……’
뭐, 말해줘도 상관없겠지.
“돈 비토.”
“…… 예?”
“돈 비토. 그의 머리를 실비아가 가지고 있어.”
블란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게 소리쳤다.
“돈 비토! 그, 그 자식의 유골을 실비아 님이 가지고 계신 겁니까?”
“그렇지.”
“아…. 그럼…. 설마….”
블란트의 눈이 엘프 헬름의 입구를 가리켰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린 후 그에게 말했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몰라. 그저 당신이 말한 이야기를 토대로 유추만 할 수 있을 뿐.”
“여기서 점심에 출발하신 건 맞습니까?”
“그래.”
블란트가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집에서 달려 나갔다. 시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가 지나간 자리에서 내 얼굴까지 고개를 돌려 보았다.
“무, 무슨 일이에요? 공주님이 어디 계신다는 거죠?”
“…… 그건 저도 모릅니다. 방금 말했듯이 유추만 할 수 있을 뿐이죠.”
“유추하는 곳이 어딘데요?”
나는 몸살감기처럼 쑤시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오늘 밤까지 체력을 전부 회복해 놓으려면 좀 더 깊은 잠을 취해야 하는데.
이렇게 귀찮은 일이 생길 줄이야.
“…… 공주와 돈 비토가 처음 만난 장소. 어딘지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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