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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메인 이벤트는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오크의 족장과 싸움을 하게 되는 건가?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돌발 임무 표시도 없었고, 그렇다고 서브 이벤트 진행에 관한 시스템 메시지도 없었다.

끼이이이익.

천막 안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라이터를 켜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일회용 라이터의 불빛만으로는 천막 전체를 비출 수가 없었다.

그저 내 앞길을 보이는 정도.

그래도 크게 겁이 나지는 않았다. 겨우 다섯 번째 라운드일 뿐인데, 얼마나 강한 적이 나오겠는가?

물론 오르쿠스 같은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진 보스는 제외하고 말이다.

나는 어두운 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길의 끝에는 살짝 열려 있는 나무문이 있었다. 그 안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나는 문틈 사이로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도축장에 고깃덩이가 걸려 있듯, 곰과 드워프, 엘프들이 갈고리에 걸려 있었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악취는 그렇다고 넘길 수 있더라도 시체들을 저렇게 해놓다니.

좀비의 악취라 생각했던 냄새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 저건.’

방의 제일 끝 쪽에 검은 게이트가 보였다. 플레이어 중에서도 선택받은 ‘여는 자’만이 처리할 수 있다는 검은 게이트.

-키헤에엑!

방 중앙, 늙은 오크 한 마리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지팡이를 흔들고 있다.

‘저놈이 카바타구나.’

이상하다.

세월이 흘러서 그런 건가?

돈 비토의 과거에서 보았던 카바타와 많이 다르게 생겼다.

-크에엑 크악 크하악!

‘…… 뭐, 설정상 저렇게 변했나 보지.’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주문을 외우는 것 같기도 했다.

[방안에 있는 오크가 제3의 공간에 있는 누군가와의 대화를 시작합니다.]

그는 땅에 그려져 있는 붉은색 문양들을 하나씩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예, 말씀하신 일들은 전부 끝냈습니다.”

누구랑 대화하고 있는 거지?

내게는 들리지 않는 제3의 공간에 있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 같다.

그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아직…. 조금 부족합니다. 예? 아, 예. 말씀하신 크기의 곰의 척추와 엘프의 두개골, 드워프의 손과 발은 구했습니다. 다만…. 저의 마력이 마법진을 안정시키기에는 불안전하여….”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방 안에서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바닥에 그려진 붉은 글자에서 검은 기운이 천천히 흘러나와, 카바타의 앞으로 뭉쳐졌다.

나는 저자를 알고 있다.

‘루시퍼.’

인간의 몸에 악마의 날개를 달고 있는 자.

그가 손짓하자 카바타가 쩔쩔맸다. 루시퍼가 그에게 무얼 말하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좋은 말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카바타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빌 듯이 말했기 때문이다.

“죄, 죄송합니다. 어…. 아! 예 제….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말씀이신가요?”

루시퍼의 형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바타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절을 하듯 넙죽 엎드렸다.

“그…. 그것만은 제발….”

루시퍼의 형상이 그의 머리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두 마디, 혹은 세 마디의 단어를 내뱉자 카바타의 표정이 바뀌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당신을 이곳으로 불러오도록 하지요.”

루시퍼를 이곳으로 불러온다고?

겨우 다섯 번째 라운드에 끝판왕을 현세로 불러오겠다는 말인가.

“…… ”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이 게임은 바로 끝이 난다. 그에게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내가 십 년 이상에 걸쳐서 완성한 절대자 그룹으로도 녀석을 이기지 못했으니 말이다.

카바타가 알았다고 말하자 검은 연기가 사라졌다.

이어 놈이 자신의 손을 그어 피를 내더니 지팡이 끝을 적셨다.

펜촉에 잉크를 묻히듯 말이다.

키이이익- 키익-

그가 땅에 그려진 문양의 위에 덧대듯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 막아야 하나?’

녀석이 정말 루시퍼를 이곳으로 불러올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의문이 생겼다.

겨우 오크 네크로맨서 주제에 악마를 소환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플레이어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다는 말.

의식이 시작되기 전 놈을 처리해야 하나? 아니지, 카바타를 죽이면 스토리가 또다시 꼬이게 된다.

나는 선택해야 했다.

내 행동으로 인해서 전체적인 스토리가 바뀌는 것과,

지금 당장 눈앞에서 펼쳐지는 알 수 없는 서브 스토리를 막는 것.

[‘김천재’ 님의 선택으로 이번 라운드의 스토리가 정해집니다.]

[도전자는 스토리의 흐름을 선택하여 주십시오.]

-A: 카바타의 소환 의식 진행을 막고 악마의 계획을 막는다.

-B: 악마를 신경 쓰지 않고 이곳에서 나간다.

결국, 내가 카바타를 막지 않는다면 악마가 이곳에 온다는 것인가.

“…… 멈춰.”

쾅!

문을 강하게 차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오크 족장이 깜짝 놀란 듯 뒤로 자빠졌다.

“뭐, 뭐야?!”

“뭐긴. 김천재다.”

“아니, 누가 네 이름을 물어봤어? 이…. 인간이 여긴 어떻게 왔지?”

나는 빠르게 달려가 지팡이를 빼앗았다.

팍.

“뛰어왔다.”

“이, 이 미친놈이.”

“네가 카바타냐?”

“…… 너구나. 우리를 공격했다는 인간 네크로맨서 라는 놈이.”

“그럴걸.”

“하아-. 이래서 인간들은 안 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일어나라. 스켈레톤 병사들이여.”

쿠구구구 소리와 함께 막사 안에 있는 스켈레톤 병사들이 일어났다.

갖추어진 장비로 보아 전부 중급 이상의 스켈레톤. 나쁘지 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곰의 뼈로 만든 건가? 뼈 색상이 다르군.”

“…… 네 알 바 아니다. 얘들아, 가라!”

오크 족장의 명령과 함께 스켈레톤 병사들이 내게 덤벼들었다.

막사 안에 뼈가 넘치는데도 서른 마리 정도만 만든 것으로 보아 놈의 레벨이 훤히 보였다.

나는 놈과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 소환 능력 없이 적들을 상대했다.

스킬 북으로 새로 얻은 능력을 보여주마.

“아이언 메이든.”

▶아이언 메이든 (저주)

(마나 소모: 적 1인당 10)

-저주에 걸린 적들의 몸에 투명한 가시들이 달라붙습니다.

[‘아이언 메이든(저주)’ 시전.]

투명한 가시 수천 개가 허공에 날아올랐다. 이어 민들레 씨가 바람에 흩날리듯 가볍게 날아가 적을 덮었다.

투두두두두-!

아이언 메이든, 상대방이 적에게 준 대미지를 고스란히 돌려받는 저주.

나를 공격한 만큼 놈들도 대미지를 받게 된다.

해볼 테면 해봐라.

스켈레톤 병사들이 몸에 붙은 가시를 때어내려 털어 내보았다.

“어림없는….”

카바타가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멍청한 놈! 쓸모도 없는 아이언 메이든을 배우다니!”

나는 능청스럽게 웃었다.

“쓸모가 없어? 그럼 덤벼봐.”

모든 것을 하나씩 설명해 주는 것은 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나는 카바타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이 행동만으로도 내가 왜 최강의 네크로맨서였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깐.

스켈레톤 병사들이 나를 향해 뛰었다.

검, 창, 도끼, 활.

놈들이 여러 가지 무기를 사용해 나를 공격했다.

횡으로 날아온 검날이 내 투구를 내려치고, 등 뒤에서 바람을 가른 창끝이 갑옷을 찔렀다.

도끼는 나무를 베듯 옆구리를 찍고, 화살은 내 명치에 날아왔다.

캉! 캉캉! 캉! 캉!

모든 공격이 내 갑주에 막혔다. 예상컨대, 내 방어력은 놈들의 공격력보다 세 배 이상 높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수준.

캉! 캉!

스켈레톤 병사들이 계속해서 나를 때렸다. 나는 허수아비처럼 가만히 서서 놈들의 공격을 맞아 주었다.

“카바타,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다. 이 장소를 파괴하고 숲에서 떠나도록 해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마.”

“…… 곧 죽을 놈이 말이 많군. 여기가 어딘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오크 요새지, 어디야.”

“그래, 오크 요새. 내 본진에서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나?”

“…… 응.”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딱!

[‘아이언 메이든(중급)’ 발동.]

나를 때리던 스켈레톤 병사들의 몸에서 가시들이 터졌다.

쾅!

나를 공격한 만큼 중첩된 대미지가 폭발로 나타났다.

공격력이 높고 방어력이 낮은 스켈레톤 전사들이 버텨낼 수 없는 충격이었다.

단번에 나를 공격하던 모든 스켈레톤 병사들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놈들을 짓밟고 지나가며 카바타에게 말했다.

우득. 우드득.

“내가 오크 요새를 전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너 하나만을 죽이고 나가는 것은 가능하지.”

“…… ”

“아직 답을 듣지 못했는데. 떠나겠나? 죽겠나?”

카바타가 피에 젖은 손으로 땅에 그려진 문양을 만졌다.

완성되지 않은 주문진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나? 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루시퍼 님, 제 목숨을 드리겠습니다.”

갑자기 놈이 손을 높게 들더니 날카로운 손톱으로 자신의 가슴을 뚫었다.

팍!

그리곤 심장을 꺼내어 마법진의 중앙을 향해 던졌다.

털썩.

이어 카바타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나를 바라보며 비열한 웃음을 뱉었다.

심장이 뽑혔는데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이어 놈이 두 눈을 감았다.

“……”

전신이 떨릴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 방안을 감싸 안았다. 중력이 강해진 것처럼 몸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지진이 난 듯 땅이 흔들렸다.

공포감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알고 있다.

익숙하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앞서 첫 번째 라운드에서 경험해 보았던 적의 힘.

땅에 그려진 붉은 문양들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일부분이 빙글빙글 돌며 오크의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나는 막아보려 용의 송곳니를 휘둘러보았지만, 물을 베듯 그냥 지나쳐 갔다.

“안 돼!”

문양들을 삼킨 심장이 지면에서 뛰기 시작했다.

[악마 왕 ‘루시퍼’가 부활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를 막아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십시오.]

[도전자: 1/10 ]

X 됐다.

이 생각밖에는 안 들었다. 내 행동 때문에 오히려 녀석의 부활을 앞당긴 건가?

아니지.

도전자의 수를 정해놓고 받는 것으로 보아 어차피 부활할 놈이었다.

그렇다면 난이도가 낮은 루시퍼가 나올까? 라는 생각을 했는데,

쿠궁!

이곳저곳에서 날아온 드워프, 엘프, 곰의 뼈가 조립되며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

남아있는 붉은 문양들이 날아가 뼈에 달라붙었다.

이마에 달린 뿔을 보아 루시퍼를 부활시키는 것이 확실했다.

이어 오크 족장의 심장이 공중에 날아오르더니 뼈의 왼쪽 가슴으로 날아가 박혔다.

우우우웅-

갑자기 방 끝 쪽에 있는 게이트가 엔진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휘몰아쳤다.

[‘불지옥’으로 연결된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나는 독백했다.

“첩첩산중이네 X벌.”

완성된 뼈와 심장이 그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방 안에 있는 스켈레톤을 전부 일으켜 세웠다.

“스켈레톤 소환.”

드워프와 엘프의 뼈가 많아서 그런지 쓸 만한 병사들이 만들어졌다.

대부분이 스켈레톤 전사와 마법사.

스무 마리 정도 되는 상급 스켈레톤 병사들이 방안을 지켰다.

“……”

-크으으으….

게이트 안에서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들어도 루시퍼인 것을 알 수 있는 음성이었다.

손에 땀이 찬다. 송곳니를 잡고 있는 손가락이 미끈거렸다.

검은 게이트 안에서 손 하나가 튀어나왔다. 무광의 검은 피부를 가진 루시퍼의 몸이 말이다.

“오랜…. 만이군…. 꼬마 녀석….”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건가?

“…… 그래, 오랜만이네. 나를 아직도 기억 하나 봐?”

“잊을 수 있겠나…. 유일하게 내 몸에 상처를 낸…. 놈인데 말이야.”

“…… 기억해줘서 고맙네.”

놈의 몸이 게이트 밖으로 천천히 나오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완벽하게 부활하면 막을 수 없다.

빨리 손을 써야 한다.

나는 검은 게이트를 향해 달려가 송곳니를 휘둘렀다.

쾅!

끄떡도 하지 않았다.

결계가 내 공격을 막아낸 것 같다.

“빌어먹을.”

“공포에 저항해라…. 그게 바로 내 즐거움….”

루시퍼의 발이 게이트 밖으로 튀어 나왔다. 더 늦게 된다면 이제 막을 수 없게 된다.

정말 멸망하는 것이다.

루시퍼의 얼굴이 게이트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확신했다.

내가 지금 놈을 막지 않으면, 그 누구도 부활한 루시퍼를 상대할 수 없다.

상황을 파악한 나는 놈을 상대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분명 이곳에 놈을 막을 답이 있을 것이다.

스켈레톤 병사들이 방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사이에 껴서 시체들을 뒤집었다.

열쇠 같은 것이 있으려나?

루시퍼를 상대할 숨겨진 무기가 있으려나?

분명히 이 게임의 운영진들은 무언가를 숨겨놓았을 것이다.

이스터 에그에 환장하는 변태 같은 놈들이니깐.

“…… 설마.”

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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