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마지막 안개가 걷히며 계곡으로 돌아왔다.
오크 대장이 내 앞에서 숨을 컥컥거리고 있었다.
나는 놈의 머리채를 잡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너, 이름이 뭐야.”
“크허어억. 이 이 망할 인간 새끼가!”
퍽!
“이름이 뭐냐고.”
“허어억.”
나는 용의 송곳니를 휘둘러 녀석의 허벅지에 박아넣었다.
콰직!
비명이 숲에 울렸다.
“이름이 뭐냐고.”
“허…. 허…….”
“카바타, 그게 네 이름이냐?”
“…… 하…. 아니다.”
나는 녀석의 허벅지에서 송곳니를 뽑은 후 목에 꽂아 넣었다. 오크 대장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발버둥을 쳤다.
나는 계곡에 녀석의 얼굴을 담근 후, 발로 걷어차서 기절시켰다.
놈이 축 처졌다.
[돌발 임무에 성공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보상으로 ‘직업 전용 스킬 북’을 얻습니다.]
“……”
드워프들이 나를 보며 수군거렸다.
-아니 저놈은 뭔데 저렇게 강해?
-인간 맞아? 아니 인간이 저렇게 힘이 좋다고?
-인간 아닐 거야. 몸에서 흘러나오는 사악한 기운 좀 봐. 악마일 것 같은데.
드워프의 왕이 나를 향해 걸어왔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
“…… 안녕하신가.”
나는 그를 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보아하니 인간인 것 같은데, 왜 우리의 싸움에 끼어들었지?”
“…… 부탁할 것이 하나 있어서요.”
“부탁?”
“예.”
그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이 드워프에게 부탁할 만한 것이라고는…. 제조할 물건이 있는 겐가?”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뇨. 다른 부탁이요.”
그가 내 눈동자를 보았다.
“다른 부탁이라…. 우선 우리를 도와줘서 고맙네.”
드니로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목례했다.
내가 아는 선에서 그에게 예의를 표하고 싶었다.
“드워프의 왕, 드니로가 맞으신지요?”
“그래. 나를 알고 있구만.”
“이 세계에 온 인간 중에는 당신을 모르는 자가 없지요.”
“…… 그런가?”
“예.”
나는 숲에 대기하고 있는 모든 병력을 꺼내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드니로. 아까 말했던 부탁, 지금 이어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 말해보게나.”
“보시다시피 뒤에 있는 이놈들은 전부 제 소환수고, 저는 네크로맨서입니다.”
드니로가 내 소환수를 둘러보았다.
“…… 그래서?”
“제가 지금 샬로트 여왕님과 오해가 생겨서 엘프 헬름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엘프 헬름이라….”
“그녀와의 대화 자리를 만들어 주실 것을 부탁드리겠습니다.”
* * * * *
드니로가 직접 엘프 헬름으로 방문해 샬로트와의 대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예언 구슬이 보여준 장면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고, 엘프 헬름에 쳐들어왔던 오크 부대는 내 도움에 의해 전멸했음을 알려주었다.
드니로가 말했다.
“여왕, 마지막 회담이 그렇게 끝났는데도 우리가 엘프를 도와주러 온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
“우리 아들. 돈 비토의 마지막 유언이 아니었으면 절대 오지 않았어.”
“……”
“이제 당신도 알았을 거야. 평화를 지키려면 그에 상응하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드니로-”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자네가 알아서 판단하도록 하게나.”
샬로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드니로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실비아는 잘 있는 겐가?”
“예. 실비아, 실비아, 실비아!”
실비아가 뛰어왔다.
“부르셨어요?”
“…… 드니로께서 네 안부를 묻는구나.”
실비아가 드니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 안녕하세요….”
“껄껄껄껄- 그래, 너는 잘 있었고?”“네….”
“식사를 못 했냐? 왜 이렇게 바람 빠진 소리를 내고 있어.”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지야. 네가 잘 있다니 됐다.”
드니로가 자리를 떠나려 의자에서 일어났다.
샬로트가 같이 일어나며 그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드니로.”
“…… 고맙다는 말은 저 친구한테 하시게나. 저 네크로맨서가 없었으면 우리도 피해가 컸을 거야.”
나는 씨익 웃었다.
샬로트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오묘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 고맙군요, 김천재 씨.”
“뭘요. 그럼 이제 저는 엘프 헬름에 있어도 될까요?”
샬로트가 대답을 망설였다.
드니로가 턱을 괴고 우리 둘을 보았다.
실비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요! 천재 씨 아니었으면 엘프 헬름은 사라졌을 거예요 ”
샬로트가 대답했다.
“그건 아니야.”
드니로가 그녀를 보았다.
“아니, 실비아 말이 맞을지도 몰라. 우리도 김천재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이곳으로 오지 못했을 테니깐.”
“…… 예?”
“나도 몰랐는데. 우리 협곡에 있는 인간과 저 김천재라는 네크로맨서가 서로 연락을 하고 있었더군.”
“연락을….”
“우리 쪽에 있는 인간이 내게 엘프 헬름이 위험한 것을 말해줘서 이곳으로 올 수 있었네.”
“……”
“샬로트, 잘 생각해보게나. 저자가 어둠의 힘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악한 인물이 아닌 것은 확실해. 오크가 아닌 우리와 힘을 합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드니로가 호탕하게 웃더니 샬로트의 집에서 나갔다. 블란트가 상황을 살피더니 드워프들을 엘프 헬름 밖으로 안내했다.
나는 이곳에 남게 되었다.
“여왕님, 아직도 제가 의심스러우신가요?”
“…… 예. 조금은요.”
“그럼 엘프 헬름 밖으로 나갈까요? 이곳에 있으면 편하기는 하지만, 저 때문에 다들 불편하다면 나가도록 하지요.”
실비아가 말했다.
“어머니, 김천재 씨가 아니었다면 엘프 헬름은 이미 사라졌을지도 몰라요.”
“실비아, 조용히 하거라.”
“어머니….”
샬로트가 잠시 고민을 하듯 눈을 감았다. 실비아가 그녀의 옆으로 붙어 손을 잡았다.
샬로트가 눈을 떠서 그녀를 보더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김천재 씨.”
“예.”
“엘프 헬름에서 나가신 이후로 무얼 하고 계셨죠?”
“그냥. 숲에서 먹고 자고 했습니다.”
“…… 오크 요새에 다녀오셨나요?”
순간 당황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오크 요새 정찰을 그녀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셨죠?”
“…… 그곳에는 왜 가신 겁니까?”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대답했다.
“오크의 숫자를 파악하고, 그들이 엘프 헬름과 드워프 협곡을 공격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요.”
“왜 공격하는지?”
“예. 이렇게 넓은 대륙에서 왜 굳이 이곳을 공격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샬로트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이유를 찾으셨나요?”
“…… 예.”
“왜죠?”
나는 망설이는 시늉을 했다.
그녀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가 재차 물었다.
“이유를 제가 알 수 있을까요?”
“힘, 힘 때문입니다.”
“…… 힘?”
“예. 정확하게 말하자면 드워프들이 가진 수준 높은 제련 능력과 엘프만이 가능한 정령술이 목표예요.”
“그건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배울 수 있는 게 아닌데요?”
“설명하자면 좀 복잡한데.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건 그들의 표면적인 목표입니다.”
“…… 그럼 진짜 목표가 따로 있다는 건가요?”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었다.
“담배 좀 피워도 될까요?”“아뇨. 이야기 끝나고 나가서 피우세요.”
“…… 그럼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좀 피곤해서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샬로트가 기도하듯 두 손을 마주 잡더니 주문을 외웠다.
근방에 있는 나무에서 반짝이는 가루가 나와 내 몸을 덮었다. 요 며칠 느껴지던 피곤함이 싹 가시며 관절의 통증도 사라졌다.
나는 어깨와 무릎을 접었다 피며 몸의 상태를 확인했다.
‘굉장하군.’
“이제 나머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 예. 그럼 놀라지 마세요.”
* * * * *
나는 오크 요새에서 본 것과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오크들의 진짜 목표.
아니, 오크의 족장인 카바타의 목표.
샬로트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크의 족장이 악마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고요?!”
“예. 루시퍼라는 놈의 수하예요.”
“아니….”
“나머지 오크들은 그것도 모르고 악마들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이곳에서 힘을 기르고 있는 거죠.”
“그런….”
“여왕님, 앞으로 어떻게 하실 예정이시죠?”
“…… 무엇을요?”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려 콧등을 올린 후 입을 양손으로 찢어 오크 같은 얼굴을 만들었다.
“오크 놈들이요. 앞으로 계속 공격 올 텐데 이곳의 병력만으로는 막을 수 없어요.”
“……”
“오늘 처리한 오크 병사는 그들이 가진 병력의 반도 안 됩니다. 드워프 쪽에서도 병력 손실이 거의 없다고 말했지만, 계속되는 전투로 다들 지쳤을 거예요.”
샬로트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저도 이제 어떻게 할지 모르겠군요.”
“결정하셔야 합니다. 드워프와 손을 잡고 오크들과 싸울지. 이대로 엘프 헬름이 무너질지요.”
“…… ”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분명 시간이 흐르면 오크들이 이곳을 무너뜨릴 거예요. 그들은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해나가고 있습니다.”
블란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리가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건가?”
“엘프 헬름이 무너지는 꼴이 보기 싫다면요. 드워프들이 이곳을 계속해서 보호해줄 것 같나요? 곧 있으면 협곡도 위험해질 텐데요?”
“…… 자네 생각에는 우리와 드워프가 힘을 합치면 오크 요새를 무너트릴 수 있을 것 같나?”
“그건 해봐야 알겠지요. 다만, 지금이 아니면 후에는 기회가 없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내 확신에 찬 대답에 블란트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른 엘프들도 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오늘 쳐들어온 오크 부대의 일부분만으로도 엘프 헬름이 무너질 뻔했으니깐.
샬로트가 말을 이었다.
“김천재 씨, 저희가 당신을 믿어도 될까요?”
“믿고 안 믿고는 여왕님이 판단하도록 하셔야죠.”
“저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평화를 위해 그들과 싸우고 싶지 않거든요.”
“싸우지 않고 평화만 찾고 싶다. 이 말씀이신가요?”
“…… 예.”
나는 실비아를 슬쩍 보았다.
그녀가 해맑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난감하네.
“여왕님, 지금 상황에서 싸우지 않으면 평화가 찾아오나요?”
“……”
“싸워서 이기면 평화가 찾아올까요?”
“……”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왕님이 직접 찾으셔야 합니다. 그 누구도 답을 줄 수는 없어요.”
“어렵군요.”
“쉬운 일은 없지요. 그럼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나는 샬로트의 집에서 나왔다. 뒤따라 나온 블란트가 내게 물었다.
“잠시 대화 좀 할 수 있겠습니까?”
“…… 짧게 말해 주시겠어요?”
“예.”
털썩.
블란트가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
나를 향해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인사했기 때문이다.
“김천재, 앞선 저의 무례를 용서해주시지요.”
[현 시간부로 당신을 향한 블란트의 모든 오해가 사라집니다.]
그를 따르는 엘프 기사들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블란트가 고개를 들지 않자, 다른 기사들도 나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용서해주십시오!
“…… 일어나요 블란트.”
“저는 알고 있습니다. 천재 씨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만들어 주실 수 있는 것을.”
“아뇨, 저는 못 만들어요. 당신이 직접 만들어야죠.”
“…… 부탁드리겠습니다. 여왕님을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난감했다.
수 십 명의 엘프 기사들이 무릎을 꿇은 채 나를 지켜보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들의 대장인 블란트가 내게 정식으로 요청해왔다.
“…… 블란트.”
“예.”
“이 이야기는 내일 다시 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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