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샬로트 여왕이 내게 구슬을 보여 주었다.
그 안으로 핏빛 전장이 보였다.
많은 수의 엘프들이 스켈레톤 병사들을 상대로 전투 중이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 전쟁을 만든 것이 저란 말씀이신가요?”
“그건 아무도 모르지요.”
확실히 이 안에 있는 스켈레톤 병사들이 전부 네크로맨서에 의해 움직이는 놈들이란 것은 알겠다.
하지만 내가 소환한 병사들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스켈레톤 병사들의 모습이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크의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이놈들을 소환한 소환 주는 결국 오크라는 셈.
“여왕님, 자세히 보시면 이 안에 있는 스켈레톤들의 얼굴은 오크입니다.”
“…… 그렇죠.”
“인간은 오크 스켈레톤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건 아무도 모르지요.”
“…… 예?”
엘프 여왕이 눈짓하자 블란트가 오크 머리뼈 하나를 가져왔다.
“…… 이게 뭔가요.”
블란트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뭐긴. 인간들이 가져온 소환물 중 하나지.”
“…… 인간이 그걸 만들어 냈다고요?”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
절대 불가능한 말이다.
“인간이 어떻게 오크 병사를 만듭니까?”
“그거야, 네크로맨서의 힘으로 어떻게 했겠지. 분명 이 마을에 찾아왔던 인간이 이 스켈레톤 병사를 조종했었어.”
“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죠. 다들 잘못 보신 것 아닙니까?”
샬로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천재 씨.”
“말씀하세요.”
“죄송하지만 이 구슬 안의 네크로맨서가 천재 씨가 아니라 하더라도, 네크로맨서의 직업으로 이곳에 머무신다면 모두가 불안해 할 것입니다.”
존재만으로 모두에게 위협이 된다는 말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인정했다.
엘프들이 내게 협조하지 않는다면, 굳이 내가 이곳에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샬로트가 말을 이었다.
“그럼 엘프 헬름에서 나가주시겠습니까?”
“예. 다만 이 숲에 머무는 것은 허락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숲에요?”
“그저 쉴 공간이 필요합니다.”
“…… 알겠습니다. 다만 엘프 헬름에서 너무 가깝지 않은 곳에 머물도록 해주세요.”
“예.”
[‘블란트’가 당신에 대한 경계 태세를 한 단계 높입니다.]
대화가 끝난 후 나만 엘프 헬름에서 나가게 되었다.
차카니와 김연희를 이곳에 남겨둔 채 말이다.
같은 그룹이 아니었기에 나올 수 있는 상황.
나는 미련 없이 엘프 헬름을 떠나기로 했다.
굳이 엘프와 함께하지 않더라도, 나만의 스토리 흐름을 만들 수 있으니.
* * * * *
기사단의 경호를 받으며 엘프 헬름에서 나왔다. 사실 경호라기보다는 나를 감시하기 위해 따라온 것 같다.
블란트가 언짢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럼 이 근처에서는 보이지 말도록 해라. 여왕님의 명령만 아니었어도 네 놈은-”
“재수 없는 새끼.”
“…… 뭐라고?”
“재수 없는 새끼라고. 어차피 엘프 헬름에 머물지도 않을 건데 너한테 잘 보일 일은 없다.”
“이 자식이….”
나는 용의 송곳니를 들어 놈을 겨누었다.
“한 판 해볼래?”
그의 뒤를 지키는 병사들이 활을 들었다.
스르륵.
블란트가 손을 휘저어 말렸다.
“됐다. 모두 철수하도록 해라.”
“쫄았나?”
“마음대로 생각해라. 우리는 여왕님의 명령 외에는 살생을 저지르지 않는다.”
“허허…. 그러세요?”
역시 호수의 기사 ‘블란트’.
혼돈의 전장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냉철한 판단력을 가진 자라고 하더니.
내 조롱에 넘어오지 않았다.
“네크로맨서, 경고하도록 하지. 이 근처에는 오크들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죽기 싫으면 드워프 협곡으로 넘어가도록 해라.”
“예- 예- 알겠습니다. 이만 꺼져주실래요?”
“……”
블란트가 이빨 새는 소리를 내더니 부하들과 함께 엘프 헬름으로 돌아갔다.
어두운 밤 숲에 혼자 남게 되었다.
“제길.”
나는 담뱃불을 붙이고 숲속을 걸었다. 여기저기서 정체 모를 벌레 소리와 야생 동물들의 발걸음이 들려왔다.
아오오오오-!
늑대인가?
나는 어두운 길을 뚫고 세계수로 다시 돌아왔다.
언덕 위로 유성우가 쏟아져 내린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실제로 보니 감탄이 절로 나올 뿐이었다.
“굉장하군.”
나는 쏟아지는 별을 보며 대호와 박규환을 이 세계로 불러왔다.
나머지 병력은 네 번째 라운드에 남겨놓은 채 말이다.
트롤들은 나 대신 열심히 사냥하고 있으니 굳이 부를 필요가 없었다.
띠링.
머리 위로 황금색 빛이 한 바퀴 돌았다.
“좋아….”
세계수 넘어 드워프 협곡으로 넘어가려 하자 결계가 나를 막았다. 투명한 벽에 막힌 나는 박규환을 그 안으로 넣어봤다.
‘…… 들어가지네?’
소환수는 허용이 된다.
“그렇다는 거지….”
터벅. 터벅. 터벅. 터벅.
누군가 세계수 근처로 다가왔다. 분명 망루에 들키지 않도록 뒤로 돌아왔는데.
누구지?
‘…… 오크인가.’
우리는 세계수 사이로 몸을 숨겼다. 오크가 왔더라도 일을 만들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 엘프?’
백발의 여우같이 생긴 엘프 한 명이 세계수 앞으로 다가왔다. 계속해서 나무를 쓰다듬던 그녀는 지면 위로 솟아오른 뿌리에 앉아 풀피리를 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녀를 지켜보았다.
황홀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피리 소리.
“…… 설마.”
공주, ‘실비아’인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과 나풀거리는 실크 옷. 게임에서는 이 정도까지 구현되지 않았었기에 헷갈린다.
백발에 실크 옷, 뛰어난 풀피리 연주라고 한다면 엘프 공주 실비아가 확실하다.
공주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호위 없이 밤에 숲속을 돌아다니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
오크와 야생 동물의 사냥 시간에는 엘프족 기사들도 정해진 길 외에는 돌아다니지 않을 텐데.
‘길을 잃었나?’
-크르르르르.
숲속에서 오크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가래 끓는 듯한 저 음성은 녀석들이 사냥감을 찾을 때 내는 특유의 신호다.
엘프 공주가 눈치를 못 챈 것 같은데.
나는 망루 쪽을 보았다.
엘프와 드워프 병사, 두 쪽 다 잠을 자고 있지는 않지만 공주를 구출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
오크의 음성이 점점 가까워진다. 발걸음이 들려올 정도다. 지금 당장 망루에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병력이 제때 도착하기 힘들 것 같다.
풀피리 때문인지 공주는 아직도 눈치를 못 챘다.
‘…… 나를 시험하는 건가.’
공주가 피리를 멈추자, 갑자기 오크의 소리가 사라졌다. 야생의 동물만큼 기척을 감추는데 익숙한 몬스터.
오크 전사의 기술이다.
“크아아아악!”
갑자기 수풀에서 오크가 튀어나와 실비아를 덮쳤다. 공주는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도 질러보지 못하고 그대로 잡혔다.
오크 녀석이 큼지막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풀피리가 땅에 떨어졌다.
실비아가 거세게 저항을 하며 몸을 흔들었다. 오크가 그녀의 복부를 주먹으로 강타했다.
“억!”
공주가 정신을 잃음과 동시에 축 늘어졌다.
오크는 실비아를 어깨에 둘러메더니 비열한 웃음을 내뱉었다.
“크르르르, 대장님께서 좋아하시겠군.”
[돌발 이벤트 발동!]
[오크에게 잡힌 실비아를 구하십시오.]
[구출 성공 시 실비아가 당신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보상: 1000 제니]
‘…… 기회가 찾아온 건가.’
나는 지그시 속삭였다.
“박규환. 오크 사냥을 명한다.”
* * * * *
나는 기절한 실비아의 어깨를 흔들었다.
“어이, 일어나.”
“으음….”
실비아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어 그녀는 자신의 흐트러진 옷을 보고, 욱신거리는 복부를 만지더니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나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 지금은 오크들이 돌아다니는 시간이라고.”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입에서 손을 떼고 말을 이었다.
“몸은 괜찮나?”
“…… 네. 어떻게 된 거죠?”
“기억이 안 나나?”
“어…. 오크가 저를 공격해서….”
“맞아.”
나는 땅에 떨어져 있는 오크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실비아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저, 저저저 오크가….”
“어이.”
“…… 네?”
“너 이름이 뭐야?”
실비아가 옷을 추려 입으며 내게 대답했다.
“실비아라고 해요.”
빙고.
“실비아? 이쁜 이름이네.”
“아…. 고맙습니다.”
나를 경계하는 듯한 눈빛.
그럴 만도 한 것이 공주에게도 내 검은 오라가 보일 것이다.
나는 안심하라는 의미에서 투구를 벗어 옆에 두며 그녀에게 말했다.
“이 시간에 여기에는 왜 왔지?”
“……”
대답이 없다.
그녀가 기절해 있는 동안 나는 생각해봤다. 틀어진 스토리의 흐름에서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답은 구하지 못했다.
예상만 할 뿐.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럼 나는 이만 가도록 하지.”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실비아가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잠시만요.”
“…… 왜?”
“오늘은…. 중요한 날이어서 왔어요.”
“중요한 날?”
“네….”
오늘이 무슨 날인데?
대답을 잠시 망설였다. 다섯 번째 라운드에서 중요한 날은 단 하나.
드워프와 엘프의 협공, 오크 요새 공략밖에 없을 텐데.
‘…… 알았다.’
공주를 움직이게 하는 단 하나의 원동력.
왕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를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나?”
“……”
“왜? 내가 너무 정곡을 찔렀어?”
“인간이시죠?”
“괴물은 아니지.”
실비아가 땅에 떨어진 풀피리를 주웠다.
“그렇구나….”
“왕자는 내일 아침에 만나도록 해. 망루까지 데려다줄 테니 기사단과 함께 돌아가도록 하고.”
망루 쪽으로 가려 하자 그녀가 내 손목을 다시 잡아끌었다.
“잠시만요!”
“…… 왜?”
“잠시만. 잠시만 이곳에 같이 있어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손을 저었다.
“미안한데, 나는 너희들이 혐오하는 네크로맨서야.”
“…… ”
“너희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면 노발대발하실걸? 너와 나는 같이 있을 수 없어.”
“괘, 괜찮아요.”
“…… 왜 같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연주를 하려고요. 피리로 한 곡 끝낼 때까지만 옆에 있어 주세요.”
개구리 왕눈이야? 왜 이렇게 피리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절실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 그럼 한 곡만 불러. 그동안만 기다려줄게.”
실비아가 손뼉을 쳤다.
“감사합니다!”
[‘실비아’ 님의 고마움 지수가 +10 상승합니다!]
사실 어떤 부탁이라도 그녀의 말을 들어줄 것이었다.
다만 그녀에게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게 하려면 이런 식의 대화가 필요했다.
고마움의 지수가 높아질수록 그녀는 내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질 테니깐.
실비아가 다시 세계수의 뿌리에 앉더니 피리를 연주했다.
마음이 평온해진다.
아까 전 곡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가지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가지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이 최대한 허공에서 버텨보려 하는 것 같았다.
개구리와 귀뚜라미가 합창하듯 크게 울었다.
엉덩이에 불을 밝힌 반딧불이들이 세계수에 모여들었다.
그저 피리 연주인데 웅장하다.
실비아의 피리 연주는 얼마 가지 않아 끝났다.
곡을 마친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 이게 무슨 곡이지?”
“숲의 레퀴엠이에요.”
“숲의 레퀴엠이라….”
레퀴엠?
나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우리가 늦게 도착한 4년간의 공백. 틀어진 스토리의 흐름이 내가 아는 별이 쏟아지는 언덕과 다른 상황을 만들었나보다.
‘설마…….’
“왕자가 죽었나?”
“……”
역시.
공주와 몇 마디를 나누었을 뿐인데 틀어진 흐름의 일부분을 알게 되었다.
대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왕자가 죽었다.
“오크에게 공격을 당한 건가?”
“……”
“아니면 다른 몬스터?”
실피아가 고개를 떨구었다.
“아뇨.”
“그럼?”
실비아의 두 눈이 붉어졌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입술을 떨고 있다. 울음을 참아내려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내가 아는 다섯 번째 라운드에서는 엘프 공주와 드워프 왕자가 결혼한다.
그 둘이 연합을 만들고.
플레이어들이 ‘오크 요새 레이드’에 참가하여, 적을 무찌르고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메인이벤트.
근데,
이벤트의 핵심인 왕자가 죽었다.
‘…… 새로운 흐름을 만들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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