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언어 동기화율 99%]
[‘별이 쏟아지는 언덕’에서의 플레이어 체류 기간은 100일까지 허용됩니다.]
[그 안에 모든 일을 끝내 주시기 바랍니다.]
눈부신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뚜벅. 뚜벅. 뚜벅. 뚜벅.
길의 끝에 도착했을 때는, 한낮의 네 번째 라운드와는 다르게 어두운 밤이었다.
왜 항상 이 게임은 새로운 라운드로 들어갈 때 어두운 하늘로 시작하는 걸까?
하프 아포칼립스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무겁지 않은 배경을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시스템 메시지]
[다섯 번째 라운드를 시작합니다.]
어두운 하늘 아래, 별이 쏟아지고 있다.
제일 먼저 도착한 나는 크고 작은 유성우들이 쏟아지는 하늘을 지켜보며 소원을 빌었다.
‘살아서 이 게임에서 나갈 수 있게 해주세요.’
두 번째로 도착한 차카니가 내 옆으로 붙었다.
“여기가 엘프 헬름인가.”
“…… 아뇨. 랭커라면서요? 봐요.”
나는 검지로 커다란 나무를 가리켰다.
[세계수]
드워프 협곡과 엘프 헬름 사이에 있는 커다란 나무다.
고개를 들어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이 세계의 생명의 근원.
우리는 멍하니 세계수를 쳐다보았다.
“똑같구나.”
“뭐가요?”
“게임하고 똑같다고. 협곡에서 엘프 헬름쪽으로 바람이 부는 거.”
그렇다.
이곳의 바람은 항상 드워프 협곡에서 엘프 헬름쪽으로만 이동한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세계수의 머리에서 꽃가루가 흩날리듯, 빛나는 가루들이 뿜어져 나왔다.
생명의 가루.
모든 병을 고친다는 기적의 약재 중 하나이다.
“김천재. 너는 생명의 가루가 목표인가? ”
“아뇨. 말했잖아요, 이번 라운드는 휴식이 목적이라고요.”
물론 목적은 휴식이다.
목표는 다르지만.
이어 다른 플레이어들이 도착했다.
[‘김천재’ 님의 그룹]
[앞으로 진행될 ‘멸망의 땅’ 다섯 번째 라운드의 스토리 흐름을 선택해주세요.]
[이번 라운드는 개인행동이 가능하므로 원하시는 흐름을 선택해주시면 됩니다.
A. 강인한 힘과 제작 능력을 가지고 있는 드워프와 인연을 맺습니다.
B. 자연을 다루고 마법에 능통한 엘프와 인연을 맺습니다.
앞서 지나온 라운드와는 다르게 개인행동이 가능한 라운드다.
플레이어 특성에 맞게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장소.
물론 암흑가의 보스로 불리는 네크로맨서는 예외인 라운드지만 말이다.
나는 스토리 흐름의 B를 선택했다.
모두가 강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휴식하는 것이 이번 라운드의 목표다.
자동 사냥을 준비해 놓은 이상, 휴식 또한 내게는 성장하는 방법의 하나니깐.
[시스템 메시지]
[모든 플레이어가 스토리 흐름의 선택을 마쳤습니다.]
[선택지- A]
-마정우
-마이클 비치
-유소라
[선택지- B]
-김천재
나 혼자 엘프 헬름으로 간다.
“마정우, 금은 부족하지 않고?”
“어. 네 번째 라운드 끝나고 한국 연합에서 걷어왔어. 살려줬으니깐 대가를 받아야지.”
“너답네. 그럼 메인이벤트 때 보자.”
“그래, 괜히 까불지 말고 숨죽이고 있어라.”
“너나 조심하세요.”
나는 피식 웃은 후 정우의 등을 툭 쳤다.
세계수가 자라고 있는 언덕의 좌측으로 마정우, 마이클, 유소라가 떠났다.
그들이 드워프 측에서 설치한 망루까지 도착하는 것을 본 나는 엘프 헬름으로 향했다.
세계수의 우측 길로 계속해서 걸어가자 엘프 망루가 나왔다.
높이 쌓아 올린 돌탑 위에 귀가 뾰족한 요정족들이 내게 활을 겨누며 소리쳤다.
“멈춰라!”
“멈췄습니다.”
“인간인가?”
“예.”
“어디서 왔지?”
“정복자의 무덤에서 왔습니다.”
엘프 중 한 명이 망루 밑으로 내려왔다.
하이 엘프인가?
키가 매우 큰 남성이었다. 가죽 갑옷에 망토를 두르고 있는 그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정복자의 무덤에서 왔다고?”
“예.”
[엘프 헬름의 기사단장인 ‘블란트’가 당신에게서 느껴지는 어둠의 기운을 경계합니다.]
데스나이트의 힘 때문인가.
그가 경계하는 ‘어둠의 기운’이라는 것은.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오라를 말하는 것 같다.
“…… 그래. 이곳에 온 목적이 뭐지?”
“…… 휴식입니다.”
“휴식?”
“바깥세상이 너무 어지러워 잠시 쉬려고요.”
블란트가 날카로운 말투로 대화를 이었다.
“…… 정복자의 무덤에 대해서는 들었다. 정체 모를 병이 퍼져 고생 중이라면서?”
“예.”
“감염자를 만난 적 있나?”
“있어요.”
“그럼 자네도 감염됐을 확률이 있겠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정복자의 무덤’ 안에 퍼진 바이러스는 감염되면 즉각 반응이 옵니다. 이렇게 돌아다닐 수 없어요.”
“그래?”
“예.”
“거짓은 없겠지?”
“그럼요.”
이 자와 이야기 할 때는 거짓과 쓸데없는 이야기는 섞지 말아야 한다.
엘프들의 특성, ‘심안(心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블란트’님이 심안(心眼) 스킬을 발동합니다.]
[마음의 눈으로 ‘김천재’ 님의 대화를 꿰뚫어 봅니다.]
[당신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 정말이군.”
의심이 많고 인간을 얕보는 NPC.
마음에 들지 않는다.
플레이어에 따라서 대화 형식이 바뀌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단호한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
“너, 인간은 맞지?”
“보면 아시지 않습니까.”
“인간이 맞냐고 물었다.”
“…… 맞아요.”
블란트가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엘프 헬름으로 안내하는 것을 망설여 보인다.
스토리의 흐름대로라면 그냥 길을 안내해야 할 놈이 왜 이렇게 망설이는 거지?
한참동안의 고민을 마친 그가 대답했다.
“…… 그럼. 엘프 헬름으로 안내해주마. 뒤에 동료로 보이는 자들도 같이 가는 건가?”
동료?
뒤를 보니 차카니와 김연희가 멀뚱히 서 있었다.
김연희가 입을 쫘악, 찢어 웃으며 나를 보았다.
“…… 예.”
* * * * *
[엘프 헬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빌딩만큼 높은 나무들이 뿌리 내리고 있는 숲에 도착했다.
수박만 한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며 곳곳을 밝혔다.
나뭇가지의 굵기가 100년 넘은 소나무의 허리만큼 굵었다.
현실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엘프족 여성과 꽃미남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엘프족 남성들이 활발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조영기가 입을 떡 벌리고 그들을 보았다.
“우어….”
김연희가 손뼉을 쳤다.
“역시 엘프들이야!”
우월하다.
외관만 보자면 말이다.
기사단장 블란트의 안내를 따라 숲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구멍이 있는 거목(巨木)이 보였다.
입구에서 기분이 좋을 정도로 산뜻한 바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블란트가 걸음을 멈춰 섰다.
“안에는 여왕님이 계신다. 심기에 거슬리는 말은 하지 않도록 해라.”
“노력하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소란이 일어나면 너희들을 엘프 헬름에서 추방하도록 하겠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게 하시죠.”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왕좌에 앉아있는 엘프 여왕의 모습이 보였다.
은발에 백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장신의 엘프.
그녀가 우리를 보며 웃었다.
“블란트. 어서 오세요.”
블란트가 무릎을 꿇었다.
“여왕 폐하.”
“옆에 계신 분들은?”
“엘프 헬름에 찾아온 인간들입니다.”
“……”
“휴식을 위해 찾아왔다고 합니다.”
“현재 엘프 헬름에 있는 인간의 수가 어떻게 되나요?”
“열다섯 명입니다.”
“열다섯 명이라….”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늘을 날며 걷듯,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우리의 얼굴을 한 번씩 훑더니 내 앞에 멈춰 섰다.
“저는 엘프 헬름의 여왕, 샬로트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여왕이 입꼬리를 올려 나를 보았다. 두 볼이 발그스레한 것이 청초하다는 단어가 어울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설정 상 백 살이 넘을 텐데 엘프들은 굉장히 동안이구나.
“…… 반갑습니다. 저는 김천재입니다. 여기 옆에 꼬맹이는 김연희. 그 옆 대머리는 조영기입니다.”
샬로트가 조영기의 반짝이는 머리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조영기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관리를 주의했다.
“그렇군요…. 근데 천재 씨는 인간이 맞으신가요?”
생뚱맞은 질문.
그럼 내가 괴물로 보이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당신에게서 인간이 아닌 마의 기운이 느껴지는 군요.”
아까는 블란트 녀석이 어둠의 기운이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샬로트가 마의 기운이라 말하며 지목했다.
그들의 반응이 신경 쓰인다.
하긴 내 눈에도 보일 정도로 어두운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으니, 저 정도 엘프가 눈치를 못 채지는 않았겠지.
나는 손바닥으로 갑주를 툭툭 쳤다.
“이 어두운 기운은 제 몸이 아니라 이 갑주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갑주에서요?”
“예. 죽은 자의 힘을 담아 놓았거든요.”
“……”
“제 직업이 네크로맨서라, 죽은 자의 힘을 사용합니다. 어둠의 힘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악(惡)한 일은 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네크로맨서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블란트가 검을 뽑아 들었다.
샤캉.
“감히 네크로맨서가 신성한 엘프 헬름에!”
이런 대사가 있었나?
아니 그 전에 앞서 여왕 앞에서는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했던 놈이, 검까지 뽑아 들었다.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냐고? 네크로맨서가 이 숲에 들어오는 것은 금기. 내가 실수로 악의 근원을 들여보냈구나.”
네크로맨서가 엘프 헬름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처음 들어보았다.
설마 틀어진 스토리의 흐름 속에서 새로 생겨난 법칙인가?
나는 당황하지 않은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진정하시죠.”
“진정? 네크로맨서를 앞에 두고 어떻게 진정하지 않을 수 있겠-”
엘프 여왕이 손을 뻗었다.
지면에서 나무뿌리가 튀어나와 그의 검날을 휘감았다. 블란트가 놀란 눈으로 여왕을 보았다.
여왕이 그의 눈동자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블란트, 기다리세요.”
“여왕님….”
나는 해골 투구를 벗었다.
아이템의 효과로 몸에서 흘러나오던 검은 오라가 사그라들었다.
“김천재 님.”
“말씀하세요.”
“휴식을 위해 오셨다고요?”
“예. 절대로 이곳을 공격하거나 피해를 주러 온 것은 아닙니다.”
“…… 죄송하지만 엘프 헬름에는 네크로맨서가 들어올 수 없습니다.”
다들 왜 이러는 거지?
“여왕님, 제가 이곳에 머물 수 없는 이유라도 알 수 있을까요?”
“…… 듣고 싶으십니까?”
“예.”
샬로트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더니 말을 이었다.
“전쟁-. 네크로맨서는 이곳에 전쟁을 가지고 온다고 합니다.”
“…… 예?”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저희는 드워프라는 종족과 휴전 중입니다. 오시는 길에 평화의 망루는 보셨죠?”
[평화의 망루]
세계수를 중심에 두고 드워프 협곡으로 가는 길과 엘프 헬름으로 가는 길에 하나씩 있는 돌탑이다.
블란트를 처음 만난 곳.
“봤습니다.”
“그 망루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시나요?”
“…… 평화. 드워프와 엘프가 서로 싸우지 않기 위해 땅에 경계를 그어놓은 것이지요.”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럼 이렇게만 설명해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샬로트가 왕좌 옆에 있는 커다란 구슬을 가지고 오더니 내게 말했다.
“이 구슬은 엘프 헬름의 미래를 보여주는 신비의 돌입니다.”
“…… 그래서요.”
“직접 보여드리도록 하지요. 저희가 왜 당신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지를.”
로그인 더 아포칼립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