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성으로 돌아왔다.
문을 넘어오자, 성의 꼭대기 층이었다.
김정재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볼일은 끝났나?”
“그래.”
“강해졌군.”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그에게 말했다.
“게임이 끝났으니 가보지?”
“…… 건방져.”
“사돈 남 말하네.”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다.
곧 있으면 영웅이라 칭송받으며, 플레이어들의 희망이 될 놈이지만.
나는 놈의 진실을 알고 있다.
영웅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추악한 행동들을.
김정재가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놓았다 반복하더니 드래곤의 등을 손바닥으로 쳤다.
탁! 탁!
“김천재, 네 이름을 기억하도록 하지.”
“…….”
드래곤이 나를 슬쩍 보더니 도시의 북쪽을 향해 날았다.
다음 라운드로 넘어갈 수 있는‘멸망의 문’이 있는 곳이다.
바이러스의 단서가 시작되는 첫 번째 멸망의 문.
“…… 재수 없는 새끼.”
김정재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계단을 통해 밑으로 내려갔다.
한국군을 제외한 다른 국가의 군인들이 전부 도시 밖으로 워프 되었다.
내려가는 동안 아무도 나를 막지 않았다. 남아있는 일본 플레이어가 최후의 발악으로 덤빌 만도 한데, 그냥 텅 비어있었다.
“…….”
터벅. 터벅. 터벅. 터벅.
계속해서 내려가는 도중, 천장이 무너져 내려 막혀있는 계단이 보였다.
정우가 군키치와 한조를 막아선다고 했던 곳.
“이렇게 막았구나.”
나는 발로 힘껏 걷어차 막힌 길을 뚫었다.
쾅!
단박에 허물어졌다.
쏟아지는 먼지가 걷히자 아직도 전투 중인 마정우와 군키치가 보였다.
검술의 달인.
300인 베기의 군키치.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었는지 내가 보낸 스켈레톤 병사들을 전부 처리하고.
마정우와 동등한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같은 선상에서 싸웠다면, 정우가 이길 만도 한데.
앞서 왕천마와 대결하고 온 정우의 체력이 부족했나 보다.
숨을 벅차하는 게 보였다.
“김천재!”
“어어.”
“오…. 구했구나.”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이제 내가 할 테니, 좀 쉬어.”
“후우- 그래. 이 자식 생각보다 강하네.”
“수고했어.”
정우가 뒤로 물러났다.
군키치가 입술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더니 내게 물었다.
“한조는 어디 있지?”
“나도 모르지.”
진짜 모른다.
연기와 함께 사라져버렸으니 말이다.
“그놈이….”
나는 아무런 방어 태세 없이 군키치를 향해 걸어갔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
그의 거리 안에 들어오자, 검날이 번쩍였다. 무카이를 상대했을 때와 똑같다. 분명 검을 뽑지 않았는데 복부에 타격이 들어왔다.
칵!
검날이 갑옷을 긁는 소리를 내었다.
눈을 깜박이니 검날이 내 명치에 닿아 있었다.
“…… 그런 거냐.”
“뭐?”
“무카이라는 놈도 너와 같은 기술을 쓰더군.”
“…….”
“환영술. 환영이 먼저 움직이고, 본체가 3초 뒤 따라오는 기술이지?”
군키치가 검을 거두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스킬 이해도가 높은 놈이군.”
“이해도만 높은 게 아닐걸.”
“…… 뭐라고?”
나는 보란 듯이 양팔을 벌리고 그의 공격이 닿은 곳을 보여주었다.
지금 나는 능력치 공유와 아이템의 도움으로, 방어 능력치의 합이 100이 넘었다.
녀석의 힘으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을 정도의 방어력이다.
“어때? 네 공격은 내게 전혀 통하지 않아.”
“…….”
군키치가 눈동자 색이 순간 금색으로 변했다.
검객의 특성인 ‘신속(迅速)’스킬을 발동했다.
생명력과 마나를 동시에 사용하여, 위급상황에만 사용한다는 바로 그 특성.
급소를 노리려는 건가?
군키치가 복싱 선수처럼 스텝을 밟았다. 그가 움직이는 대로 잔상이 남았다. 그저 걷기만 했는데 발이 다섯 개로 보였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오러가 안개처럼 방안에 퍼졌다.
무엇을 보여 주려나 기대하고 있는데.
“…… 김천재. 다음에 만날 때는 네 목을 가져가도록 하마.”
“뭐?”
그가 창문을 향해 뛰어들었다.
다섯 개의 잔상이 동시에 움직여 진짜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발차기를 날려 놈을 막아 보았으나, 다섯 개의 잔상 중 내가 때린 것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와장창!
군키치가 도망갔다.
“너 이 개색!”
마정우가 배를 잡고 웃었다.
“크학학. 야! 김천재, 신속 쓰고 도망가는 놈을 어떻게 잡아?”
“하…. 참. 덤비는 줄 알았더니 도망을 가네.”
“죽기 싫었나 보지.”
“…… 뭐, 금방 만나게 될 테니.”
나는 정우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계단을 내려가는 길 쓰러져있는 이옥훈과 이옥한을 보았다.
동시에 승부를 결정지었는지 이옥훈의 심장에는 불꽃이. 이옥한의 이마에는 얼음 조각이 박혀 있었다
‘형제끼리 무승부라는 건가. ’
나는 괜스레 놈들의 머리통을 한 대씩 때린 후 밑으로 내려왔다.
다시 리바이브를 해볼까 생각했지만, 내게는 필요 없는 능력이라 그만두었다.
놈들이 차지하는 인구수가 아까웠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
아래층에 도착하자 무카이와 노다를 쓰러뜨린 차카니가 보였다.
유유자적한 얼굴로 창문 밖을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 다 끝났나?”
“…… 예. 정말 혼자서 다 끝냈네요?”
“혼자서? 아니지. 한 놈은 네 친구가 끝냈어.”
“내 친구?”
차카니가 창밖을 가리켰다.
피투성이의 마이클이 유소라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다.
“…… 마이클이?”
“그래, 저 까만 친구 사격 실력이 보통이 아니던데? 그나저나 그 갑옷…. 멋지다?”
이 갑옷을 기억 못 하나?
이쯤 되면 눈치챌 줄 알았는데.
“…… 게임 종료 메시지는 받았죠?”
“그래. 의뢰도 끝났으니. 제니를 받도록 할까?”
나는 손을 휘저었다.
“내려가서 드릴게요.”
“아아- 그래. 천천히 줘, 급한 것도 아니니깐.”
“예.”
PC게임이었다면 당장 달라고 달려들 놈이 여유를 부렸다. 마음의 안정이 왔다는 건가?
뭐-
나쁘지는 않네.
“정우야.”
“왜.”
“…… 배고프다.”
* * * * *
성 밖으로 나가자 한국 연합의 플레이어들이 나를 헹가래 쳐주었다.
-김천재 만세!
-구세주다! 이 사람이 우리들의 구세주야!
-자유를 가져다준다더니 정말로…. 김천재님 고맙습니다!
헹가래가 끝나자 김준철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김천재씨.”
“소령님.”
“수고하셨습니다.”
“뭘요. 도깨비 부대도 수고 많았습니다.”
[‘김천재’플레이어의 격려에 도깨비 부대원들의 사기가 증가합니다.]
김준철이 ‘정복자의 무덤’ 곳곳으로 군인들을 보내며 내게 물었다.
“저희는 이제 본부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시스템 메시지]
[정복자의 무덤에 배치할 군인의 인원을 선택합니다.]
[도깨비 부대 정원: 500명]
-100명
-200명
-400명
나는 제일 적은 숫자인 백 명을 선택했다.
굳이 내가 없는 곳에 많은 병력을 배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100명을 선택하셨습니다.]
지정한 군인들이 빠른 속도로 도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김준철이 내게 경례를 했다.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럼…. 다음에 또 만나도록 하지요.”
“…… 예.”
[네 번째 라운드 클리어]
[현 시간부로 ‘정복자의 무덤’ 내에서의 모든 임무가 끝났습니다. ]
[다음 도시로 출발해주시기 바랍니다.]
* * * * *
게임이 끝나자, 뜨거운 태양이 정복자의 무덤을 비추었다.
안개로 가려졌던 협곡의 밑 부분도 보였다.
나는 동물 군단을 이끌고 협곡 밑으로 내려가 몬스터들을 사냥했다.
고블린, 트롤, 오우거.
기본적인 몬스터지만 경험치 만큼은 일반적인 동물들보다 우월했다.
단 하루만의 사냥으로 그룹원 전체가 50레벨을 달성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자, 여기까지.”
나는 모든 동물의 소환을 취소한 후 사냥을 마친 트롤들을 내 밑으로 불러왔다.
[소환 목록]
-Ⓛ박규환(군인) 1/1 : 대기 중
-대호(동물) 1/1 : 대기 중
-X 바이러스 트롤(중급) 48/48: 대기 중
몬스터의 종류가 여럿이었음에도, 나는 트롤만을 밑에 두었다.
유소라는 내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천재 씨, 왜 트롤만 살려내시는 거죠?”
“트롤만이 가진 특별한 능력이 뭐죠?”
“어…. 높은 회복력?”
“맞아요, 자가 재생.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개체는 트롤이 유일하거든요.”
“아….”
“다섯 번째 라운드를 끝낸 후에 저희는 다시 ‘폐허가 된 마을’로 돌아가야 합니다.”
유소라가 윗 입술을 핥았다.
“그곳에서는 이벤트를 끝냈었잖아요?”
“…… 멸망의 땅은 그런 곳이에요. 먼 곳으로 떠나는 것 같지만. 결국,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는.”
유소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알아들은 척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설명해주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것이 편하니깐.
준비를 마친 우리는 성의 북쪽 길을 따라서 올라갔다.
다음 라운드로 이어져 있는 커다란 철문이 보였다.
거인족들이 지나다녀도 된다고 생각될 정도로 어마무시하게 높은 철문.
나는 그 앞에 서서 김리아에게 물었다.
“정말 안 따라올 거야?”
김리아가 방긋 웃었다.
“저는 여기 있을래요. 나머지 분들도 대부분 남기로 했고요.”
“흠, 여기 남는 것보다 다음 라운드로 가는 게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을 텐데.”
“…… 저는 다음에 이곳으로 오는 한국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뭐하러?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일 텐데.”
“…… 저희 가족이나 친구가 올 수도 있잖아요? 저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 기다릴래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사실 가족이나 친척이 이 안에 와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보았다.
어차피 가족이 없는 내게는 걸릴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친구라…… ’
김리아가 방긋 웃더니 말을 이었다.
“천재 씨.”
“말해.”
“이 게임에서 나갈 수는 있을까요?”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 미안하지만 그건 나도 확실하게 말해줄 수가 없어. 알고 있다면, 내가 먼저 나갔겠지?”
“…… 그렇군요.”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해. 이곳에 멈춰있지 않고 앞으로 가다 보면 새로운 것들이 보일 거야. 방금 네가 말한 게임에서 나가는 방법 또한 마찬가지고.”
“앞으로 나간다…. 죄송한데 저는 그냥 이곳에 남을래요.”
그녀의 거절을 끝으로, 나는 더 이상 우리 그룹의 합류를 권유하지 않았다.
아쉽지만 김리아는 이곳에 두고 가도록 하자.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있어서 데려가려 했는데, 아쉽다.
나는 한국 연합에 인사를 한 후 다음 라운드로 통하는 문을 밀었다.
[‘여는 자’의 힘이 발동합니다.]
끼이이이이익-
빌딩만큼 높은 철문이 가볍게 열렸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손을 뻗어 눈을 가렸다.
[시스템 메시지]
[다섯 번째 라운드로 통하는 문이 열렸습니다.]
절대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게임에서도 다섯 번째 라운드는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친했던 사람이.
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리 커우러나, 너는 여기 남아서 좀 더 수련하도록 해.”
리 커우러나와 그의 부하들이 내게 경례했다.
-알겠숨다!
나는 근처에 멀뚱히 서 있는 조영기에게 물었다.
“…… 차카니. 아니 조영기 씨. 가실 겁니까?”
차카니가 깨끗한 셔츠 깃을 세우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연하지.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엘프 헬름이 있는 곳인데.”
“…… 그럼 이번 라운드만 저희 그룹에 넣어 드릴까요?”
김연희가 손을 흔들었다.
“안 돼! 영기 아저씨는 벌써 우리 그룹에 들어왔어.”
“응?”
“나와 함께하던 사람들이 전부 죽어서. 영기 아저씨랑 같이 다니기로 했어.”
“…… 그래. 그럼 둘이 다니도록 해.”
조영기가 말을 이었다.
“나는 이 아이와 함께 다니도록 하지.”
“예. 그럼 이번 라운드도…. 서로 터치하지 않기로 하는 거예요. 알겠죠?”
“…… 알았다.”
나는 모두를 이끌고 다섯 번째 라운드로 통하는 입구로 들어갔다.
[‘별이 지는 언덕에 도착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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