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다나카 군키치.
자신의 검이 얼마나 강한지 확인해 보기 위해 민간인을 상대로 300인 베기를 했다는 미친놈이다.
“…… 둘이라 이거냐.”
“아니. 셋이다.”
“셋?”
우리의 등 뒤에서 로브를 입은 사내 한 명이 나왔다.
그가 후드를 걷었다.
“이 빌어먹을 조센징들. 드디어 잡게 되는구나.”
이옥훈.
“…… 셋이구나.”
군키치가 비열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푸하하! 여기까지 왔는데 안됐구먼.”
“그럼 셋인 거지?”
“……그래. 너희는 둘이냐?”
나는 코웃음을 쳤다.
“둘로 보여? 엄- 청 많은데.”
“허세 부리지 마라.”
“허세 아니야. 너, 내 직업이 뭔지는 알고 있지?”
그가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눈썹을 으쓱거렸다.
“네크로맨서.”
“빙고!”
성 밖에서 동물 울음소리가 들렸다. 정확하게 우리가 서 있는 곳의 벽면에서 말이다.
콰광!
기린 목이 벽을 뚫고 들어왔다.
-키에에에엑!
구멍을 통해 스켈레톤 자폭 병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이 신난 원숭이처럼 날뛰며 적들을 향해 달렸다.
“이런!”
군키치와 한조가 검을 뽑아 들었다.
이옥훈이 손에 차가운 기운을 모았다.
“아이스-”
기린을 타고 올라온 그의 동생 이옥한이 화염구를 날렸다.
“파이어볼.”
쿠궁.
나는 계단을 향해 달리며 마정우에게 소리쳤다.
“뒤를 부탁해!”
“알았다.”
마정우가 계단 앞을 막아섰다.
스켈레톤 자폭 병과 싸우던 군키치가 소리쳤다.
“안 돼, 저 새끼 막아!”
한조가 회오리처럼 몸을 빙글빙글 돌려 스켈레톤 병사들을 쳐내더니.
계단을 향해 뛰었다.
“비켜라!”
마정우가 계단 입구의 천장을 향해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늦었어, 임마.”
쾅!
계단으로 통하는 입구가 무너져 내렸다.
한조가 걸음을 멈추었다.
“제길!”
“우리 대장이 아까 그러던데. 정복자가 되는 순간 이 땅에 일본놈들의 발이 닿지 못하게 한다고.”
“…… 군키치. 나는 김천재를 추격하도록 하겠다.”
군키치가 스켈레톤 병사들을 상대하며 대답했다.
팍!
“빨리 가라. 절대 깃발을 꽂게 해서는 안 돼!”
한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린이 뚫어놓은 벽 밖으로 뛰어내렸다.
마정우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더니 군키치에게 말했다.
“너 혼자 나를 감당할 수 있겠어?”
“빌어먹을 조센징. 너 따위쯤이야 나 혼자서 가능하다!”
치직. 치지직.
쓰읍.
푸후-.
“그럼 들어와 봐. 네가 얼마나 나약한지, 보여줄 테니.”
* * * * *
다다다다다!
나는 성의 꼭대기를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유소라의 주사를 맞고 달려온 덕택에, 나를 가로막는 적들을 무시하고 피해올 수 있었다.
탕! 탕!
NPC의 총쯤이야 무시하고 달렸다.
플레이어가 사용하는 총이라면 상황이 좀 다르겠지만, 저들의 총 위력으로는 내 피부를 뚫을 수 없었다.
“멈춰라!”
한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들리는지는 모르겠는데 확실했다.
“까마귀 투입.”
성 근처에서 날고 있던 스켈레톤 까마귀들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와장창!
까마귀들이 내 옆으로 바짝 붙었다.
나를 보호하듯이 말이다.
“…….”
팟!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까마귀를 뒤로 배치했다.
-까아아악!
털썩.
까마귀 한 마리의 생명력이 순식간에 바닥나며 땅에 쓰러졌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저 망할 자식.”
이곳저곳에서 표창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내 달리기가 야생 동물에 가까운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놈을 따돌리지 못했다.
까마귀들이 하나 둘 씩 쓰러졌다.
마지막 까마귀가 쓰러졌을 때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남은 시간:3분]
‘이 계단만 올라가면 마지막 층인데.’
팟!
좌측 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이며 용의 송곳니를 휘둘렀다.
캉!
송곳니에 부딪힌 표창이 반짝이더니, 힘을 잃고 땅에 떨어졌다.
“나와라, 한조.”
놈이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을 끌려는 것이구나.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쳐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주변을 살펴보면서 말이다.
빨리 가야 하는데.
어디 있는 걸까.
신체적인 능력만으로는 절대 나를 따라오지 못했을 텐데.
닌자의 능력 중 나를 따라잡을 수 있는 스킬이 있었나?
잠깐이지만 수천 개의 닌자 스킬 중 몇 가지가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머리가 번뜩였다.
떠오른 스킬 중에서 지금 이 상황에 맞는 능력을 떠올렸다.
“…… 여기 있구나.”
나는 허리춤에 꽂아둔 식칼로, 나의 그림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쿵!
[‘그림자 이동’ 중인 플레이어를 찾아냈습니다.]
[무방비 상태의 적을 공격했기에 치명타가 들어갑니다.]
-크흑!
“역시.”
그림자가 대답을 해왔다.
“어…, 어떻게?”
“…… 경험의 차이.”
내 그림자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더니 손 하나가 튀어나왔다.
‘주사기?’
놈이 펜을 돌리듯 주사기를 빙글빙글 돌리더니 내게 말했다.
“……이건 너를 위해 준비한 물건이 아니라, 참도록 하지.”
“뭐라고?”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한조의 손이 다시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더니 쥐새끼처럼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삐빅.
시간을 확인한 나는 급히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성의 옥상에 도착하니 거대한 종과 함께 김정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정재(영웅)’님이 당신을 아니꼽게 쳐다봅니다.]
“역시.”
나는 말 없이 씨익 웃어 보인 후, 꼭대기로 이어진 짧은 계단을 올라갔다.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남은 시간: 1분]
“김정재.”
“말해라.”
“너는 ‘여는 자’를 싫어하지?”
“…… 그렇다고 해두지.”
“너를 이곳으로 보낸 자는 누구지?”
김정재가 드래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높은 곳에 있는 분.”
“높은 곳이라.”
“…… 마치,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구나.”
나는 깃발을 성 꼭대기에 꽂았다.
팍!
“알고 있을 수도. 그분한테 전해줘. 곧 찾아간다고.”
[현 시간부로 네 번째 라운드의 메인 이벤트가 종료됩니다.]
몸이 얼어붙었다.
도시 전역에 결계가 쳐졌다.
게임이 종료됐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김정재가 의미심장한 미소로 드래곤 위에 올라탔다.
“전해주도록 하지.”
나는 눈을 찡끗 감아 대답했다.
김정재가 성 위로 날아오르자, 시스템 메시지가 연이어 떠올랐다.
[승리 국가: 한국]
[정복자: 김천재]
[‘정복자의 무덤’의 주인이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 시간부로 이 도시의 주인은 한국 플레이어가 됩니다.]
[다음 게임까지 한국군이 성 내에 주둔하게 됩니다.]
피유우우웅-!
성 꼭대기에서 폭죽이 터져 올라갔다.
펑! 펑펑펑! 펑펑!
먹구름이 걷히며 빛이 도시를 밝혔다.
[정복자 김천재, 그 외 한국 소속 플레이어분들. 축하드립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우와아아아!
-야, 진짜 우리가 이 성의 주인이 된 거냐?
“그래 이 새끼야! 저, 저저 저 사람이 깃발을 꽂았다고!”
성내에 있는 일본군 NPC들이 하나둘씩 철수하기 시작했다.
행동에 제약이 걸려, 그들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도시 밖으로 나갈 때까지 지켜보는 것뿐.
일본군이 나가고 한국군이 성내를 지배하자 다음 메시지가 들려왔다.
[국가:한국 소속의 리더 플레이어인 김천재님께 특별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을 선택해주십시오.]
1.국가 소속 모든 플레이어에게 축복 아이템을 전달한다.
2.같은 그룹에 속한 플레이어와 함께 황금 아이템을 받는다.
3.나 혼자 정복자의 아이템을 갖는다.
“…….”
전부 아니다.
나는 시스템 화면의 제일 밑 부분을 긁듯이 흔들었다.
복권의 은색 부분이 모습을 드러내듯, 글자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4. ‘정복자의 무덤’에 입장한다.
나는 기쁨에 들떠 웃었다.
“선택. 4번.”
[선택지 4번]
[‘정복자의 무덤’에 입장하겠습니다.]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눈앞에 빛이 번쩍이더니 어두운 공간에 도착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했다.
손을 뻗어 허공을 저어 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왔지만 익숙했다.
이곳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눈을 감고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이 안에서는 칠흑 같은 어둠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인다.
계속해서 걸어가다 보니 나를 막아서는 벽이 느껴졌다.
나는 두 손을 뻗어 그 벽을 밀었다.
끼익. 끼이이이익!
빛이 흘러나왔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눈이 부시다고 느껴졌다.
[‘여는 자’가 정복자의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과거의 정복자가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길을 선택해주십시오.]
-동쪽으로 간다.
-서쪽으로 간다.
-남쪽으로 간다.
-북쪽으로 간다.
여기서 나오는 보상은, 미리 알 수 없다. 정해진 기간에 따라서 계속해서 바뀌니깐.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어느 곳으로 가야 내가 원하는 보상이 있는지.
세 번째 라운드에서 네 번째 라운드로 넘어오기 직전, ‘천사 동상’에 동전을 던져 받은 힌트.
“그래….”
「서쪽에서 떠오르는 태양과 동쪽에서 다가오는 밤이 그대를 날아오르게 한다.」
선택지는 서쪽과 동쪽.
태양과 밤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 밤.’
나는 첫 번째 선택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시스템에 대답했다.
“동쪽으로 간다.”
쿠구구구구구.
땅이 제자리에서 온몸을 비틀 듯,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동쪽으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새로운 정복자는 앞을 향해 나아가주십시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황금 길이다.
양옆에는 천사와 악마의 싸움 장면이 벽화로 그려 있었다.
외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무덤이 하나 보였다.
그 앞으로 황금빛의 보물 상자가 있었다.
과거, 이곳의 초대 정복자가 사용하던 아이템 중 하나가 들어있는 상자.
[정복자의 보물이 잠들어 있습니다.]
[상자를 여시겠습니까?]
[YES/NO]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노.”
[정말 보물 상자를 열지 않겠습니까?]
“예스.”
보물 상자가 빛을 내며 사라졌다.
이 게임의 최상급 아이템 중 하나로 뽑히는, 정복자 아이템이 들어 있는 상자가 말이다.
“뭐….”
다른 플레이어가 보면 미친놈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저 아이템이 필요 없었다.
아니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더 좋은 걸 얻기 위하는 과정이었다.
이 게임의 고수인 정우도 모르는, 나만이 알고 있는 선택지.
[선택을 마친 플레이어는 방에서 나가주십시오.]
쿵.
무덤 뒤로 돌문이 열렸다.
성의 꼭대기 층을 통해 있는 문이다.
“잠깐. 아직 선택이 안 끝났어.”
나는 관의 앞으로 다가갔다.
미라가 나올 것 같은 오래된 관이었다.
[‘초대 정복자’의 유골입니다.]
[조사하시겠습니까?]
[YES/NO]
“예스.”
끼이이익.
관이 열렸다.
안을 들여다보니 백색의 붕대를 감은 미이라가 들어있었다.
PC 버전에서도 여기까지 온 플레이어는 단 하나.
나뿐이었다.
대부분은, 정복자의 아이템을 받고 이곳에서 나가니깐.
“으…. 냄새.”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코를 부여 막고 유골 위에 손을 올렸다.
“리바이브.”
[‘초대 정복자’의 유골이 빛을 발합니다,]
관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새 생명을 얻은 ‘초대 정복자’가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미이라가 벌떡 일어났다.
우득우득 소리와 함께 스켈레톤 병사를 만들어 내듯, 뼈가 제자리를 찾아가 맞춰지며 자리를 잡았다.
[과거 검성이라 불리던 사나이, 초대 정복자 ‘태양의 기사 가웨인’이 당신을 따릅니다.]
나는 조립되는 뼈를 향해 말했다.
“너는 이제 태양의 기사가 아니다. 내 밑에서 움직이는 어둠의 기사.”
가웨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를 이제부터 데스나이트라 부르겠다. 네 혼과 몸은 이제부터 전부 나의 것.”
가웨인이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조립을 마친 미이라에 어디선가 날아온 검은 갑주들이 달라붙었다.
캉! 캉캉!
그의 갑주 중앙에는 십자가가 아닌 네크로맨서의 상징, 역십자가 붙어 있었다.
부웅-
바람 소리와 함께 마지막으로 해골 투구가 날아왔다.
투구를 쓴 가웨인이 몸을 떨었다.
“…… 완벽해.”
나는 완성이 된 가웨인에게 다가갔다.
[데스나이트 가웨인(검성)을 당신의 수하로 두겠습니까?]
[YES/NO]
이 게임 안에서는 소수의 영웅급 소환수가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성기사 가웨인.
이 자만 있으면 사실상 ‘*최고의 소환 수’를 둔 것이나 다름없다.
척준경과 같은 급의 소환 수.
나는 호흡을 길게 내뱉으며 가웨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 No.”
파란 화면이 내 눈앞을 가득 메웠다.
[시스템 오류]
[알 수 없는 오류가 발생하여 오류가 있는 시스템 코드 ‘Character:Gawain’ 폴더를 삭제하였습니다.]
[‘멸망의 땅’ 운영진이 당신의 선택에 놀라움을 표합니다!]
처음에, 실수로 이 선택지를 골랐을 때는 정말이지 미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선택지가 후에 내게 가져다준 힘을 생각하면….’
와르르르르!
가웨인의 뼈가 무너져내렸다.
그가 입고 있던 갑주가 땅에 쏟아졌다.
“…….”
터벅. 터벅. 터벅. 터벅.
나는 정우에게서 받은 코트를 집어 던지고. 땅에 떨어져 있는 가웨인의 방어구를 하나씩 입었다.
[데스나이트의 부츠를 착용합니다.]
[데스나이트의 갑옷을 착용합니다.]
[데스나이트의 장갑을 착용합니다.]
몸이 무겁다.
전신에 쇠붙이를 입고 다닌다는 게 이렇게 힘든 것인 줄 몰랐다.
가웨인이 남긴 갑주를 착용하던 나는 마지막으로 투구를 들었다.
“…… 멸망의 땅, 이제 시작이다.”
[데스나이트의 투구를 착용합니다.]
눈에서 검은 안개가 흘러내렸다.
“크윽!”
갑자기 온몸이 쑤셔왔다. 텍스트로 표기되던 죽음의 고통이란 게, 이런 것인가.
빨래 물기를 짜듯이 내 몸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허억.”
신음이 절로 나왔다.
정신이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고막은 찌릿했다. 갑자기 어둠이 찾아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됐다.
나는 숨을 천천히 내쉬며 고통을 참아냈다.
“후우….”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갑주가 고무장갑처럼 내 몸에 딱 맞게 붙어 있었다.
고통은 점차 사라졌고.
갑옷은 가볍게 느껴졌다.
“…… 끝난 건가.”
시력과 청각도 돌아왔다.
이어 고개를 들어보니 검은색 메시지창이 하나 떠 있었다.
[데스나이트 세트(SSS): 모든 능력치 +50/ 히든 특성 개방]
[죽음의 기사 특성이 활성화됩니다.]
-타락한 검성의 혼이 날아다니며 착용자의 수하들에게 어둠의 기운을 나누어 줍니다.
“…….”
나는 이렇게 최고를 포기하고.
최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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