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중국의 리더가 오러를 발산했다. 백색의 밝은 빛이 그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일반적인 플레이어가 내는 힘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다시 한 번 명령했다.
“꺼지라고 했다.”
“어디 감히 소국의 플레이어가 내게 그런 말을 하는가?”
소국?
“X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뒤지기 싫으면 꺼지라고.”
“그 입 닥쳐라. 지금까지 숨어만 있던 한국 놈들이 왜 이제 와서 성을 노리는 거냐.”
“내가 이제 왔으니깐.”
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전에는 내가 이곳에 없었고. 이제는 내가 있다고.”
“너 하나로 게임의 판도를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말하마. 전부 뒤지기 싫으면 빨리 꺼져.”
푸른 도포의 사나이가 도검을 빼내어 들었다.
스으윽.
“이름이 뭐지?”
“김천재. 너는?”
“왕천마.”
천마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중국 서버에서 유일무이한 절대강자라고 불리던 플레이어.
마도(魔道) 왕천마.
그도 이곳에 왔구나.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기회는 끝났다. 이제 돌아가지 않으면 싸우는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싸울 수밖에.”
“……머리 조심해라.”
부웅-
성 쪽에 창 하나가 날아왔다.
캉!
왕천마가 가볍게 막아냈다.
“김천재, 내게 덤비는 것을 후회하도록 하게 해주지.”
나는 웃어 보였다.
“고맙군.”
“덤벼라.”
“파리 잡는데 호랑이가 나설 필요가 있나?”
“……뭐라고?”
유소라가 마정우의 팔뚝에 주사를 놓았다.
노란 액체가 정우의 몸으로 들어갔다.
[‘마정우’님이 ‘유소라’ 플레이어로부터 누른 피를 수혈받았습니다.]
[옥황상제의 호위 무관이자, 권렴대장의 자리에 있었던 금신나한(金身羅漢)의 힘이 활성화됩니다.]
[활성화 시간: 30분]
마정우가 고개를 꺾어 뼈 소리를 내었다.
“마정우, 부탁한다.”
“맡겨둬.”
왕천마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리석은 놈. 겨우 네놈이 나를 상대하겠다는 건가?”
“허허.”
부웅-
마정우의 도끼날이 반짝였다.
캉!
천마의 검이 맞부딪쳤다.
“네가 왕천마구나. 한번 싸워보고 싶었는데.”
“……싸워보고 싶었다고?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그래. 너 혹시 한국 플레이어 중 야만 전사의 우두머리가 누구인 줄 알고 있냐?”
“……혹시 네놈이.”
마정우가 씨익 웃었다.
“반갑다. 너를 꼭 죽이고 싶었는데 기회가 왔네.”
용쟁호투(龍爭虎鬪).
굉장히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일반 플레이어는 끼어들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전투.
오러를 사용할 줄 아는 천마와 금신 나한의 힘을 부여받아 인간의 속도를 뛰어넘은 마정우.
둘의 날붙이가 부딪칠 때마다 공간이 흔들리는 것처럼 파동이 생겨났다.
캉!
그들이 싸우는 동안 나는 본래의 작전을 진행했다.
“진격해라.”
리 커우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부하가 코뿔소를 이끌고 성으로 향하는 중국 플레이어를 공격했다.
이어 한국 플레이어들이 코끼리를 앞장세워 성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쿵! 쿵! 쿵! 쿵!
-뿌우우우우!
한국 플레이어들이 코끼리 뒤에 숨어 적들을 조준 사격했다.
성의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일본군과 등을 보이고 있는 중국군.
탕! 탕탕!
적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우리 측 저격수를 발견한 적군이 총과 마법을 사용해봤지만, 방어력이 높은 코끼리에게 막혔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
-코끼리 뒤로 더 바짝 붙고, 창문에 고개 내민 녀석들부터 쏴라!
-이… 이렇게도 싸울 수 있구나.
놀이공원의 서커스단이 행진하듯 우리는 성 앞까지 가볍게 도착했다.
코뿔소가 육중한 몸으로 몸통 박치기를 해, 중국 방패 전사 무리를 뒤집어 놓았다.
스트라이크에 성공한 볼링공이 핀을 날려버리는 것처럼.
전사들이 날아갔다.
-으아아악!
-누가 저 코뿔소 좀 막아봐.
적군의 사제들이 신성 주문을 외우자. 하이에나가 달려가 그들을 물어뜯었다.
-컹컹!
“이건 또 뭐야!”
콰직!
“악!”
중국인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들을 상대하던 일본인들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나는 크게 소리쳤다.
“앞길을 막는 자는 전부 죽여라!”
성 앞을 정리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 소환수의 숫자가 워낙 많은데다가, 개개인의 능력치가 높아 일반 플레이어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사, 살려주십시오!
-왕천마! 전사의 행렬이 무너졌습니다. 사제들이 하이에나에게 잡히고, 궁수와 마법사들도 한국군에게 하나 둘 씩….
중국 플레이어가 반절 정도 쓰러지자.
왕천마가 마정우와의 싸움을 멈추었다.
“빌어먹을 자식들.”
“뭐해, 안 덤비고.”
“……이 싸움은 일곱 번째 라운드로 미루도록 하지.”
“뭐? 도망가려는 거냐?”
“도망이 아니다. 너희들의 비겁한 행동에 잠시 자리를 피하는 것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비겁? 삼국이 적인데 뒤를 치는 전략에 성공한 것이 왜 비겁하지?”
“……다음에는 정정당당하게 정면 승부로 붙도록 해라.”
나는 중지를 들었다.
“이거나 잡수세요.”
왕천마가 눈을 질끈 감더니 땅을 박차고 높이 날아올랐다. 그가 깃발을 머리 위로 흔들어 병사들에게 후퇴 신호를 주었다.
부관으로 보이는 자가 왕천마의 신호에 맞춰 크게 소리쳤다.
-철수! 철수!! 이번 게임은 포기하도록 한다!
외침을 들은 중국 플레이어와 중국 소속 군인들이 성 밖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모두 후퇴하라!
오합지졸이라 생각했는데, 명령이 떨어지자 생각보다 빠르게 행동에 옮겼다.
리 커우러나가 그들을 향해 소리치며 따라갔다.
“중국인들을 죽여라!”
* * * * *
중국군이 물러나자 성 앞이 깨끗해졌다.
일본과 우리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서로 공격은 하고 있지 않지만 금방 싸울 것 같은 상태.
우리 저격수들이 성의 창문을 조준했다. 놈들이 조금만 고개를 내밀더라도 바로 쏴버리도록 말이다.
[남은 시간: 49분]
한 시간도 안 남았다.
나는 동물들을 일자로 세워놓았다.
“김준철 소령님.”
“예.”
“제가 신호하면 하이에나를 따라서 진입해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정우야, 너도.”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분들은 적군이 성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이곳을 지켜주세요. 모두 알겠습니까?”
한국 연합에 속한 플레이어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예!
나는 하늘을 날고 있는 스켈레톤 까마귀들을 보았다.
놈들이 김정재 근처에서 빙글빙글 날아다니고 있었다.
‘김정재….’
나는 까마귀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들이 천천히 하강하며 성의 벽면으로 붙었다.
까마귀의 위치를 확인한 나는 주먹을 쥔 후 머리 위로 빙글빙글 돌렸다.
“김천재, 뭐 하는 거냐?”
“신호.”
“무슨 신호?”
“악귀들을 부르는 신호.”
“……악귀?”
“어. 악귀.”
[‘김정재’님이 김천재님을 주의 깊게 바라봅니다.]
까아아아아악! 까아악!
뼈로 된 까마귀들이 우리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스켈레톤 중급 조합 중 하나이다.
까마귀 위에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고블린들이 타고 있었다.
나무 방패와 단검을 들고 있는 그들이 전투를 갈망하는 듯 기괴한 소리를 내었다.
-키에에에엑!
-쿠허어얼!!!
정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 설마 협곡에 있는 고블린들까지 소생시켰냐?”
“어, 나가는 길에 감염체에 들켜서 까딱하면 죽을 뻔했는데. 저놈들 시체 덕분에 살았어.”
마정우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하늘을 보았다.
“운도 좋네.”
까마귀들이 빠르게 낙하하며 공중제비를 돌더니 고블린들을 성벽에 떨어뜨렸다.
-키에에에엑!!
팍!
고블린들이 벽을 타고 올라가 성의 창문으로 들어갔다.
탕! 탕탕!
안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나는 대호 목에 달린 목줄을 강하게 당기며 소리쳤다.
“기린 투입!”
기린이 천천히 앞으로 다가가 목을 뒤로 꺾더니.
부웅-
성의 2층을 향해 강하게 내리쳤다.
쾅!
벽이 뚫렸다.
자그마한 스켈레톤 병사들이 기린의 목을 다리 삼아 빠르게 타고 올라갔다.
두두두두두-!
“키얏호!”
“키에에에!”
“캬아아악.”
식칼을 들고 있는 자그마한 스켈레톤 자폭병.
그들이 안으로 투입되자 성의 이곳저곳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콰광! 쾅! 쾅!
“코뿔소 부대!”
코뿔소가 성의 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둥! 둥! 둥! 둥!
리 커우러나의 부하들이 치는 북소리가 그들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
[‘코뿔소’의 이동 속도가 증가합니다.]
쿠웅-!
나무로 된 성문이 흔들렸다.
코뿔소의 뿔로 박은 곳에 구멍이 났다.
네 마리의 코뿔소가 순서대로 계속해서 성문을 박았다.
쿠웅-! 쿠웅-!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 성문이 반으로 갈라졌다.
“코뿔소 후방으로.”
코뿔소가 후방으로 빠졌다. 이어 저격수들의 방패막이가 되어 몸을 은폐할 장소를 만들어 주었다.
“코끼리 전방으로 이동.”
코끼리가 앞으로 나갔다.
공격이랄 것도 없이, 그냥 코를 크게 휘둘러 성문을 쳤는데.
쾅!
단방에 문이 박살나며 무너졌다.
“진입한다!”
하이에나들이 뛰어 들어갔다.
김준철의 도깨비 부대와 한국 연합이 하이에나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탕!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이 총을 쏘았다.
그들의 앞으로 두 명의 검객이 서 있었다.
무카이와 노다.
“빌어먹을 조센징들.”
“맞아! 저 조센징들을 죽여야 해 형.”
나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돌격했다.
“차카니!”
내 뒤에서 차카니가 달려왔다.
“어스 웨이브.”
지면이 파도를 치며 놈들을 덮쳤다.
쿠구궁.
“가라. 이곳은 내가 맡도록 하지.”
“믿고 맡겨도 되는 거지?”
조영기가 윙크했다.
“껌이다.”
“마이클! 차카니를 돕도록 해!”
마이클이 권총을 꺼내었다.
“오케이.”
나는 김준철과 마정우를 데리고 그대로 계단을 통해 올라갔다.
곳곳에 일본군들이 포진해 있었다. NPC라서 그런지 지능이 높지는 않았지만, 실력은 준 플레이어라고 둘러도 될 정도로 뛰어났다.
김준철의 도깨비 부대가 앞장서서 놈들을 막았다.
“천재씨. 여기는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예. 그럼 끝나고 다시 뵙도록 하죠.”
“조심하십시오.”
나는 그대로 달렸다.
깃발만 꽂으면 이 게임은 끝이 난다. 조금만 더 서두르자.
쉬익-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송곳니를 휘둘렀다.
팍!
“……표창?”
송곳니에 날붙이가 스쳐갔다. 날아온 방향을 보니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자가 서 있었다.
“또 보게 되는군.”
“……한조냐.”
“범상치 않은 놈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긴 한데. 여기까지 올 줄이야.”
“네 모습이 더 범상치 않은 것 같은데.”
한조가 끽끽거리며 웃었다.
“네놈에게 당한 상처가 아직도 욱신거린다.”
“그때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여우 같은 놈.”
“호랑이한테 여우라니. 원숭이 주제에.”
한조가 검을 뽑았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되지 않을 것이야.”
“오- 자신감이 넘치는데? 근데 미안해서 어쩌냐. 나는 시간이 없어서 먼저 가봐야겠는데.”
시간을 보니 게임 종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저놈을 상대할 시간은 없다.
“정우야.”
“……알았어.”
“시간만 좀 끌어줘. 깃발만 꽂으면 되니깐.”
“이번에는 늦지 마라.”
“응.”
한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를 지나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우리?”
“그래.”
그의 등 뒤, 그림자에서 남성 한 명이 더 나왔다.
깍두기 머리에 군복을 입고 있는 중년이었다.
“안녕하신가 여러분. 나는 군키치라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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