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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조영기가 지도를 어루만지며 내게 말했다.

“네 작전은 너무 위험해.”

“이 도시에서는 어디에 있어도 위험해요.”

“아니, 나는 어차피 메인 이벤트에서 이기지 않아도 다음 라운드로 넘어갈 수 있어. 굳이 놈들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거지.”

우리와 스토리의 흐름이 다르다.

보상을 포기하고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는 말이다.

나는 무심한 얼굴로 담뱃불을 붙이며 그에게 물었다.

치직. 치지직.

쓰읍.

푸후-

“……아까 무카이와 노다라는 놈들한테 복수하고 싶지 않으세요?”

“기회가 된다면. 하지만 내 목숨을 걸면서까지 싸우고 싶지는 않아.”

“아까는 그놈들 잡으러 감옥까지 따라갈 기세더니, 이제 와서 왜 그래요?”

“지금은 제정신이잖아.”

뭐라는 거야?

횡설수설하는 게 PC게임 속에서 만났던 차카니와 똑같다.

이럴 때 어떻게 했더라….

아!

차카니하면 떠오르는 단어.

돈.

게임 내에서 그가 돈에 집착하던 몇 가지 일들이 생각났다.

평소에는 얌전하기만 하던 그가, 돈을 분배할 때만큼은 철저하고 냉정하게 대화하던 차카니.

나는 그 점을 이용해서 제안해보았다.

“영기 씨, 그럼 이렇게 합시다. 무카이와 노다만 당신이 맡아주세요. 성공 보수로 만 제니 드리도록 하죠.”

“만 제니?”

“예. 일시불로 드리도록 할게요.”

“……그 두 놈만 없애주면, 만 제니를 준다는 건가?”

“예. 절대 나쁜 거래는 아닐 거에요.”

어둡던 조영기의 표정이 밝게 변하였다.

게임 속 차카니는 자본주의 체계에 흠뻑 젖은 자였다.

이득이 있는 곳에만 가는 플레이어.

그렇다면 현실의 조영기도 그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차카니는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만 제니라…. 만 오천 제니는 어때?”

“아, 됐어요. 그냥 가세요.”

“응? 왜? 만 오천 제니에 적장 두 명. 적절한 거래 아닌가? 보통 놈들이 아닌데.”

“만 제니면 충분한 놈들이고. 어차피 놈들은 이번 이벤트가 끝나면 다음 라운드로 넘어간다고 했어요.”

“…….”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녀석들을 살려두면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될 텐데. 과연 누구한테 불이익이 오려나….”

조영기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내 손목을 잡았다.

“그럼 만 제니. 그 두 녀석을 잡아 주도록 하지.”

“……거래 성립.”

* * * * *

밤이 찾아왔다.

이곳까지 일본, 중국 플레이어들이 찾아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더 이상의 밀정은 없었다.

나는 건물의 옥상으로 마정우를 불러냈다.

“정우야. 뒷일은 네가 알아서 할 수 있지?”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라.”

“괜히 무리해서 어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뒤지지 말고.”

“너나 죽지 마세요. 도시 안에 있는 우리는 안전하지.”

“안전하기는 개뿔. 온통 적밖에 없구만.”

내 머리 위에서 황금색 빛이 한 바퀴 돌았다.

이로써 12번째.

“또 렙업이냐?”

“어.”

“지금 몇인데?”

“사십. 너는? 너한테도 어느 정도는 경험치가 갔을 텐데.”

“삼십삼. 사냥터에 둔 소환 수들은 전부 살아있고?”

“어. 한 마리도 안 죽었어.”

“좋네.”

우리는 불빛이 반짝이는 성안을 둘러보았다.

점심부터 시작된 일본과 중국의 전투는 저녁이 넘어서야 끝났고.

결국, 잠깐이지만 중국인 플레이어들이 감옥 탈환에 성공했었다.

서쪽과 동쪽에 있는 중국 포로들이 풀려났으니.

이제 앞으로 벌어질 삼파전의 승리자가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게 됐다.

모두의 전력은 비슷하다.

그렇다면 이제 승패의 결과는 내 손안에 달렸다.

“그럼 나 먼저 출발한다.”

“그래. 몬스터 조심하고.”

나는 아지트에서 나와 성 밖으로 향했다.

현상 수배가 걸려 있어 일본 NPC의 움직임이 좋지 않을 것을 고려해서 성의 뒷구멍을 찾았다.

적들의 눈을 피해 성의 동쪽으로 이동하자 성벽에 기대어 있는 남성이 보였다.

나뭇잎을 입에 물고 있는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던지듯이 말했다.

“밖으로 가고 싶나?”

[‘입출입 브로커’가 당신에게 제안합니다.]

[예/아니오]

동쪽, 성의 부서진 틈새를 이용해서 플레이어들을 밖으로 안내하는 NPC.

“아니오.”

“응? 너, 밖으로 나갈 것도 아닌데 여기는 왜 온 거지?”

“나갈 건데.”

“그럼 내 안내를 따라서-”

“안내는 필요 없다. 꺼져.”

“…….”

나는 NPC를 밀어버린 후 갈라진 틈 사이로 몸을 옮겼다.

어차피 이곳의 길은 전부 외우고 있기에 놈의 안내 따위는 필요 없었다.

틈으로 들어가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사실 계단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진흙과 돌덩이를 대충 뭉개어 만든 받침이었지만.

여기서는 계단이라 표현한다.

갈라진 틈으로 들어가 반대편으로 나가자 안개 낀 협곡이 나왔다.

[‘안개 협곡’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공기가 차가워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쉬리리리릭. 쉬리리리릭.

소리의 주인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곤충 같기도 하고 동물 같기도 하고.

정체는 모르지만,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하고 멀어지도록 움직였다.

조용히.

협곡 밖으로 나갈 때까지 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움직여야 한다.

들키면 끝이니깐.

나는 최대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며 협곡을 따라 올라갔다.

-쿠웨에엑!

몬스터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콰직. 와드득. 콰득. 우드득.

무언가를 씹는 소리다.

바위 뒤에 숨어 납작 엎드리니 놈들이 보였다.

고블린으로 보이는 몬스터가 세 마리. 전부 Z 바이러스에 감염된 듯 살점이 썩어있었다.

동족을 잡아먹는 것으로 보아 많이 굶주린 것이 확실했다.

‘…… 잡히면 죽는다.’

몬스터를 보는 것에 적응된 줄 알았는데, 또다시 가슴이 뛰어왔다.

다만 죽음이 무섭지는 않았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키엑? 키에에엑.

-쿠웨엑.

-쿠웩!

놈들이 대화를 주고받듯 서로를 보며 기이한 소리를 내었다.

이어 개처럼 킁킁거리며 땅의 냄새를 맡았다.

‘뭐지?’

나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온다.

설마.

냄새로 나를 찾았나?!

* * * * *

<성 밑 지하 감옥>

Z 바이러스에 감염된 중국인 플레이어들이 감옥에서 발버둥을 쳤다.

일본 플레이어들이 그들을 보며 낄낄거렸다.

“야, 이 년 침 흘리는 것 좀 봐.”

“이 새끼는 어때? 어제 주사 놓은 놈인데 완전히 맛이 갔어.”

“푸하하!”

뚜벅. 뚜벅. 뚜벅. 뚜벅.

흰 가운에 안경을 낀 원형 탈모의 남성이 들어왔다.

일본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구 박사님.”

“어어 그래그래. 다들 잘 있었나.”

“예.”

“오오- 귀여운 내 아이들도 잘 있었구만.”

구 박사라는 자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중국인들을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서쪽 감옥하고 동쪽 감옥은 중국놈들이 점령했었다면서?”

“……예. 금세 저희가 재탈환했으니 걱정하지 마십쇼.”

구 박사가 턱을 쓸었다.

“좀 있으면 메인 이벤트가 시작되는데,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서야….”

“아마 놈들도 그곳에 있는 실험체들을 봤으니 절망에 빠졌을 겁니다.”

“하긴. 구하러 갔는데 전부 좀비가 되어 있으니 깜짝 놀랐을 거야?”

“맞습니다. 정복 이벤트를 준비하려고 탈환하러 온 것일 텐데. 같은 편이 전부 좀비로 변해있다? 푸하하하! 일그러진 놈들의 표정이 그려지네요.”

모두가 배를 잡고 웃었다.

“허허- 그렇지 그래. 어차피 그 감옥에 있는 자들은 전부 실험이 끝나서 협곡에 버릴 놈들이었잖아?”

“예. 신기하게 실험체들을 그곳에 버린 후에는 놈들이 공격해오지 않으니까요.”

“흐음…. 혹시 바이러스가 섞였나?”

구 박사가 담뱃불을 붙이더니 좀비들을 향해 뿜었다.

“귀여운 놈들. 네놈들 덕택에 실험에 성공하게 되었어.”

“X 바이러스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마 다음 라운드에 도착할 때쯤 해서 전부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오….”

-키에에에엑!

감옥 안에 있는 좀비 플레이어 한 명이 손을 뻗었다.

구 박사를 잡아보려 했지만 거리가 멀었다.

구 박사는 담뱃불로 놈의 손등을 지지며 껄껄 웃었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누군가 계단을 내려왔다.

-한조님!

-추, 충성!

-안녕하십니까 한조 대장님.

온몸에 붕대를 둘러매고 있는 남성이었다. 닌자 복장은 온데간데없고 온몸을 흰 붕대로 감고 있었다.

“박사님. 성에 오실 때는 연락을 주시라니까요.”

“허허- 자네가 다쳤다기에 그냥 혼자 움직였네.”

“이곳은 좀비들이 갇혀 있는 곳이라 자칫 잘못하면 위험합니다.”

“……그렇지. 그래도 자네만큼 위험한 곳에서 움직이는 자가 있겠나? 우리를 위해 온몸을 다해 희생하는데 말이야.”

한조가 손짓하자 다른 플레이어들이 자리를 피했다.

“박사님. 연구가 완성되었다는 게 정말입니까?”

“그래.”

“……제가 제일 먼저 그 주사를 맞을 수 있을까요?”

구 박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가? 아직 자네가 맞을 정도로 안전한 단계는 아니네만.”

“어차피 다음 라운드로 넘어가면 놈을 만나게 됩니다.”

“……‘암살자 고티’를 말하는 건가?”

사이코 한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 상태로는 놈과의 정면승부에서 이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번 라운드에 계속 지체하다가는 놈이 멀어질 것이고요.”

“……그럼 자네도 어느 정도는 각오를 해야 하네. 잘못되면 전부 내 탓이 될 수 있으니 말이야.”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구 박사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흰색 가운 안에 있는 주사기 하나를 꺼내어 넘겨주었다.

보라색 액체가 들어있었다.

“여기 있네. 성공확률은 70프로. 그 말은 즉 실패 확률도 30프로는 된다는 거네.”

“성공해도. 실패해도. 어차피 강력한 힘은 얻는 것 아닙니까?”

“그래. 하지만 실패할 때는 자네 정신이 날아가 버릴 거야. 말 그대로 괴물이 되는 거지.”

한조가 알고 있었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위급 상황에서만 쓰도록 하지요.”

“그리고… 이 일은 나는 모르는 것으로 하겠네. 주사기는 자네가 내 연구실에서 훔쳐 간 것으로 해주게나.”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군키치 녀석이 이 주사기를 계속해서 찾았거든. 놈에게 주지 않으려 들고 다녔는데, 자네에게 준 거야.”

“……걱정하지 마십쇼. 이 일은 전부 제가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 * * * *

박사와의 대화를 마친 한조가 군키치를 찾아갔다.

성의 제일 위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군키치가 여성 플레이어들과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깍두기 머리에 근육질의 몸을 가진 남성이었다.

그가 안고 있는 여성들을 양옆으로 밀어내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어, 한조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보입니까?”

한조가 붕대로 묶여있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괜찮지는 않은가 보군요.”

“최대한 빠르게 낫게 하려고 치유 붕대를 감아놓기는 했는데. 상처가 생각보다 깊은 것 같습니다.”

“……놈들이 그렇게 강한 적이었습니까?”

“아뇨, 방심했었습니다.”

한조가 의자에 걸터앉더니 여성 플레이어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다.

군키치가 아쉬운 표정으로 그녀들에게 윙크하며 인사했다.

“또 봐, 자기들!”

“군키치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까 중국인들의 습격이 있을 때. 나와 붙었던 조센징 중 한 명을 찾았었다고 하던데?”

“……예.”

쾅!

한조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근데 왜 놈들을 그냥 돌려보냈습니까? 무카이와 노다 정도면 놈을 상대할 수 있었을 텐데요.”

“진정하시죠. 어제는 놈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서쪽 감옥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했었습니다.”

“뭐요?”

“잘 생각해보십쇼. 어차피 놈들은 정복자 이벤트 때 우리를 찾아 공격 올 겁니다.”

“…….”

군키치가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 처리해도 되지 않습니까?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는 법이고. 아까는 서쪽 감옥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했습니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놈을 잡는 것 보다. 서쪽 감옥이 더 중요했다? 이 말입니까.”

“……솔직히 그렇습니다. 이번 중국인들이 습격할 때. 빨리 모여서 막지 않았으면 피해가 굉장히 컸을 겁니다.”

“…….”

“한조님. 복수는 다음 라운드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부하들이 먼저가 되는 작전을 펼쳐주시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쾅!

한조가 의자를 걷어차듯 일어나더니 문밖으로 나갔다.

군키치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망할 새끼….”

다다다다다다!

일본군 NPC 한 명이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 들어왔다.

“구, 군키치님!”

“뭐? 또! 또!! 또!!! 무슨 일이야?”

“보고드려도 되겠습니까?”

“기분 안 좋으니까 빨리 말해.”

“그… 북쪽 감옥이….”

“북쪽 감옥이?”

“조센징들에게… 기습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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