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병영 근처>
꽃무늬 셔츠를 입은 거구의 대머리.
조영기가 주문을 외웠다.
“그라운드 웨이브(Ground Wave).”
지면이 물결을 치며 파도처럼 일렁였다.
콰과과광!
그를 쫓아오던 일본 군인들이 균형을 잃고 쓰러지며 신음을 뱉었다.
조영기가 자신을 쫓아오는 적들에게 중지를 치켜올렸다.
“빌어먹을 자식들! 그만 따라오라고!”
그를 쫓아가고 있는 자들은 일본군인 NPC.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어떠한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 군인들이 상처를 입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그를 추격했다.
탕! 탕!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들렸다.
조영기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골목으로 도망갔다.
“어스필드(Earth Field).”
땅에서 기둥이 솟구쳐 올라 골목을 막았다.
쫓아오던 일본 군인들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멍하니 기둥을 보았다.
-뭐, 뭐야 이건?
-저 녀석 마법사였어? 생긴 건 건달 같은데!
-빌어먹을 조센징. 꼭 잡아 죽여!
조영기가 골목의 반대편으로 달렸다.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이 흘러내렸다.
골목의 밖으로 나가자.
수십 명의 일본 군인이 총구를 들이댔다.
철컥. 철컥철컥.
그들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남성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먼저 입을 땐 것은 사무라이 복장을 하고 있는 남성.
이마에 초승달 마크가 있었다.
“흐헤헤헤! 무카이형, 저 녀석 표정 좀 봐!”
그의 대답하는 사무라이 복장의 남성.
무카이라 불리는 남성의 이마에는 그믐달 마크가 있었다.
“크하하! 그래 노다야, 저 새끼 완전 놀랐구만. 어이 건달뱅이. 우리가 여기 있을 줄 몰랐지?”
조영기가 차오르는 숨을 가라앉히며 적의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무카이가 검을 뽑아 들었다.
샤캉.
“뭐 하는 거냐? 조센징.”
“…… 조센징?”
“그래, 조센징.”
“너희 둘은 NPC가 아닐 텐데. 왜 칸고쿠가 아니라 조센징이라고 부르는 거지?”
무카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내 마음이지.”
“…… 그래. 마음대로 불러라.”
“하하…. 그래서, 네놈은 왜 우리는 공격한 거지?”
조영기가 무카이의 행동을 따라 하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내 마음이지.”
“뭐? 이게 장난치나….”
“장난으로 보였어? 너희 병사가 꽤 죽었을 텐데.”
무카이의 이마에 핏대가 올랐다.
동생으로 보이는 노다가 앞으로 한 걸음 나와 형에게 말했다.
“형. 저 녀석은 내가 처리할게.”
“…… 같이 하자.”
“왜? 굳이 우리 둘 다 나설 필요 없을 것-”
“저 녀석. 보통내기가 아니야.”
“…… 응?”
무카이가 옷의 앞 지퍼를 열어 가슴에 난 손바닥 자국을 보여주었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보여? 스쳤는데 이렇게 됐어.”
“…… 헐.”
“얕보면 당한다. 정신 똑바로 차려.”
“…… 알았어.”
노다가 검을 뽑아 들었다.
둘 다 일본도 형태의 검을 쥐고 있었다.
조영기는 그들을 경계하며 도망갈 곳이 있는지 둘러보았다.
벌써 수십 명의 일본군이 포진해있어 정상적인 루트로는 도망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무카이와 노다가 검을 앞세워 천천히 걸어 나갔다.
조영기가 주먹을 꽉 쥐더니 둘에게 말했다.
“무카이, 노다. 너희 둘 다 언젠가는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무카이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지금 죽을 놈이 무슨-.”
“과연 그럴까?”
“입은 살았구나. 앞. 뒤. 양옆이 막혀있다. 도망갈 길이 없는 것을 알 텐데?”
“…… 길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하는지 아냐?”
“뭐?”
조영기가 옆의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길이 없으면 만드는 거야. 일차원적인 생각밖에 못 하는 멍청한 놈들아.”
[어스 스피어(EarthSpear)]
조영기의 손에 돌로 만들어진 창이 쥐어졌다.
밀렵에 쓰는 창이라기보다는 과거 유럽의 기병들이 사용했던 랜스라 불리는 무기와 비슷했다.
조영기가 랜스를 높이 들어 벽을 향해 휘둘렀다.
콰광!
벽이 무너져 내렸다.
조영기는 벽을 무너뜨린 랜스를 그대로 무카이에게 던졌다.
부웅-
바람을 가르는 랜스가 무카이에게 정면으로 날아갔다.
무카이가 검을 휘둘러 돌창을 막아냈다.
캉!
빛이 번쩍이며 창이 튕겨 나갔다. 무카이도 손에 충격이 있었는지 손목을 꺾어서 풀었다.
“제길. 이 여우 같은 놈.”
“나를 여우에 비교해주다니. 고맙군.”
조영기가 얄미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벽 안으로 뛰었다.
무카이와 노다가 달려가 보았지만, 그는 벌써 사라진 이후였다.
무카이가 독백했다.
“조영기….”
* * * * *
<정복자의 무덤, 성 내부>
간호사 여럿이 사이코 한조에게 달라붙어 붕대를 감았다.
적에게 당한 상처가 깊었는지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치유 주문을 사용할 수 있는 직업군이 세 명이나 달라붙었는데도 말이다.
한조가 걱정 어린 숨을 내뱉었다.
똑. 똑. 똑.
심기가 불편한 한조는 짜증 섞인 말투로 노크에 응답했다.
“누구냐.”
문밖에 있는 자가 대답해왔다.
“군키치 입니다.”
“…… 들어오십시오.”
끼이이이이익.
쿵.
장군 복장을 하고 있는 남성이 한조에게 가볍게 경례했다.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하는 인사라기보다는 그저 군인들끼리 서로 존중을 뜻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한조 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예. 금방 다 나을 수 있을 겁니다.”
둘 다 서로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존중해야 하는 혹은 존중하는 관계임이 틀림없었다.
한조가 상체를 일으켜 세워 그에게 물었다.
“김천재 일행은 잡았습니까?”
군키치가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쥐새끼 같은 놈들. 잡기는커녕 저희의 남쪽 감옥을 털어갔습니다.”
“예?! 감옥을요?”
“예. 그 안에 갇힌 한국인 플레이어들을 빼갔습니다.”
한조가 다급하게 아픈 몸을 일으켜 세우며 군키치에게 말했다.
“그 새끼들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제가 직접 처리하도록-”
군키치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진정하세요. 벌써 사라져버린 데다가 저희 쪽에서 추격하고 있습니다.”
“…… 놈들을 죽이지 않으면 제 분이 풀리지 않습니다. 다음 라운드로 넘어갈 준비도 전부 끝냈는데….”
“모두 노력하고 있으니 곧 잡힐 겁니다. 그때까지 휴식을 취하도록 하시죠.”
한조가 답답한 듯 간호사를 시켜 창문을 열었다.
쏟아지는 비가 바람을 타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자 한조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쓰읍- 하-
“…… 잡혀야 할 텐데요.”
“한조 씨, 다음 게임까지 앞으로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아니지, 정확하게 따지자면 엿새 남았어요.”
“…… 거기까지만 말씀해주셔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생명력과 체력을 아껴 두었다가 그때 써라. 이 말이죠?”
군키치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굳이 한조 씨가 나서지 않아도 그 일당은…. 저희가 알아서 처리해놓겠습니다.”
* * * * *
성 끝에 있는 한 폐건물.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2층짜리 조그마한 주택.
그 안으로 한국인 플레이어가 한둘씩 모였다.
몬스터가 사는 곳이라고 불릴 만큼 허름한 장소.
걷는 곳마다 거미줄이 쳐있고.
발밑이 삐걱거렸으며.
벽에는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김연희가 투덜거렸다.
“아 왜 이런 곳에 있어야 하는데!”
나는 건물 안을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다행이지. 싫으면 다른 곳을 찾아보도록 해. 아마 찾기 전에 일본 놈들한테 잡히겠지만.”
“…… 됐어.”
“모두 집 문은 닫지 말도록 하세요. 외관이 평소와 다르면 적에게 의심을 살 수 있습니다.”
-예!
우리는 제일 안쪽의 방만 사람이 살 수 있을 정도로 치워놓고 휴식을 취했다.
물론 우리 중 몇은 경계 근무를 섰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라 하여도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지기는 하니깐 말이다.
“…… 뭐지?”
쿵! 쿵!
땅이 울렸다.
집 안에 있는 우리에게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큰 굉음과 함께 말이다.
나는 창밖을 확인했다.
이 근처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보니 성의 서쪽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어 건물 위로 뛰어다니는 주황색 무술복을 입은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소림사도 아니고 왜 다들 저런 복장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플레이어가 확실했다.
머리 위에 해골 문양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 중국 플레이어?’
-끼얏호!
-한조가 못 움직이는 상태라면서? 모두 날뛰어라!
-감옥을 탈환해!! 우리 동포들에게 자유를!
기습도 아니고 대놓고 쳐들어갔다.
성의 서쪽 건물 대부분이 주황색으로 보일 정도로 많은 수의 플레이어였다.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하기도 전에 저렇게 힘을 뺀다고?
뭐-.
우리야 좋다.
중국과 일본이 서로 싸워 힘을 빼놓는다면 우리로서는 땡큐다.
“…… 야. 마정우!”
땅에 누워 졸고 있던 정우가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뭐, 뭐야. 왜?”
“이 상황에서 잠이 오냐….”
“왜? 무슨 일 있어?”
“중국 플레이어가 일본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어. 창밖 좀 봐.”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
주황색 무술복을 입은 중국인들이 개미처럼 서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뭐야, 저 새끼들?”
“기회야.”
“응?”
“차카니를 데려올 기회.”
“…… 오케이. 그 말이구나.”
나는 유소라를 불렀다.
“소라 씨.”
“예? 예!”
“주사 좀 준비해주세요. 정우와 저한테 한 방씩 놔주시면 돼요.”
“어떤 주사로 놔드리면 될까요?”
“…… 둘 다 붉은 주사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소라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문을 외웠다.
이어 만들어진 주사를 내게 놓아 주었다.
치이이익.
빨간색 액체가 천천히 내 몸 안으로 들어왔다.
몸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힘이 끓어오르며 숨이 빨라졌다.
혈관이 피부 표면을 뚫고 나올 듯 팽창해졌다.
운동을 마친 상태의 몸처럼 근육들이 부풀어 올랐다.
[‘유소라’ 플레이어로부터 붉은 피를 수혈 받았습니다.]
[화과산(花果山) 꼭대기 거석의 영기를 받은 제천대성(齊天大聖)의 힘이 활성화됩니다.]
[활성화 시간: 30분]
정우 또한 나와 같은 주사를 주입 받았다.
우리 둘의 몸이 운동 후에 펌핑된 것처럼 근육이 팽창했다.
“후우- 좋아, 그럼 가보도록 할까.”
“다른 사람들은?”
“여기를 지켜야지.”
“우리 둘만 싸우러 간다는 거지?”
“어, 왜? 겁나?”
마정우의 두 손이 떨렸다.
“…… 아니. 너무 신나서!!!”
그가 고릴라처럼 두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며 환호했다.
“마정우, 앞으로 30분이다.”
“알았어. 너도 조심하도록 하고.”
“…… 그래.”
우리는 창밖을 다시 한 번 살핀 후 밖을 향해 뛰었다.
팟!
정우와 내가 서로 다른 방향을 잡았다.
허벅지의 근력이 향상되어서 그런지 뛰었다는 표현보다는 날았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높고 멀리 갈 수 있었다.
단번에 반대편 건물을 넘었다.
쿵!
내가 착지한 건물의 옥상이 울렸다.
나는 목을 길게 내밀어 병영 근처를 둘러보았다. 적들의 움직임을 살핌과 동시에 숨을만한 장소를 본 것이다.
‘차카니가 있을 만한 장소….’
찾았다.
“저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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