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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한국인 플레이어가 모여있는 아지트에 도착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숨어 지내느라 여건이 좋지 않은 곳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하 끝에 있는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입구와는 전혀 다른 곳이 나타났다.

철컹.

“리아야, 수고했다.”

와인바라고 생각될 만큼 근사한 술집이 나왔다.

크기만 하더라도 백 평, 아니 그 이상 되어 보였다.

우리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콧수염 남성이 철문을 닫았다.

철컹.

“당신들이 이번에 도착한 한국인 플레이어입니까?”

내가 대답했다.

“예. 오늘 도착했습니다.”

“그렇군요. 리아랑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는지요?”

김리아가 콧수염 남성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저씨. 앉아서 이야기해요.”

“…… 알았다.”

우리를 의심한다는 표정.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외부인에 대한 경계가 삼엄한 것 같다.

이 방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가 우리를 째려보니 말이다.

서른…. 여섯 명.

정말 적구나.

김리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VIP룸 이라고 적혀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원형의 큰 테이블을 두고 우리가 앉았다.

털썩.

나는 먼저 이야기를 열었다.

“불교 밑에 이런 곳이 있네요?”

콧수염 남성이 대답했다.

“비밀 장소. 도적 직업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열 수 있는 장소입니다.”

내가 모르는 사실이었다.

멸망의 땅에서 내가 모르는 것도 있나?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는데.

필요 없는 잡지식들은 기억하지 않았다.

이곳은 분명 중요한 장소가 아닐 것이다.

“그렇군요. 아참, 리아씨랑 어떻게 만났냐고 했었죠?”

“…… 예.”

“도시에 처음 도착했을 때 리아씨가 골목에서 튀어나왔어요.”

“리아가…?”

“예. 인사를 하고 곧장 쓰러져서. 저희 숙소로 데려와 치료했습니다.”

콧수염 남성이 김리아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한국 연합의 리더를 맡은 정하균이라고 합니다.”

콧수염 남성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마주 잡으려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자 살기가 느껴졌다.

살쾡이같이 생긴 정하균의 눈빛이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나를 믿지 않는다는 눈빛.

그들이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모르겠지만 살벌하다.

“…… 김천재입니다.”

“김천재? 이름이 멋지군요. 천재라니.”

김리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저씨! 이분이 사이코 한조를 제압했어요!”

“…… 뭐? 사이코 한조를?!”

안에 모인 한국인 플레이어들이 수군거렸다.

-저 사람이 사이코 한조를 제압했다고?

-말도 안 돼…. 우리가 다 같이 덤벼도 이길 수 없던 놈이잖아?

-에이 구라겠지. 말로는 뭔들 못해?

-뭐라는 거야. 그럼 리아가 거짓말했겠냐? 와…. 저 사람 엄청난 분이었구나….

나는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곳의 상황 좀 알 수 있을까요?”

“…… 어떤 상황이 알고 싶으신 겁니까?”

“뭐…. 저희가 아직 정보를 모으지 못해서. 이번 라운드의 메인 게임이 언제 시작되는지부터 알고 싶은데요.”

정하균이 한쪽 눈썹을 들썩거리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었다.

치직. 치지직.

쓰읍.

푸후-

“다음 게임이 언제 시작되는지요?”

“예. 알아야 참전할 수 있으니까요.”

“A 코스를 선택하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하균이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우리 그룹원들을 한 명씩 쳐다보았다.

대답이 없자 김리아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아저씨! 뭘 그렇게 뜸을 들이고 그래요? 다음 게임은 앞으로 열흘 후에 시작돼요.”

열흘?

리 커우러나가 이곳에 도착하는 날이다.

생각보다 날짜가 좋지 못하게 맞아떨어지는구나.

나는 잔에 담긴 얼음물을 마시며 정하균에게 물었다.

“하균 씨.”

“말하세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이 안에 스파이가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정하균이 말없이 눈을 껌뻑였다.

나는 그의 눈을 보며 그대로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제가 할만한 질문이 아닌 것 같기는 한데.”

“……”

“대놓고 저희를 너무 경계하시니 기분이 좋지 않아서요.”

네 번째 라운드에서 승리하려면 이들과 같이 행동해야 한다.

오해가 있다면 빨리 풀자.

정하균이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마시더니 천천히 내뱉으며 나를 응시했다.

“후우-. 우선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리아를 살려주신 은인인데 제가 실례를 저질렀군요.”

“아뇨. 밀정이 있다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어떤 이유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는데. 우선 결론만 말하자면 맞습니다.”

정하균이 자리에서 일어나 VIP실 밖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안에 배신자가 있습니다.”

“…… 아직 찾지 못했고요?”

“예. 서로 서로 의심하는 중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정하균이 피우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구겨 넣더니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었다.

굉장히 오래되어 보이는 구식 권총이었다.

“무기. 일주일 전 외부 플레이어로부터 무기를 받기로 했었는데, 그날, 그 장소, 그 시간에 맞춰 일본군들이 거래 장소를 기습했습니다! 어떤 빌어먹을 새끼가 정보를 흘린 건지 모르겠지만….”

“무기를…?”

“예. 앞으로 열흘 후에 시작될 네 번째 라운드의 메인 게임. ‘정복자의 귀환’에 쓸 무기입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전쟁에 쓸 무기라는 말씀이시죠?”

“예.”

“그 무기는 누구한테 받기로 했었는데요?”

“…… 죄송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직 거기까지 말할 정도로 저희는 친해지지 않은 것 같네요.”

정우가 유리잔을 손가락으로 튕겨서 엎었다. 엎어진 얼음물이 테이블 위에서 땅으로 쏟아져 내렸다.

“어이. 당신, 우리를 믿지 않는다면 떠나도록 하지.”

정하균이 끌끌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우리에게 등을 보였다.

“여기서 떠나면? 그다음에는 어디로 가실 건지요.”

정우가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일어났다.

쾅!

“어디든.”

“밖은 일본군들이 눈에 불을 켜고 한국 플레이어들을 찾고 있습니다. 중국 플레이어 또한 마찬가지고요.”

“전부 죽이면 돼.”

“그 정도 실력이 되시나요?”

“…… 보여줄까?”

둘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나는 정우의 어깨를 눌러 앉힌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둘 다 진정하세요. 저희는 이곳에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눈치를 보던 김리아가 손바닥을 크게 휘둘러 정하균의 등을 내리쳤다.

찰싹!

“아저씨! 뭐하는 거예요?”

“아악…. 너야말로 뭘 하는 거냐?”

“저를 구해준 사람들이라니깐! 그리고 새로 온 플레이어들을 그렇게 대할 거면 왜 연합을 만들었어요?”

“……”

“연합을 깰 생각이에요?”

정하균이 섭섭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아니다….”

“저 성 다시 안 뺏을 거냐고요? 저번 게임에서 저희 그룹이랑 아저씨 그룹원들 다 죽었던 거 기억 안 나요? 복수 안 할 거예요?”

“……”

“나갈 거면 아저씨가 나가요. 저희는 뭉칠 거니깐.”

정하균이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 미안하다.”

“뭉쳐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왜 싸우고 난리람…. 천재 씨 미안해요.”

나는 씨익 웃으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그럼 이야기를 마저 하도록 할까요?”

* * * * *

마이클과 유소라가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다.

정하균과 사이가 틀어진 정우는 도시를 수색한다며 밖으로 나갔고.

나는 정하균과 함께 지도를 보며 그들의 작전을 들었다.

“여기서, 여기까지. 기회는 단 한 번.”

“…… 메인 이벤트가 시작되는 날 놈들이 전부 성 앞으로 나온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네 번째 같은 이벤트를 반복 중인데. 항상 똑같았습니다.”

“네 번? 그럼 일본 플레이어들이 네 번이나 성을 먹은 거예요?”

정하균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리아가 말한 사이코 한조. 그 새끼가 다음 라운드로 넘어가지 않고 이곳에서 계속해서 대기하고 있으니. 저희 발이 묶여버렸습니다.”

“…… 사이코 한조라는 플레이어가 이벤트를 완료했는데도 이곳에 계속 남아있다는 거죠?”

“예.”

“이유는 알고 계신가요?”

알면서도 물어보았다.

한조가 다섯 번째 라운드로 넘어가지 않고 이곳에 머무는 이유.

아마도 ‘제니’ 때문일 것이다.

정복자 국가에 소속되면 성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을 일주일에 한 번씩 배당하니깐.

돈을 모아 다섯 번째 라운드에서성장하려는 놈의 전략.

너무도 뻔했다.

그래도 나는 그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국가의 리더 정도 실력이면 세금을 걷는 시간에 퀘스트나 사냥을 해서 제니를 모으는 것이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정하균이 연필로 지도를 끄적이며 내게 말했다.

“돈. 아니, 제니 때문입니다.”

빙고.

“제니를 모으느라 이곳에 있다는 거죠?”

“예.”

나는 책상에 턱을 괴며 정하균에게 물었다.

“저 정도 실력자면 사냥을 해서 모으는 편이 훨씬 빠를 텐데요. 왜 굳이 이 도시에서 버티고 있을까요?”

“…… 일본 플레이어들이 이곳의 성을 처음 먹은 그 날. 그러니깐 넉 달 전. 놈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인 플레이어가 있었습니다.”

“…… 그래서요?”

“지금 상태로 다음 라운드에 간다면. 놈에게 당할 거라 생각 돼서 움직이지 않는 것일 겁니다.”

적국에 있는 플레이어가 무서워서 움직이지 않는다.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겁먹은 거네요?”

“예. 그만큼 강한 플레이어였으니까요.”

“…… 강하다는 플레이어가 어느 국가 소속이었나요?”

“한국이었습니다.”

“예?! 근데 성을 못 먹었어요?”

정하균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 새끼…. 아니 그 사람. 저희와 같이 움직이기 싫어하더군요.”

“응?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자기는 스토리 흐름의 B를 선택했다면서 싸우기 싫다고 했습니다.”

망나니라는 단어가 내 뇌리를 스쳐 갔다.

“…… 별 이상한 놈이 다 있네.”

“맞습니다. 그 사람이 여기 지내는 동안 싸운 것이라고는, 펍에서 술을 마시다가 사이코 한조랑 붙은 것이 끝입니다.”

“전장에는 참가하지 않았고요?”

“예.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나서지 않았어요. 약한 자는 죽기 싫으면 다음 라운드로 오지 말라나 뭐라나….”

같은 국가 사람이라면 도울 만도 한데 말이야….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 예. 저희에게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메시지를 남기더군요.”

“메시지? 그건 또 뭔가요.”

“이 중에 누군가가 오면 다음 라운드로 오라며 메모를 남겼어요.”

“…… 그 메모 좀 볼 수 있나요?”

“잠시만요. 여기 어디에다 뒀는데….”

정하균이 자켓 안 주머니에서 수첩 하나를 꺼내더니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넘겼다.

팔락. 팔락.

“아 여기 있네요. 읽어 드릴까요?”

“…… 예.”

나는 컵에 담긴 물을 마시며 그의 말을 들었다.

“고인물. 명닉진. 지군. 차카니.”

푸웁-!

내가 물을 뿜었다.

“뭐라고요?”

“예?”

“아니. 다시 읽어주세요.”

“…… 고인물. 명닉진. 차카니. 지군.”

나. 정우. 조영기, 그리고 아직 만나지 못한 지군.

총 네 명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그 말인즉슨 우리 전부를 알고 있는 플레이어라는 것.

나는 조심스럽게 정하균에게 물었다.

“혹시. 다녀왔다는 플레이어 이름이…?”

정하균이 수첩을 닫더니 자켓 안 주머니에 넣었다.

“어…. 사람 이름은 아니고. 닉네임으로 말해 주었습니다.”

“닉네임이 뭐죠?”

“…… 고티. 암살자 고티 라고 했습니다.”

* * * * *

비가 멈추었다.

그럼에도 ‘정복자의 땅’을 가리고 있는 먹구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정우가 어두운 골목을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살폈다.

두두두두두두.

말이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땅이 울릴 정도였으니 한두 마리는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골목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밖을 보니 일본군들이 상점과 집들을 수색하고 있었다.

-어이 영감. 이렇게 생긴 놈들 못 봤어? 못 봤다고? 그럼 죽어!

탕!

미친놈들.

모른다고 했을 뿐인데도 플레이어와 NPC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흔들고 있는 현상 수배서를 보니 김천재 그룹원들의 얼굴이 그려 있었다.

마정우가 이를 꽉 깨물고 놈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일본군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야비한 웃음을 보이며 소리쳤다.

“모두에게 전달한다. 한국 또는 중국 플레이어 발견 시 발포를 허가한다. 모두 죽이도록!”

-하이잇! 그럼 노예는 더는 필요 없으십니까?

“그냥 죽여라. 뭐…. 여자와 아이 정도는 살려두어도 괜찮겠지. 심심할 때-.”

탕! 탕탕!

성 위에서 총성 세 발이 울렸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갑자기 일본군 플레이어들이 성 위에 있는 깃발을 보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빰- 빠밤- 빠라바라 밤!

웅장한 악기 소리가 성 전역에 울려 퍼졌다.

NPC들이 자동으로 무릎을 꿇고 그곳을 보았다.

플레이어들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NPC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성 꼭대기의 욱일기.

그 밑으로 설치된 확성기에서 한조의 목소리가 나왔다.

-성내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전한다. 현 시간부로 한국 플레이어를 사냥해서 오는 자에게는 한 명당 십만 제니의 현상금을 걸도록 하겠다.

십 만 제니.

현금으로 계산하자면 일 억 원이다. 물론 계산이 무의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국 플레이어 목에 큰돈이 걸렸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다시 한 번 전파한다. 한국 플레이어 한 명당 십만 제니. 녀석들의 아지트를 발견할 경우 백만 제니를 주도록 하겠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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