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대호(大虎)
동물원에서 보던 일반적인 시베리아 호랑이가 아니다.
무게는 그 두 배 이상이요. 크기는 코뿔소라고 불러도 될 만큼 거대했다.
놈의 날카로운 발톱이 반짝였다.
내가 대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작게 속삭였다.
“리바이브.”
박제되어 있던 놈의 몸이 조금씩 움직였다. 눈알이 돌아가고, 발가락들이 꿈틀거렸다.
눈꺼풀을 깜빡이자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대호를 노려보며 그대로 명령했다.
“앉아.”
녀석이 온순한 고양이처럼 엉덩이를 내려앉았다. 서커스 무대에서 묘기를 부리는 호랑이처럼 말이다.
“잘했어.”
※ 신규 영입: 대호(大虎)(동물)
레벨: 21
생명력: 5040/5040
마나: 0/0
체력: 65 공격: 44
방어: 36 속도: 80
▶포효(咆哮) (마나 소모: 0)
-소환 주를 제외한 모든 이의 움직임을 1초 동안 멈추게 만듭니다.
▶출혈(出血) (마나 소모: 0)
-대호에게 공격당한 상처는 회복할 수 없습니다. (지속시간: 180분)
제니를 너무 많이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든든한 놈을 곁에 두게 되었다.
경매장 밖으로 나온 나는 폐허가 된 마을로 돌아갈 채비를 하였다.
마이클이 허리춤에 있는 수통을 거꾸로 들어서 털더니 내게 말했다.
“천재 킴.”
“왜?”
“너무 더운데 시원한 거 한 잔만 마시고 가면 안되겠슴니까? 이대로 간다면 죽을지도 모른다.”
“…… 그럼 요 앞 카페테리아에서 음료수 한 잔씩 마시고 갈까?”
“베리 굿!”
하긴 열대 지역인 중앙 평원을 다시 가로질러 가려면 수분을 보충하고 가는 게 좋겠지.
나는 경매장 앞 카페테리아에 방문하여 야외 테라스 자리를 찾았다.
대호 녀석의 덩치가 너무 커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식물 카페라고 해도 될 정도로 잘 정리된 꽃과 나무들이 카페 앞을 가득 메웠다.
‘저 사람은….’
백발의 노인.
폐허가 된 마을에서 보았던 검객이다.
혼자 시원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못 본채하고 중앙으로 들어가 종업원에게 음료수를 시켰다.
“마이클 돌아가는 길에는 대호 타고 돌아갈 수 있으니깐 덜 힘들 거야.”
“동물을 타고 간다고? 노우! 동물 학대!”
“그럼 넌 걸어와.”
마이클이 눈알을 굴렸다.
“…… 대호는 점비. 점비는 동물 아니다.”
“이 새끼가 제멋대로 해석하네….”
단발머리에 귀엽게 생긴 종업원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우리 테이블에 가져다주었다.
“맛있게 드세요!”
우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천천히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눈에 거슬리는 놈이 내 시선에 들어왔다.
“…… 뭔데.”
해골 갑주를 입은 네크로맨서다.
밖에서 서성이던 놈이 은근슬쩍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끼이이익.
내 앞에 의자를 빼내더니.
털썩.
대뜸 앉아 내게 말을 걸었다.
“어이.”
노란 올백 머리에 실눈.
얍삽하게 생겼다.
나는 대답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의자를 돌려 앉았다.
내가 먼 곳을 바라보자 놈이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똑. 똑. 똑.
“왜 대답이 없어?”
호로로록.
“말 못 해? 벙어리야? 내가 안 보여?”
호로로로록.
그가 씨익 웃더니 내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 너. 척준경 찾으러 여기 왔지?”
척준경.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을 테이블에 강하게 찍어 내렸다.
쾅!
“너였냐?”
“그래. 보여 줄까? 어이 척준경!”
놈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농구선수만큼 큰 키에 검은 갑주로 무장한 남성이 서 있었다.
야수 같이 생긴 얼굴에 수많은 상처.
놈이 카페테리아 밖에서 대답했다.
“부르셨습니까.”
걸걸한 목소리다.
동굴에서 말하는 것처럼 울림통이 컸다.
해골 갑주를 입은 네크로맨서가 신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보이지?”
“…… 자랑하려고 온 건가?”
“아니. 교환하려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교환?”
“그래 교환. 너 저기 있는 대호, 나한테 팔 생각 없나?”
“…… 없어.”
호로로록.
“조건도 안 들어보고?”
“…… 척준경과의 일대일 교환이면 받아들이도록 하지.”
“그건 안 되지. 우리 준경이가 더 높은 등급의 소환수인데. 대신 내가 우귀랑 천 제니 줄게.”
좀비 하우스의 숨겨진 소환 재료인 우귀.
저 녀석이 먼저 가지고 갔구나.
나는 석연찮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우귀를 가지고 있나?”
놈이 방긋 웃었다.
“어.”
“…… 네 이름이 뭐지?”
“나? 왜?”
“아직 통성명도 안 했잖아.”
해골 갑주의 네크로맨서는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기 싫은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다 마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잠깐만. 내 이름은 이량훈. 이량훈이야.”
“이량훈? 나는 김천재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잠깐만 기다리라고. 그럼 우귀에다가 이천 제니 얹어줄게. 이 정도면 괜찮은 거래 아니야?”
나는 척준경을 검지로 가리켰다.
“저놈과의 일대일 거래. 그것 말고는 대호를 거래하지 않아.”
이량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 그건 무리라는 걸 너도 알고 있잖아?”
“그럼 거래는 없다.”
눈치를 보던 마이클이 잔에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빠르게 마시더니 나를 따라 일어났다.
이량훈이 내 앞길을 손을 뻗어 막았다.
“기다려.”
나는 놈을 내려보며 말했다.
“왜?”
“…… 거래로 가져가지 못한다면. 실력으로 가져가도록 하지.”
“뭐?”
“너를 죽여서라도 저놈을 가져가야겠다고.”
미친놈.
경성 한복판에서 싸우자는 건가?
카페 안을 보니 우리보다 강한 플레이어들이 많았다.
괜한 싸움을 했다가는 둘 다 죽게 될 것임을 알고 있을 텐데.
“그럼 중앙 평원으로 나와. 여기는 눈이 많아.”
“아니. 거기 네 동료가 더 있으면 어쩌려고? 나는 여기서 승부를 봐야겠는데.”
“뭐?”
“이 대 이. 동등한 조건에서 싸우자고.”
2:2?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놈과 같은 그룹원으로 보일 만한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다.
플레이어 여럿이 우리 주위 테이블로 모였다. 싸움이 난 것을 눈치채고 도둑들이 모이는 것 같았다.
“여기서 싸우는 건 위험하다고. 승자가 없을지도 몰라.”
“글쎄. 그건 해봐야 알겠지.”
“…… 멍청한 놈.”
척준경의 몸에서 오러가 흘러나왔다. 정면승부로 놈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드 마스터라 불리던 놈이니 말이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이량훈에게 물었다.
“나를 죽여서라도 대호를 가져가야겠다?”
“그래.”
“사이코 패스냐? 아무 이유 없이 소환수 하나 가지려고 나를 죽이겠다고?”
“어.”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는 그의 말과 태연한 표정.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놈이 아니다.
“……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응?”
내가 테이블을 강하게 걷어찼다.
쾅!
테이블이 이량훈 쪽으로 뒤집히며 시야를 가렸다. 발로 다시 한 번 강하게 걷어차자 놈이 의자에 앉은 상태로 뒤로 쓰러졌다.
와장창!
떨어진 유리잔이 깨져 사방으로 파편이 흩어졌다.
나는 식칼을 꺼내어 테이블 밑에 깔린 놈의 목에 겨누었다.
척준경이 크게 소리쳤다.
“네 이놈!”
그가 도검을 나를 향해 휘둘렀다.
부웅-
동시에 근처에서 대기하던 박규환이 대검을 휘둘러 막아냈다.
캉!
박규환이 척준경을 째려보며 말했다.
“어리석은 짓 하지 마라. 네 주인의 목이 날아간다.”
“뭐라고?”
“네 주인 죽는 꼴 보기 싫으면 가만히 있으라고.”
박규환의 손이 떨려왔다.
한 손으로 검을 휘두른 척준경의 완력이 박규환보다 높은 것이 확실했다.
나는 박규환을 보며 미소 지었다.
자신보다 강자를 상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치도 꺾이지 않는 의지.
제법인데?
‘…….’
이건 또 뭐야.
턱 밑이 반짝여서 눈을 내려보니 은빛 칼날이 번쩍였다.
칼날의 방향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드니 백발의 노인이 나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거기까지.”
철컥.
백발의 노인 뒤통수에서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이클이 권총으로 그의 뒤를 잡았다.
“칼 내려. 롸잇 나우.”
난장판이다.
이량훈의 동료가 저 백발의 노인이었나. 분명 성기사와 같은 그룹에 들어간다고 했었는데.
머릿속이 복잡하다.
나는 백발의 노인에게 말했다.
“이 칼 안 치우면 누가 먼저 죽게 될까?”
“…… 젊은이가 용기가 대단하구먼.”
“늙은이도 대단하지.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었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니 말이야.”
“허허-”
“안 치워?”
“자네가 먼저 치우게나.”
“…… 이놈이나 저놈이나 말이 안 통하는 건 똑같구나.”
-포효해라 대호.
대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하늘을 향해 크게 포효했다.
-크어어어헝!!
포효(咆哮)
-소환주를 제외한 모든 이의 움직임을 1초 동안 멈추게 만듭니다.
머리칼이 흔들릴 만큼 강한 파동이 주위를 집어삼켰다.
1초.
모두의 시간이 멈추었다.
내가 이 상황을 끝내기에 충분한 시간.
백발노인의 복부를 걷어차고 식칼로 이량훈의 손바닥을 내려찍었다.
콰직!
이량훈이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백발노인이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지며 테이블과 의자를 자빠뜨렸다.
우당탕!
마이클이 쓰러지는 그를 총으로 겨누며 소리쳤다.
“프리즈!”
백발노인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얼어붙었다. 총구가 머리를 향하자 그대로 두 손을 들었다.
“제길.”
“겟 다운.”
“…….”
나는 이량훈의 목을 발로 누른 채 속삭였다.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 다시는 덤비지 마라, 이곳이 경성만 아니었어도 네 목이 날아갔을 거야.”
이량훈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나는 그의 손바닥에 박힌 식칼을 빼내며 일어났다.
팍!
놈의 손바닥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이량훈이 계속해서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페테리아 밖을 향해 걸었다.
어차피 이 칼에는 뱀파이어의 피가 섞여 있어 한동안 놈이 움직이지 못할 테니깐.
“가자 마이클.”
카페 밖으로 나오는 동안 마이클이 계속해서 백발노인을 총으로 겨누었다.
“우리가 나갈 동완. 움직이면 머리에 구멍놔요우.”
백발의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카페 밖으로 나온 나는 대호 위에 올라타며 척준경에게 말했다.
“네 주인을 잘 지키도록 해라. 다음번에는 봐주지 않을 테니깐.”
* * * * *
경성에서 나와 폐허가 된 마을로 향하는 길.
대호 위에 올라탄 마이클이 내게 물었다.
“천재 킴. 아까 그 녀석들, 왜 살려줬어요우? 나중에 다시 덤벼들 것 같던데.”
“…… 살려준 게 아니야. 더 했으면 나도 죽었을 거야.”
“음? 그게 무슨 말이에요우?”
나는 옷소매를 걷어 마이클에게 보여 주었다.
“저주. 이량훈 그 자식, 쓰러지는 순간 내게 저주를 걸었어.”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핏줄이 부풀어 올랐다.
“피, 핏줄이 보라색으로….”
“세크리파이스. 자기 희생 주문 중 하나야.”
세크리파이스.
생명력을 담보로 적에게 강력한 저주를 내리는 최상급의 주문.
저주를 사용한 후, 놈의 머리 위에서 차감된 생명력 게이지 바는 50% 정도였다.
절반의 생명력을 사용해서 저주를 사용할 정도면 같이 죽을 각오를 했다는 말.
놈이 방심하지 않았다면 내 팔이 터져서 날아갔을 것이다.
“세크리파이스….”
“계속해서 싸웠으면 온몸의 핏줄이 이렇게 부풀어 올랐을 거야. 놈의 생명력이 깎인 만큼 내 몸에 걸린 저주가 강해지니깐.”
“이제 어떻게 해요우? 팔이….”
나는 부풀어 오른 핏줄을 쓰다듬으며 마이클에게 대답했다.
“우선 돌아가서 치료하도록 해야지. 될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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