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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점심 식사를 마친 나는 유소라를 데리고 임무 보급소로 향했다.

“소라씨. 아까 말한 대로 임무 선택하시고 나오세요.”

“네.”

점심시간이 막 지나서인지 보급소 앞에는 플레이어들이 얼마 없었다.

우리 앞에 대기하고 있는 인원은 단 세 명.

오전에 보았던 백발의 지팡이 할아버지와 어제 ‘좀비 하우스’에서 보았던 기사 두 명.

굳이 아는 척을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한 나는 유소라와 조용히 서 있었다.

백발 할아버지가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이더니 손을 뻗어 종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안녕하신가.”

“아. 예.”

“초면에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한데. 혹시 자네 그룹에 자리가 남는가?”

“예? 아…. 현재 한 자리 남습니다.”

노인이 방긋 웃었다.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겠나?”

기사가 할아버지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더니 턱을 만지작거렸다.

표정이 좋지 않다.

“죄송한데 저희가 메인 이벤트를 진행할 예정이라 공격 포지션이 필요합니다. 직업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죄송한데 라는 말에 뒤이어 조건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아 할아버지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내 눈에는 저 할아버지가 비범한 인물이 아니라 생각되는데, 거절할 생각인가?

백발의 할아버지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잘 됐군. 내가 마침 공격 포지션이어서 말이야.”

“직업이 어떻게 되시죠?”

노인이 지팡이의 손잡이를 잡아 길게 잡아끌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검날이 반짝였다.

“검객이라네.”

검객.

전직 조건이 까다로워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특수한 직업이다.

무직의 상태로 레벨을 스무 개 이상 올려야 하는데다가 검에 대한 조예가 없을 경우 전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희귀 직업.

벌써 그 조건을 달성한 사람이 있을 줄이야.

내가 놀란 점은 저 노인의 레벨이 벌써 이십 이상이라는 것이다.

종현이 백발노인의 대답에 깜짝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객이라고요?”

“그렇다네.”

“아니…. 검객이시면 레벨이 높으실 텐데. 왜 아직도 세 번째 라운드에 머물고 계시는 거죠?”

노인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사정이 있어서 말일세.”

“…… 그룹에 들어오신다면야 환영이기는 한데. 굳이 저희랑 같이 움직이고 싶으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글쎄. 그냥 자네가 마음에 들었네.”

* * * * *

종현과 백발의 할아버지가 그룹을 이루었다. 임무를 받은 그들은 빠르게 보급소에서 떠났다.

나는 그녀와 함께 임무를 받은 후 리 커우러나 일당을 이끌고 ‘장유의 저택’ 근처로 이동했다.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동시에 움직이니 다른 플레이어들이 술렁였다.

게다가 모두의 시선을 끌 만한 리 커우러나 일당의 복장.

대머리에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두르고 있으니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 커우러나. 그 두건은 뭐야?”

“두건에 역십자 문양 보이시나요?”

“…… 어.”

“김천재 형님의 뒤를 따른다는 저희의 의지를 보이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김천재 남바 완.”

소중한 제니를 그런 곳에 사용하지 말라고….

터벅. 터벅. 터벅. 터벅.

저택 앞에 도착한 나는 리 커우러나에게 물었다.

“준비는 확실히 했겠지?”

내 질문에 리 커우러나가 머리만 한 갈색의 주머니를 흔들며 내게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잡화점에서 기름과 유황을 싹쓸이 해왔습니다.”

“잘했어. 그럼 무전을 칠 때까지 입구 근처에서 대기하도록 해. 다른 플레이어들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도록 하고.”

“예.”

내가 마이클의 무전기 중 하나를 리 커우러나에게 주었다.

[시스템 메시지]

[세 번째 라운드의 메인 이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멀리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도깨비 특공 부대가 보였다.

윤이 나는 검은 수트에 도깨비 가면. 기다란 장검과 K-1 소총.

뒤에서 아우라가 발산되는 것 같은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들을 이끌고 온 김준철이 내게 물었다.

“진입하도록 할까요?”

그가 묻자 선택 화면이 나왔다.

[이벤트를 시작하시겠습니까?]

[YES] OR [NO]

모든 준비가 되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홀로그램 화면의 예스 버튼을 눌렀다.

피유우우우우웅-!

저택의 중앙에서 폭죽이 터져 올랐다. 이어 같은 라운드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보이는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전체 시스템 메시지]

[‘김천재’플레이어의 그룹이 세 번째 라운드의 메인 이벤트를 시작합니다.]

[참여하고 싶으신 플레이어는 ‘장유의 저택’ 앞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이벤트가 시작됨과 동시에 리 커우러나의 그룹이 내게 신청을 해왔다.

[‘리 커우러나’ 플레이어의 그룹이 이벤트에 합류하기를 원합니다.]

-수락 / -거절

“수락.”

[‘장 췌이펑’ 플레이어의 그룹이 이벤트에 합류하기를 원합니다.]

[‘위 서이랑’ 플레이어의 그룹이 이벤트에 합류하기를 원합니다.]

[‘시 즈언핑’ 플레이어의 그룹이 이벤트에 합류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들어오는 모든 제의를 수락하였다. 최대한 많은 수의 플레이어들이 다음 라운드로 갔으면 좋겠다 생각해서였다.

우리와 함께 이벤트를 진행하게 된 인원은 총 백여 명.

물론 우리 그룹까지 포함하면 네 명이 추가 된다.

김준철 소령이 크게 소리쳤다.

“진입한다!”

그의 외침과 동시에 도깨비 부대원들이 저택의 철창문을 발로 걷어차서 부수고 들어갔다.

그래도 벨을 한 번쯤은 눌러볼 줄 알았는데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쾅!

저택의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집사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뒷걸음을 쳤다.

“뭐, 뭡니까!”

김준철이 집사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장유 어디 있나.”

“어, 어떻게 오셨는지부터 말씀하십시오. 영장은 가지고 오신 겁니까?”

“영장은 지랄. 죽기 싫으면 그 새끼 어디 있는지 당장 말해.”

김준철이 나이프를 꺼내어, 집사 목에 가져다 대었다.

살짝 베인 집사의 목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겁을 먹은 녀석이 김준철에게 장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아…… 침실에 계십니다. 피곤하셔서 낮잠을 주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알았다.”

김준철이 권총을 꺼내 들더니 집사의 허벅지를 겨누었다.

탕!

집사가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유소라가 내 옷자락을 잡아끌며 뒤로 바짝 붙었다.

김준철이 집사의 복부를 걷어차더니 내게 물었다.

“동행하시겠습니까?”

[YES] OR [NO]

스토리 진행의 갈림길이다.

나는 YES를 선택하고.

정우, 소라, 마이클은 NO를 선택한다.

어차피 메인 이벤트는 보스만 마무리 지으면 다 같이 완료한 것으로 처리되기 때문에 굳이 같은 길을 갈 필요는 없었다.

[YES]

모두의 선택이 끝나자 김준철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부대원들을 나누어 저택 수색을 시작하였다.

“1소대는 나를 따라오도록 하고. 2소대는 1층에 남아 도피로를 막도록 해라. 가시지요, 천재씨.”

“예.”

내가 그룹원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가 마이클과 유소라를 데리고 접견실로 향했다.

나는 김준철을 따라 장유가 있다는 침실로 갔다.

다다다다다다-!

걷는다기보다는 달린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빠르게 이동하였다.

장유의 침실 앞에 도착한 김준철이 앞차기를 하듯 문을 걷어찼다.

쾅!

두터운 문이라서 그런지 열리지 않았다.

쾅! 쾅!

문을 계속해서 걷어차자 안에서 잠에서 덜 깬 장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대답하는 것 치고는 반응이 상당히 느렸다.

김준철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문 열어.”

-누구냐? 집사한테 허락은 받고 들어온 건가?

“다시 말하마. 빨리 문 열어.”

-……

“마지막 경고다. 셋 셀 테니 문을 열도록 해라.”

하나.

둘.

셋.

대답도 없고. 문을 열지 않았다.

김준철이 휘두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양손검을 등에서 꺼내어 크게 휘둘렀다.

부웅-

쾅!

문이 반으로 부서지며 안이 보이게 되었다. 뒤에 대기하고 있던 특공대원 두 명이 발로 걷어차 너덜거리는 문을 떼어냈다.

안으로 진입하자 장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방의 끝 쪽, 열려있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강한 바람이 커튼을 흔들고 있었다.

“제길! 도망간 것인가.”

아니.

그는 도망가지 않았다.

오우거보다 덩치가 큰 장유가 장문에서 뛰어내렸다면 땅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났을 것이다.

나는 김준철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아뇨.”

“예?”

“장유는 여기 있습니다.”

“…… 어디에요?”

나는 장유의 침대 옆으로 다가가 손가락으로 밑을 가리켰다.

“이 밑에요.”

“침대 밑?”

김준철과 그의 부하들이 침대를 밀어냈다.

그 아래로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계… 단? 왜 이런 곳에 계단이.”

“여길 통해서 도망갔나 보네요.”

“…… 천재씨는 이곳에 계단이 있는지 어떻게 아셨죠?”

내가 씩 웃었다.

“앞서 이곳에 수색하러 왔을 때 발견했습니다. 그때는 저 계단이 왜 있는 건지 몰랐는데, 녀석의 도피로였나 보네요.”

“…… 그렇군요. 역시 천재씨는 대단하십니다.”

[‘김천재’ 플레이어를 향한 김준철의 신뢰도가 향상됩니다.]

[현 시간부로 도깨비 부대원들이 당신의 의견을 전적으로 들어줄 것입니다.]

‘…… 좋아.’

기대 이상의 결과를 만들었다.

방금 내게 보여진 시스템 메시지는 다음 라운드에 가서도 유효한 관계다.

김준철이 어두운 계단 밑을 슬쩍 보더니, 손전등을 들고 장유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따라가기 전 리 커우러나에게 무전을 때렸다.

삐빅.

“진입하도록. 모든 층에 유황을 살포하도록 하라.”

잠시간의 정적 후 무전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삐빅.

“…… 오호라.”

나는 장유의 책상 위에서 게임을 쉽게 풀 만한 물건을 찾게 되었다.

‘이 공만 있으면…….’

무전을 마친 나는 김준철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 * * * *

계단을 따라서 가자 처음에는 밑으로 내려가던 계단이 꼬불꼬불 양옆으로 휘어지더니 마지막에는 위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나는 이곳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가까우면서도 먼 곳.

침실의 바로 옆방이다.

계단의 끝에 도착하자 거대한 철문이 머리 위로 막고 있었다.

김준철이 두 손을 뻗어 밀어내보려 했지만 위에서 무언가가 막고 있는 듯 열리지 않았다.

“제길. 위에 무언가로 막아놨나 본데?”

도깨비 병사 세 명이 더 붙어 다 같이 밀어 보았다.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 철문 위로 장유 녀석이 서 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뒤로 물러나며 김준철을 불렀다.

“이리 나오세요.”

“예?”

“전부 이쪽으로 나오시라고요.”

김준철이 내 눈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혹시 천재씨는 이 위로 올라갈 방법을 알고 계신가요?”

[‘김준철’ 소령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내가 태연한 표정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 이곳에서 그 검을 휘두를 수 있나요?”

김준철이 수트의 어깨 부위에 걸쳐놓은 검을 지면에 내려놓았다.

쿵.

“이 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날이 매섭게 섰다기보다는 망치에 가까울 정도로 두툼한 쇳덩이.

저 무기를 사용하면 분명 가능할 것이다.

아니, 가능하다.

“뭐, 휘두르는 것 정도는 이 정도 공간에서도 가능합니다.”

“좋네요. 그럼 이곳을 향해 휘둘러 주시겠어요?”

내 손가락이 향한 곳은 철문 옆 시멘트 천장이었다.

이곳에서 보자면 천장.

철문 위에서 보자면 바닥.

문과 천장이 수평선에 있는 것으로 보아 머리 위에 있는 방이 멀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김준철이 손바닥으로 천장을 훑어보더니 내게 물었다.

“저 천장을 부수라는 말입니까?”

“…… 예.”

김준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검을 뻗어 천장과 자신의 높이를 재어보더니 대답했다.

“…… 알겠습니다. 모두 뒤로 물러서라!”

부하들이 물러나자, 김준철이 대검을 등 뒤로 길게 빼더니 정신을 집중하듯 두 눈을 감았다.

파도가 넘실거리듯, 뜨거운 햇볕 아래 아지랑이가 흔들거리듯.

무인들 사이에서 흔히 오러라고 불리는 은백색의 실타래가 그의 등 뒤로 보였다.

역시 보통 NPC와는 다른 힘을 가진 자였다.

“건곤일척(乾坤一擲).”

곡선을 그리며 나아간 검날이.

부웅-

천장을 크게 쳤다.

콰광!

박살 난 돌조각들이 쏟아져 내렸다.

와르르르르르.

나는 그 사이로 보이는 장유의 얼굴을 보았다.

갑주를 두르고 있지 않은 상태, 인간이라고 부르기 힘든 그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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